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자흐스탄 통신] 카자흐스탄에 일고 있는 사회,문화적 변화

2025.10.10 14:32:37

 

지난 9월 22일, 카심-조마르트 토카예프 카자흐스탄 대통령이 미국 뉴욕을 방문해 러트닉 미국 상무부 장관과 회담을 가졌다. 그 자리에서 체결된 42억 달러(약 5조5600억 원) 규모의 기관차 공급 계약은 카자흐스탄이 새로운 시대를 향해 나아가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미국의 철도기업 와브텍(Wabtec)이 카자흐스탄에 300대의 화물 기관차를 공급하기로 한 이번 합의는 단순한 거래가 아니다. 이는 토카예프 대통령이 역점을 두고 추진해온 국가 전략, 곧 카스피해 국제운송로(TITK)와 맞물린 협력으로, 유라시아 대륙 물류의 판도를 바꾸려는 카자흐스탄의 야심과 직결된다.

 

사실 와브텍은 낯선 기업이 아니다. 이미 2009년 아스타나 인근에 공장을 세워 지금까지 600대 이상의 기관차를 현지 생산했고, 현지화율도 45%에 달한다. 단순 조립을 넘어, 기술이전과 엔지니어링 교육을 통해 카자흐스탄 인력 양성에도 기여해왔다. 이번 계약은 그간 쌓아온 협력의 연장선이자, 한 단계 더 깊어진 파트너십의 결실이다. 단지 철로 위를 달릴 기관차 몇 대가 아니라, 카자흐스탄 경제가 ‘자원 의존’을 넘어 비석유 분야 산업 현대화로 나아가는 상징적 사건이라 할 수 있다.

 

토카예프 대통령의 뉴욕 일정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펩시코와 아마존 같은 글로벌 기업과의 협약도 잇따라 발표되었다. 펩시코는 알마티 주에 3억7000만 달러를 투자해 스낵 공장을 건설한다. 이 과정에서 900명의 고용이 새로 창출되고, 카자흐스탄 농가들이 감자 재배에서 저장·가공까지 전 과정에 참여하게 된다. 단순한 외국 기업의 투자 이상으로, 농업-제조업-소비를 연결하는 새로운 가치사슬이 카자흐스탄 땅에서 작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마존은 ‘쿠이퍼(Kuiper)’ 프로젝트를 통해 저궤도 위성 인터넷망을 카자흐스탄에 도입한다. 알마티, 악콜, 악타우에 지상 인프라가 구축되면 전국 어디서나 고속 위성 인터넷이 가능해진다. 이는 단순히 통신 환경 개선을 넘어, 디지털 격차 해소와 사이버보안 강화, 나아가 새로운 경제 생태계 창출을 가능케 한다. 카자흐스탄 정부가 이 프로젝트에 기대를 거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동안 카자흐스탄과 미국의 협력은 석유·가스 같은 전통적 자원 분야에 머물렀다. 그러나 이번 협력은 농업, 제조업, 디지털 산업 등 비자원 분야의 신지평을 열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이 변화는 단순한 외교 성과를 넘어, 사회 전반에 파문처럼 번지고 있다.

 

 

□ 경제 협력이 불러온 새로운 일상

 

경제와 산업의 협력은 곧 사회 변화로 이어진다. 최근 알마티와 아스타나에서는 스타트업 붐이 눈에 띄게 확산되고 있다. 실리콘밸리식 창업 지원 프로그램, 벤처캐피털의 진출, 글로벌 IT기업들의 투자 등이 늘어나면서, 젊은 창업자들이 새로운 기회를 잡고 있다. 카자흐스탄에서 영어로 피칭하고 투자자를 설득하는 청년들이 늘고 있다는 사실은, 사회가 바뀌고 있음을 웅변한다.

 

교육의 현장도 달라졌다. 나자르바예프 대학, 키멥(KIMEP) 등 주요 대학은 미국 대학과 공동 학위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영어 강의와 교환학생 제도를 확대하고 있다. 과거 러시아어가 절대적 지위를 차지했던 교실에서 이제는 영어가 빠르게 자리를 넓혀가고 있다. 젊은 세대에게 영어는 단순한 외국어가 아니라, 글로벌 네트워크에 접속하기 위한 기본 장비가 되었다.

