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자미술관 기획전 '오늘, 분청'...전통의 표면 위에 오늘을 새기다

2025.04.21 14:56:00 10면

'가장 한국적인 도자'로 평가받는 '분청', 현대적 시각에서 조명
다양한 세대 도예가 27명 참가...현대 분청의 개성 담아낸 작품 100여 점

 

"분청은 당대 시대상을 담으려는 작가들의 끊임없는 노력이다"

 

경기도자미술관 기획전 '오늘, 분청'은 동시대 작가들의 시선을 통해 분청을 다시 바라보는 실험이자 제안이다.

 

분청은 고려 말에서 조선 초 사이 약 200년간 제작된 도자기로, 오랜 시간 별도의 명칭 없이 존재해오다가 일제강점기 미술사학자 고유섭 선생이 '분장회청사기'라 이름 붙이면서 '분청'이라는 명칭이 생겼다.

 

백토 분장을 통해 청자와 백자 사이 새로운 미감을 창출한 분청은 이후 '가장 한국적인 도자'로 불리며 조선 전기의 대표 양식으로 자리매김했다. 자유롭고 해학적인 감성, 표현의 유연성은 오늘날까지도 현대 작가들의 실험을 자극하는 요소다.

 

이번 전시는 분청을 과거의 양식으로 고정하지 않고, 현재의 감각으로 어떻게 다시 쓸 수 있을지를 탐색한다. 1970년대생부터 1990년대생까지 다양한 세대의 작가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해석한 '오늘의 분청'을 통해 전통이 오늘을 통과하며 어떤 모습으로 확장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전시는 총 3부와 에필로그로 구성된다.

 

1부 '분청의 속내'는 형태나 기법보다는 '의미'에 집중한다. 분청에 담긴 오늘의 사유, 사회, 그리고 미감을 따라간다. 고려 말 조선 초, 분청은 귀족 중심의 청자·백자와 달리 전 계층이 향유했던 생활도자였다. 해학적이고 자유로운 표현이 가능했던 분청의 특성은 현대 작가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신상호 작가의 '아프리카 시리즈 - 헤드'는 아프리카 조각의 생명력에서 영감을 받아, 분청 기법에 아크릴을 덧입혀 입체감을 살렸다. 신 작가는 전통 도자를 기반으로, 회화·조각·건축 등 매체를 넘나드는 실험을 지속하며 현대 분청의 형식을 넓혀왔다.

 

 

김대훈 작가의 '여섯 번째 터널'은 코로나 시기 수집한 신문기사와 잡지 속 문장을 전사 기법으로 옮긴 도자 작품이다.

 

전사 기법으로 백토를 덧입힌 흙물 위에 사회적 기사를 새긴 이 작업은, 다양한 표현을 수용하는 분청의 확장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읽힌다. 작가는 이번 작업을 통해 여섯 번째 대멸종이라는 키워드를 환기하며, 분청이라는 전통 양식이 동시대의 경고와 성찰을 담는 확장된 도구가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2부 '분청의 표정'에서는 작가들이 전통 기법을 오늘의 언어로 재해석한 방식에 주목한다. 분청은 백토 분장 위에 다양한 기법을 더하는데, 상감·인화·박지·조화·철화·귀얄·담금 등 일곱 가지가 대표적이다. 여기에 현대 작가들은 혼합매체, 재료 실험 등을 더해 새로운 조형 언어를 만들어낸다.

 

 

김정우 작가는 계룡산 지역의 전통 철화분청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철화의 방'은 철분 안료로 무늬를 그리는 철화 기법을 기반으로, 문양을 해체하고 재조합해 새로운 미감을 시도한 작품이다. 작가는 8세기 독일 작센 아우구스트 2세의 도자기에 대한 열망과 의지를 본인의 '철화의 방'으로 빗대었다.  

 

 

윤주철 작가는 전통 귀얄 기법에서 착안해 '첨장'이라는 독창적 표현 양식을 개발했다. 기물이 반쯤 마른 상태에서 흙물을 바르면 수분이 응축되며 표면에 미세한 돌기가 형성되고, 그 위에 수차례 흙물과 색 안료를 덧입히며 질감을 만들어낸다.

 

길게는 반년 이상이 걸리는 지난한 제작 과정을 통해 완성되는 첨장 시리즈는 분청의 물성과 시간성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감각적인 조형성과 실험적 기법이 어우러진 이 작업은 분청의 전통을 현대적 감각으로 확장한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3부 '분청의 몸짓'은 작가의 몸의 감각과 행위를 중심으로 분청이 형상화되는 과정을 조명한다. 고려청자나 조선백자보다 표현의 자율성이 컸던 분청의 태생적 특성을 바탕으로, 현대 작가들은 선, 질감, 동세 등의 조형 요소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자신만의 조형 언어를 만들어낸다.

 

 

이강효 작가는 항아리를 캔버스 삼아 온몸의 흔적을 남긴다. 옹기토로 쌓아 올리고 흰 흙물을 씌운 커다란 항아리나 조형작품을 화면 삼아,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생생한 몸의 흔적을 그려나간다.

 

특히 '분청 산수' 작품은 여러 겹 분장한 용기 항아리에 손을 사용해 시문하는 수화문 기법으로 완성했다. 

 

 

김상기 작가는 분청 외길 24년을 걸어온 작가로, 흙물을 바른 후 손가락으로 무늬를 새기는 '지두문' 기법을 중심으로 작업을 전개해왔다. '분청지두문장군병'은 구워낸 기물에 다시 흙물을 덧입히는 비정형적 제작 순서를 통해 흙과 유약, 안료가 충돌하며 자연스러운 갈라짐과 균열을 형성한다. 이는 의도된 붕괴를 통해 새로운 형태미를 구축하려는 작가의 실험이자, 분청이 아직도 변화 가능성을 품고 있음을 보여주는 도전이다.

 

에필로그 '분청의 숲'에서는 자연을 주제로 한 회화와 도자 작업이 만난다.

 

차규선 작가는 아크릴과 나뭇가지 등으로 흙의 감각을 회화적으로 풀어냈고, 정영우 작가는 도판에 자연 풍경을 섬세하게 그려내 도자의 화면성을 살렸다. 매체는 다르지만, 두 작가는 각자의 방식으로 자연을 담으며 분청의 미감을 공유한다.

 

서로 다른 지점에서 출발했지만, 하나는 발사체처럼 던지고 하나는 발광체처럼 응답하며 전시의 끝자락에서 조화를 이룬다. 이 두 작업은 회화와 도자의 경계를 넘나드는 '오늘의 분청'을 깊이 있게 보여준다.

 

최리지 학예연구사는 "한국에서만 존재하는 고유의 도자 양식인 분청은 재료와 기법이 열려 있어 현대 작가들에게 여전히 다양한 가능성을 제공한다"며 "이번 전시는 전통의 형식에 머물기보다 동시대 작가들의 시선을 통해 분청의 확장 가능성을 조망하고자 기획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오늘, 분청'은 오는 8월 17일까지 경기도자미술관 제2·3전시실에서 열린다. 이번 전시는 분청을 과거의 유산으로 복원하는 데 머물지 않고, 현재의 언어로 다시 써보는 과정 자체에 주목한다. 현대 작가들의 고민과 미감이 전통의 표면 위에 덧씌워지며, 분청은 여전히 진행형임을 증명하고 있다.

 

[ 경기신문 = 류초원 기자 ]

류초원 기자 chowon@kg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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