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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유역을 점령한 나라가 한반도의 패권을 잡았다.’
수로교통의 요지이자 대중교류의 관문인 한강 유역은 삼국시대 때 전략적 요충지로 고구려, 백제, 신라가 한강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250여 년 동안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곳이다. 한강 유역을 점령한 나라는 패권을 잡았고 빼앗긴 나라는 쇠퇴하는 결과를 낳았다. 때문에 한강 유역은 단순한 지리적인 점령이 아니라 정치·경제·군사적으로도 중요한 점령지였다.
한강 유역을 차지한 나라는 적의 침략에 대비해 산성과 보루 등을 쌓았는데 지금도 이곳 일대에서는 고구려 뿐만 아니라 백제, 신라의 유물이 함께 출토되고 있어 당시의 격전지였음을 증명하고 있다. 특히 한강 유역 중 서울 도심이 한 눈에 들어오고, 한강이 흘러가는 모습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아차산은 삼국시대 때 한강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반드시 점령해야할 전략적 요충지였다.
◇아차산성(阿且山城)
아차산성은 서울 동부의 한강변 남북교통의 요지에 쌓은 삼국시대 산성(사적 제234호)으로 아단성(阿旦城)·장한성(長漢城)·광장성(廣壯城)이라고도 한다.
아차산은 서울시 전역과 한강유역 일대의 풍납토성, 몽촌토성, 이성산성, 남한산성, 북한산성 등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어 삼국이 한강 유역을 점령하기 위해 250여 년 동안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곳이며, 점령 후에는 한강과 한강 이남지역을 방어하기 위해 성을 쌓는 등 전략적 요충지다.
둘레가 약 1천m에 달하는 아차산성은 표고 200m의 산정에서 시작해 동남으로 한강을 향해 완만하게 경사진 산 중턱 위쪽을 둘러서 성벽을 쌓았다. 산성의 형식은 테뫼식(鉢卷式)에 속하는 말굽형의 산성이지만 규모가 크고 성 안에 작은 계곡과 우물이 있어 포곡식(包谷式) 형태를 띄고 있다.
성벽의 높이는 평균 10m이며 동쪽·서쪽·남쪽에 문터가 남아 있고, 북쪽 정상부(해발 205m)에 장대(長臺)터가 있다. 성벽의 구조는 삭토법으로 형태를 축조한 뒤 그 윗부분을 따라 돌아가면서 낮은 석축 성벽을 쌓았다. 현재는 성벽이 무너져서 토석혼축과 같은 외형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아차산성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장성이 연결되어 있는데 본래 뚝섬 부근의 한강변에서 시작돼 북쪽으로 고지를 따라 아차산에 이르고, 여기서 다시 망우리까지 산줄기를 따라 축조돼 있다. 아차산 주요 봉우리 마다 방위목적을 가진 수 많은 보(堡)가 설치됐으며, 이것이 산등성이를 따라 축조된 장성벽과 연결돼 구리시 아천동까지 연결돼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아차산성은 고구려의 침략에 대비해 축조된 백제의 ‘아단성’(阿旦城)으로, 백제 왕성인 하남위례성으로 추정되는 몽촌토성을 방어하는 시설이었다. 즉 한강 북안에 자리잡고 있는 지형적 조건을 이용해 한강 상류와 하류 쪽에서 올라오는 선박의 움직임을 왕성으로 연락해주는 진성이었다.
고구려 장수왕은 475년 3만 대군으로 백제 왕도 한성을 공격, 아차산성 아래에서 개로왕을 죽인 후 아차산 주능선과 갈래능선의 주요 봉우리에 보루를 쌓고 향후 80년간 남진정책의 전초기지로 삼았다.
아차산성 정상에서는 고구려 유물 1천여점을 비롯해 대형건물터와 간이 대장간 터, 사용자의 신분이나 토기제작터 등을 기록한 것으로 추정되는 글자를 새긴 토기와 화살촉, 말장식품 등이 발굴됐다.
◇아차산 일대의 보루군
구리시와 서울 동부지역에 걸쳐있는 아차산과 용마산 일대는 둘레 100~300m 안팎의 요새(보루) 20여곳이 능선을 따라 2열로 집중배치돼 있다. 이들 보루들은 고구려가 5세기 후반 한강유역에 진입한 후 551년 신라와 백제에 의해 한강유역을 상실하기 전까지 한강유역을 중심으로 전개된 삼국의 역사상을 밝혀줄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특히 용마산보루 5곳은 중랑천을 내려다보고, 아차산보루 5곳은 왕숙천을 굽어보고 있어 한강 교통로를 장악하려는 고구려군의 전초기지 역할을 했다.
