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시 산책] 편지

2013.12.10 21:59:24 20면

     편지                                            /심창만

 

추신 뒤에 내리기 시작한
싸락눈은 차마
동봉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편지는 십이월의 갯벌처럼
무거워
그대가 오기도 전에 길을
젖게 합니다
우리가 멀리 젖은 새처럼 떠돌 때
하루는 더디고 일 년은 이렇게
잔인하게 빠릅니다

 

전하지 못한 것들이 모여서
집을 이루고 하루가 갑니다
어제는 이웃의 무허가 루핑집이 불에 탔습니다
그 작고 허술한 집에 그렇게 많은 연기가 살고 있었습니다
기침 소리도 나눈 적 없는 이웃에
차마 탈 수 없는 사연들이 그렇게 많았습니다
무너지면서도 자꾸만 집을 지어
보이던 여윈 기둥들,
마지막 눈을 감으며 마당으로
내려오던 파리한 지붕,
전하지 못한 것들로
더디게 더디게 종일
제 몸을 태웠습니다

 

오늘은 아침부터 날이 궂습니다
빗방울도 없이 다 적십니다
기침과 연기로도 전할 수 없는
이 미세함이, 이 고요가
어제 소방 호스에서 나오던
물줄기보다 더 사납습니다
언제쯤 그대 쨍쨍하게 젖어서
편지보다 먼저 불쑥 들어설 수
있을지요

출처 - 심창만 시집, 『무인 등대에서 휘파람』- 2012년 푸른사상

 

 

 

이 작품은 추신을 덧붙인 편지를 보낸 뒤에 미처 전하지 못한 내용들로 이루어진, 편지 이후의 편지 형식으로 되어 있다. ‘싸락눈’ 같은 걸 어떻게 동봉할 수 있겠는가. 지상의 나날은 “전하지 못한 것들이 모여서” 더디게 제 몸을 태우며 흘러간다. 전할 수 없는 것, “차마 탈 수 없는 사연들”을 언어로 전하려는 것이 바로 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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