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주의 문화살롱] 일상의 완고함과 씨름하는 중

2025.03.04 06:00:00 13면

 

“나는 아침, 점심, 저녁 이 일상의 완고함과 씨름하고 있다. 축복받기 전에는 나날을 그대로 흘려보내진 않겠다. 천천히 말 없는 시간의 발자국을 따라가고 있다.”

 

'오랜 슬픔의 다정한 얼굴'을 읽었다. 해야 할 일들은 머리를 짓누르고 정리되지 않는 일상의 끄트머리에 매달려 허덕이고 있는 것만 같은 그런 날, 잠시 짬 내어 읽는 시집 한 줄이 마음에 위안을 줄 때가 있다. 오늘 아침은 어쩐 일인지 싯구보다 시집 뒷면에 수록된 작가의 삶이 더 눈에 들어온다.

 

칼 윌슨 베이커(Karle Wilson Baker, 1878-1960) 이야기다. 미국 아칸소주 리틀락에서 태어나 텍사스 남부에서 자란 문인으로, 시인이자 소설가 아동문학가이기도 했던 그는 1931년 퓰리처상 시 부문 후보로 오르기도 했다. ​

 

그가 유년기를 보냈던 1880년대의 리틀락은 한창 철도가 놓이고 빅토리아풍 저택들이 들어서며 확장되고 있던 분주한 도시였다. 교사였던 부모는 도시로 옮긴 후 식료품점 점원으로 일하다 회사를 일구어내기에 이른다. 작가가 꿈이었던 어머니의 응원으로 칼은 어린 시절부터 글쓰기에 푹 빠져 지낸다.

 

외가가 아칸소주 잭슨빌 근처 농장에 있었던 터라 기차여행을 종종 하곤 했는데 칼은 이 여행을 무척이나 즐거워했다고 한다. 시골길과 농장을 거닐며 어린 시절 자연의 아름다움과 다정함에 푹 빠져 지낸 까닭인지 그의 시 곳곳에 자연에 대한 깊은 애정이 묻어 나온다. ​

 

시카고대학에서 1년간 수학할 기회를 얻기도 하는데, 마침 그때는 자전거가 막 보급되기 시작하던 시기라 자전거를 타고 도시를 달리며 소설가, 극작가들과 교류하면서 본격적인 문인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아무리 미국이라 해도 여성이 글을 쓰기 쉽지 않던 시기에 그는 글쓰기를 멈추지 않는다.

 

부모님 병간호로 집에 머물러야 했던 시기에도 공부나 일은 잠시 접었지만 시 쓰는 일은 어떻게든 이어간다. 집이 화재로 전소해 매일 썼던 글을 모두 잃어버리는 일도 있었지만 여전히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1907년 결혼한 후로는 아이들 키우며 가족과의 일상을 소재로 한 글을 쓰고, 고등학교와 대학에서 일할 때에는 강의와 글쓰기를 병행한다. 아동용 교재와 학습용 교재 제작에 시간을 써야 했던 시기에도 에세이와 소설 집필을 이어간다. ​

 

문자를 다루는 일이라는 측면에서 얼핏 같은 일처럼 보여도 실상 문학적 글쓰기는 다른 세상의 일이라 그것들을 일상의 업무와 병행하기는 쉽지 않다. 그럼에도 그는 1960년 82세로 눈감을 때까지 집안일, 학교일, 때마다 상황에 맞추어 오가면서도 쓰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칼 윌슨 베이커는 당대 동부 남성 중심이었던 출판계 구도를, 서부 지역 그리고 여성 작가들에게까지 끌어왔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는다. 젊은 시절 시나 에세이 등 짧은 글에서 시작해 동화, 교재 집필 등을 거쳐 마침내 가족서사와 역사서사까지 다다랐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

 

마음에 담고 있는 일이 진척이 없어 답답할 때가 있다. 상황도 여의치 않고 일상이 우리를 놓아주지 않아 어지러울 때가 많다. 그래도 시간의 힘을 믿어 보자. 사소해 보이는 일상이 쌓여가는 시간을 가벼이 여기지 말자. 꿈을 좇는 과정을 더디지만 계속해 보자. 나만의 속도에 주의를 기울이자. 산책도 하고 가끔은 한눈을 팔아도 좋지만, 오직 유념할 일은 꿈을 향해 가는 이 길을 지속하느냐 마느냐일 뿐이다.

 

“나무와 산책한 뒤 오늘 내 키가 조금 더 자랐다.”

김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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