▲아차산 1보루
아차산성에서 능선을 따라 북서쪽 해발 250m 봉우리에 자리잡고 있다. 이곳은 기원정사 뒤편에서 시작된 석축 구조물이 산 복부를 타고 올라와 아차산의 주능선과 만나는 지점이다. 유적은 능선의 방향을 따라 장축이 북동-남서향인 장타원형의 토루 형태로 마치 작은 평지토성을 연상케 한다. 토루는 둘레가 91m, 안쪽에서의 높이는 1.5m, 하단부의 폭은 6m 정도이다. 이곳에서 발견된 유물은 대부분 토기편으로 흑색마연의 동이류가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며 황갈색이나 홍갈색의 연질토기들도 있다.
▲아차산 2보루
아차산 중턱에 있는 대성암의 뒤편 해발 276m 지점의 소봉 정상부에 있다. 미사리 암사동 등 한강 일대를 조망하기 매우 용이하고 유적의 동쪽 하단부에는 암벽이 형성되어 있어 방어에 매우 용이한 곳이다. 보루는 소봉의 정상부를 돌아가며 쌓은 석축부와 그 안쪽의 소토부로 나뉜다. 직경 15m 정도인 원형의 석축부는 현재 3단 정도가 노출돼 있는데 석축 시설의 남쪽 부분에는 길이 1.6m, 폭 1.2m 의 방형 돌출부가 있고 그 윗쪽에는 후대에 조성된 돌무더기가 쌓여있다. 또한 석축부의 안쪽에는 적갈색의 소토층이 드러나 있다.
▲아차산 3보루
아차산 2보루에서 서북쪽으로 약 200m 정도 거리에 있다. 3보루는 아차산 주능선 상으로 능선이 한차례 낮아졌다가 높아지며 해발 296.9m를 정상부로 길쭉하고 평탄한 지형을 이루고 있는데 이 소봉의 정상부를 돌아가며 보루가 형성돼 있다. 유구는 평탄한 구릉 정상부를 돌아가면서 석축 시설을 한 것으로 보이며 북쪽 경계지점을 정확하게 확인하기가 어렵지만 둘레는 대략 110m 정도이다. 석축 시설은 유구의 남쪽 부분에 일부 노출되어 있으나 대부분은 흙에 덮여 있다. 유구의 남쪽부분에서 고구려 토기편들이 발견됐다.
▲아차산 4보루
남북으로 뻗은 아차산 능선의 가장 북쪽 봉우리(해발 284m)에 자리잡고 있다. 남쪽으로는 450m 가량 떨어진 곳에 아차산 3보루가 위치하며, 북서쪽으로는 용마산보루군으로 드나들 수 있는 길목이 있다.
아차산4보루는 1997~1998년 성벽 내부 건물지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뤄졌고, 지난해 5월엔 성벽구간을 중심으로 유적의 정확한 규모와 성벽 축조양상을 규명하고자 발굴조사를 실시했다. 조사 결과 성벽의 둘레는 256m이고, 내부면적은 2천256㎡로 아차산3보루에 이어 두 번째로 큰 규모이며 성벽 치(稚) 5개소, 온돌유구 2기, 건물지 석축기단 등을 확인했다. 성벽은 최대 잔존높이가 1.8m
에 이르고, 아차산 주능선에 위치한 남벽과 한강을 조망할 수 있는 동벽은 다른 구간에 비해 잘 다듬은 석재를 이용해 견고하게 쌓아 잔존상태가 양호한 편이었다.
또 북벽과 서벽은 최대 높이가 0.8m를 넘지 않으며, 부정형의 석재를 사용해 조잡하게 축조된 것으로 확인돼 지형과 방어 전략에 따라 달리 축조한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성벽 치는 지금까지 동벽과 서벽에 각각 1개씩 있는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지난해 조사를 통해 북벽에서 2개, 남벽에서 이중구조의 치 1개가 추가로 확인됐다. 치는 성벽과 직각으로 연결됐는데 규모는 남북길이 6~7.2m, 동서길이 5~6.5m 가량이다.
