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詩산책]여우 2

2012.11.27 20:00:17 13면

밖은 눈보라다



무게라곤 없이 그저 휘몰아치는 저 희고 쬐끄만 가시여우들

아무 데나 붙어서는 금세 물이 되고 바람이 되고 흙이 되는 구미호들



그것들을 배경으로

유리 안에서

동백 한 송이 핀다



어제만 해도 수상한 봉오리였던 것이

한 달 전만 해도 대롱 속 실성실성한 물이었던 것이

일 년 전에는 흙이었던 것이

백 년 전에는 돌멩이였던 것이

흑암(黑暗)이었던 것이

무슨 꽃처럼

한 길 가지 위에 난짝 올라 앉아

인(人).간(間).을 홀린다



갓난아이처럼

빠알갛게

울며

/이경림

- 시집 『상자들』- 2005년 랜덤하우스중앙

 

 

 

우리를 홀리는 것들을 시인은 “여우”라 부른다. “아무 데나 붙어서는 금세 물이 되고 바람이 되고 흙이 되는” 변신의 귀재. 눈보라 치는 겨울 창밖, 무게 없이 휘몰아치는 눈송이는 가시여우, 구미호다. 유리창 안에는 눈보라를 배경으로 “동백 한 송이 핀다”. 물이었던, 흙이었던, 돌멩이였던 것이 “가지 위에 난짝 올라 앉아” “갓난아이처럼 / 빠알갛게” 울며 우리를 홀린다. 그래서 동백 한 송이 앞에서 눈길을 돌리기가 그리 어려운가 보다. 일상에서 눈을 떠 이런 여우들을 발견하는 것이 즐겁다. 돌고 도는 삼라만상이 다 여우가 아닌가.

/박설희 시인

 

경기신문 webmaster@kgnews.co.kr
저작권자 © 경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영덕동 974-14번지 3층 경기신문사 | 대표전화 : 031) 268-8114 | 팩스 : 031) 268-8393 | 청소년보호책임자 : 엄순엽 법인명 : ㈜경기신문사 | 제호 : 경기신문 | 등록번호 : 경기 가 00006 | 등록일 : 2002-04-06 | 발행일 : 2002-04-06 | 발행인·편집인 : 김대훈 | ISSN 2635-9790 경기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Copyright © 2020 경기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kg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