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에세이] 12월의 회전목마

2024.12.05 06:00:00 13면

 

나의 사회적 첫출발은 1996년 곡성군청 건설과다. 출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늦가을, 점심시간 뒤 의자에 앉아 햇볕사냥을 즐기고 있는데 군수실 이 양이 앞으로 지나가면서 ‘김 주사님 구두 멋있네요.’ 하는 것이었다. 순간, 나는 ‘사람은 안 보이고 구두만 멋있어 보이는가요?’하고 응대했다. 그 농담 같은 유머로 우리는 그날 퇴근 뒤 함께 영화까지 보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외롭지 않게 객지에서 공무원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어느 날 둘이서 시골에 있는 우리 집을 가기로 하고 가는데 산길을 넘어야 했다. 눈 쌓인 산길 북풍을 정면으로 맞서 돌진하며 힘겹게 걸었다. 동행하던 그녀는 지쳤는지 나에게 노래나 한 곡 불러달라고 했다. 나는 ‘맨발의 청춘’을 불렀고 둘이는 웃으며 산을 넘었다.

 

소설가 이청준의 『눈길』은 눈(眼) 길이 아닌 겨울에 내리는 『눈길』이다. 서울에서 자리 잡지 못하고 사는 젊은이가 남쪽 고향을 다니러 왔다 하룻밤만 자고 가는데 세상천지가 온통 눈이었다. 그런 산속의 눈길을 어머니와 아들 둘이 걷고 걸어서 차부(정류소)까지 가서 아들은 서울로 가는 차를 겨우 타고 어머니는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런데 사지가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온몸이 마치 물먹은 솜처럼 무겁게 가라앉고 있었다. 어머니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어둠 속에 서서 아들이 떠난 찻길만 바라보고 서 있었다. 한참 서 있다 보니 찬바람에 정신이 좀 돌아오고 마음은 새삼 허망했다. 거기다 아직도 날은 어둡고… 한식경 차부 안 나무 걸상에 웅크리고 있다 보니 동녘 하늘이 환해오고— 혼잣길 서둘러 올 때는 아들과 둘이서 오던 길을 혼자 가면서 올 때의 그 발자국에서 아들의 목소리가 따뜻한 온기로 남아 있는 듯만 싶었다고 했다.

 

산비둘기가 푸르르 날아올라도 아들 넋이 새가 되어 다시 돌아오는 듯 놀라지고 나무들이 눈을 쓰고 서 있는 것만 보아도 뒤에서 금세 아들 모습이 뛰어나을 것만 같았다는 생각에, 내 자식아 내 자식아, 너 하고 돌아온 길을 이제는 이 몹쓸 늙은 것 혼자서 너를 보내고 돌아가는구나.… 라고 쓰여 있다. 작가는 ‘어머니가 걸었던 그 하얗던 눈길./ 그 막막하고 서럽던 흰 길을 어찌 세상의 자식들이 다 알았다 할 수 있으랴,/ 자식은 끝내 다 이해하지 못할 그 어머니의 길…, 이라고 굵은 글씨로 박아놓았다.

 

날씨가 추워지면 세한도(歲寒圖) 생각이 난다. 김정희 선생이 제주도에서 그린 세한도(23 x 69.2cm)는 1844년 작품으로 국보 180호이다. 사람은 고난을 겪을 때라야 비로소 그 지조와 일관성이나 인격의 고귀함이 드러날 수 있다는 뜻으로, 한결같은 인격과 지조를 생각나게 하는 명작이다. 흐트러진 정신자세를 바로잡아 주는 세한도정신은 나의 스승 고하(古河) 선생님을 그립게 한다. 따라서 존엄한 작품의 위치를 생각해 보게 된다.

 

12월은 계절의 끝이다. 한 달 한 달 열두 달의 달력을 떼어내듯 인생의 한 해가 끝나는 달이다. 12월 세한도의 늙은 소나무는 쓰러져가는 오두막집 곁에서 우두커니 서서 살아가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 외로움이라면서 견뎌내는 길 밖에 없다는 체념의 표정으로- 12월이 되면 인생 회전목마 같은 삶 속의 질문이 아프다. 나 자신으로 살아야 할 길을 잘 찾아왔는가? 무엇하며 살아왔는가? 스스로의 질문에 가슴이 아프다.

 

어린이날이 있는 5월의 공원에는 회전목마를 타면서 탄성을 지르는 어린이들의 즐거운 비명으로 세상이 떠들썩해진다. 나에게도 아들 손자 손목을 잡고 어린이공원으로 가서 함께 회전목마 타면서 즐기던 순간이 있었다. 그런데 그때는 몰랐다. 회전목마의 흐느낌을! 타는 사람은 즐겁지만 목마는 힘들고 지쳤다는 것을. 추운 겨울에는 누구도 쳐다보지 않는 가운데 정지된 화면처럼 외로움과 추위에 떨고 있다는 것을.


12월은 회전목마의 외로움을 생각하게 되는 그 시간이다. 인생회전목마를 내려야 할 때를 생각하게도 된다. 나무나 목마가 늙었다고 늙은 꽃을 피우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흰 빛으로 변해가는 세한도의 소나무는 생명의 추위를 느끼게 하면서 사람을 겸손하게 한다. 자연이 표정을 바꾸는 데 있어 겨울 풍경의 표정이 좋아 보일 때가 12월이다. 이제는 긍정적인 마음과 ‘웃음은 핵무기보다 강하다.’는 유머정신으로 미래의 희망을 재미있게 꿈꾸어 볼 때다.

김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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