남벽에서 확인된 이중구조의 치는 전체길이가 13.2m에 이르는데, 2.5m의 중앙부 빈 공간을 사이에 두고 북편과 나편의 치로 구분됐다. 빈 공간에는 치의 성벽에 잇대어 4개의 후대 석축단이 축조돼 있으며, 이러한 구조는 용마산2보루와 구의동보루에서도 일부 확인되고 있는 고구려보루의 독특한 구조이다. 내부평탄면의 3호 건물지 하부에서 확인된 ‘一’자형 온돌유구 2기는 층위로 보아 건물지보다 선행하는 유구로 밝혀져 아차산4보루의 내부구조물이 동시기에 축조된 것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구리시는 올해 말까지 아차산4보루에 대한 정비사업을 마무리할 계획이다.
▲시루봉보루
구리시 아천동의 해발 205m의 시루봉 정상부에 있다. 시루봉은 아차산 주능선에서 동쪽으로 뻗어내려 간 지류로서 정상부에 서면 구리시 일원과 한강 이남지역은 한눈에 조망되지만 북쪽으로는 아차산 줄기가 시야를 차단하고 있다.
성벽의 둘레는 220m 정도이며, 남동쪽 성벽에는 치가 확인됐다. 성내에는 대형건물이 있었고, 성벽과 대형건물 사이의 공간은 흙으로 단단히 다져 주거 및 취사지역으로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온돌은 총 6기가 발견됐는데 모두 직선형의 평면형태이며 아궁이는 온돌방향과 수직이다. 배수시설은 대형건물지 외곽에 건물지 벽체와 평행하게 조성됐으며, 배수로는 암반을 굴토하고 바닥에 말각장방형의 판석을 깔고 그 옆에 판석을 세우고 위에 뚜껑을 덮은 형태이다. 대형건물지의 가운데 축조된 저수시설은 평면형태로 직사각형이며, 규모는 남북 9.5m, 동서 6.3m, 깊이는 3.5m로 암반을 파 조성했다. 방수를 위해 바닥과 벽에는 뻘흙을 붙인 것으로 확인됐다. 이 보루에서는 100여점의 철기가 출토됐는데 무기류로는 화살촉과 철모·창고달이 등이며, 공구류로는 철정과 철부·삽날 등이 발굴됐다.
▲망우산 1보루
구리시 아천동의 해발 280.3m 지점에 있다. 이곳은 아차산의 주능선으로 용마봉에서 연결되는 능선이 한번 낮아지다가 솟아오르면서 남북으로 몇개의 봉우리를 형성하는데 공동묘지가 형성되는 지점의 가장 남쪽에 있는 봉우리이다. 이곳에서는 광장동과 구리시 일대를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다. 현재 헬기장 주변을 돌아가며 부분적으로 석축이 노출되어 있는데 석축시설의 직경은 11.2m, 둘레는 35m 정도이다.
▲홍련봉 1보루
서울시 성동구 광장동 아차산 유원지 입구 남쪽에 있는 해발 116m 내외의 구릉 정상부에 있다. 이 구릉은 북서-남동향으로 길쭉하고 가운데가 잘록해 마치 표주박을 엎어놓은 것 같은데 구릉의 각 봉우리마다 고구려유적이 자리잡고 있다. 동남쪽의 유적은 정상부가 평탄하고 주위를 돌아가며 둘레 147m 정도의 타원형 토루가 형성돼 있으며, 토루 안쪽은 우묵하게 파여 있다. 남동쪽에는 문지두리석으로 보이는 홈이 파인 석재가 놓여 있다. 유물은 유적 동남쪽 토루 윗부분에서 주로 발견되고 있는데 고구려토기편과 아차산 일대에서는 유일하게 고구려기와가 출토됐다.
▲홍련봉 2보루
홍련봉 1보루에서 북서쪽으로 100m 거리에 있다. 보루의 정상부는 평탄하고, 외곽엔 장타원형의 토루를 돌아가며 쌓았다. 토루의 둘레는 169m 정도이며 흙에 덮여 있으나 부분적으로 3~4단 정도의 석축이 노출되어 있다. 토루의 내부에는 높이 2m 정도의 단이 있으며 낮은 곳에는 민묘가 조성되어 있다. 고구려토기는 북동쪽의 고대지에서 주로 발견된다.
우리역사 자긍심, 왜곡뿌리 뽑는다
이와같이 구리의 아차산 보루군 등은 고구려 성곽과 역사를 알 수 있는 교육의 현장이자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보다 효율적인 역사교육을 위해서는 가까운 곳에 위치한 고구려 유적과 문화재를 찾아보는 현장교육이 바람직하다.
선조들의 역사를 직접 몸으로 체험하고, 그 속에 깃든 선조들의 혼을 마음으로 느낄 때 우리민족의 역사는 이웃나라의 왜곡된 역사에도 흔들림이 없는 튼튼한 우리 역사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