 

소비와 문화의 영역에서도 변화는 뚜렷하다. 넷플릭스 드라마와 할리우드 영화는 더 이상 일부 마니아의 취향이 아니다. 도심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팝 음악, 휴대폰 속 아마존 앱, 길거리 광고판에 등장하는 글로벌 브랜드는 이제 일상이다. 한때 소비에트식 상점에만 의존하던 생활이, 세계의 소비문화와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있다.

 

도시의 풍경 역시 달라지고 있다. 아스타나의 스카이라인은 이미 중동과 유럽을 오가는 항공 여행객들에게 익숙한, 현대적 도시의 상징이 되었다. 알마티의 구도심에도 영어 간판과 세련된 카페, 스타트업 사무실이 속속 들어서며 ‘소련의 흔적’을 덮어가고 있다. 어느 순간, 카자흐스탄 도시는 과거 사회주의 국가의 회색빛 이미지가 아니라, 유럽의 젊은 도시와 흡사한 인상을 주게 되었다.

 

 

□ 러시아와 세계 사이에서

 

그러나 변화가 일방적인 것은 아니다.

 

카자흐스탄은 오랫동안 러시아의 깊은 영향권 안에 있었다. 시인이자 사상가인 아바이 쿠난바예프가 “러시아는 세상을 향한 창”이라고 말했듯, 러시아는 근대화를 가져온 문이자, 동시에 카자흐스탄의 일상에 깊이 뿌리내린 문화적 배경이었다. 소련 시절, 카자흐스탄은 대규모 밀농지로 개간되며 러시아인 이주민들이 대거 정착했다. 세계 최초의 우주비행이 이루어진 바이코누르 우주기지도 카자흐스탄 땅에 있다. 나아가 1991년 소련이 해체될 때조차 카자흐스탄은 연방 유지를 지지할 만큼 친러시아적 태도를 보였다. 이처럼 러시아와의 경제·문화적 관계는 단단했다.

 

하지만 세월은 새로운 균열을 만들어냈다. 소련 시절을 경험한 세대는 여전히 러시아와의 유대를 중시한다. 러시아어는 카자흐어와 함께 공용어로써 지금도 행정과 비즈니스 영역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반면, 독립 이후 태어난 세대는 점점 더 글로벌 협력과 개방을 미래의 기회로 받아들인다. 그들에게 러시아는 더 이상 유일한 ‘창’이 아니다. 미국, 유럽, 아시아 등 다양한 세계와의 연결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이 세대 간의 인식 차는 도시 일상 속에서도 확인된다. 알마티의 한 카페에서는 이제 영어 메뉴판이 자연스럽다. 젊은 직원들은 영어로 대화를 시도하고, 손님들도 흔쾌히 받아들인다. 러시아어로만 가득 차 있던 공간이 점차 다언어적 환경으로 변모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단순한 언어 사용의 변화가 아니라, 세대가 지향하는 세계관의 차이를 보여준다.

 

 

□ 변화의 의미

 

오늘날 카자흐스탄의 변화는 단순한 서구화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유라시아의 심장부에 위치한 국가가, 다시 한 번 교차로로서의 정체성을 되찾아가는 과정이다. 실크로드의 오랜 전통처럼, 카자흐스탄은 다시금 동서 문명이 만나는 현장이 되고 있다. 경제 협력은 일자리를 만들고, 새로운 소비문화를 불러온다. 교육과 문화 교류는 젊은 세대의 사고방식을 바꾼다. 이는 곧 사회 인식의 지층 변화를 이끌어낸다. 카자흐스탄이 러시아적 영향에서 벗어나 세계 속으로 나아가려는 이 움직임은, 아직 진행 중인 거대한 실험이다.

 

오늘의 알마티 거리에서 느껴지는 유럽적 세련됨, 청년 창업자들의 활기찬 영어 피칭, 그리고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글로벌 음악은 모두 같은 신호를 보낸다. 카자흐스탄은 더 이상 과거의 소비에트 공화국이 아니다.

 

그러나 이 변화는 아직 불완전하다. 전통과 개방, 러시아와 미국, 구세대와 신세대 사이의 긴장은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변화가 일시적 바람이 아니라 사회 전반을 재구성하는 거대한 흐름이라는 사실이다.

 

유라시아의 광활한 초원 위에서, 카자흐스탄은 지금 새로운 길을 만들고 있다.

김상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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