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김형의 뒷모습 / 유익서 지음 / 산지니 / 272쪽 / 1만 9000원
앞으로도 인류에게 문화 발전이 필요하다면, 사람들이 계속 영상매체를 신주 모시듯 모시고 살아서야 되겠나, 아니면 생각을 자극하여 창조적 행위를 유도하는 활자매체를 문화의 대표적 지위에 다시 재옹립시켜야 되겠나? (본문 中)
문학과 삶의 경계를 오가며 예술의 본질을 탐구해 온 소설가 유익서가 여덟 번째 소설집 ‘김형의 뒷모습’을 펴냈다.
이번 작품집은 기술과 영상 매체의 발달로 독서 문화가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여전히 문학이 품어야 할 사유와 품격이 무엇인지를 질문한다.
유익서는 등단 이후 50여 년 동안 전통과 현대를 넘나들며 장편과 단편을 꾸준히 발표해 온 원로 소설가다. 통영 한산도로 거처를 옮긴 뒤 17년간 외부와 거리를 둔 채 고독한 생활을 이어오며 문학적 갱신을 모색해 왔다.
이번 소설집에는 그러한 세월 속에서 길어 올린 일곱 편의 단편이 실렸다. 작품들은 예술가의 고독과 현실, 그리고 시대의 변화 앞에서 문학이 어떤 질문을 던져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표제작 ‘김형의 뒷모습’은 문학을 단순한 ‘이야기’로 치부하는 세태 속에서 창작자가 느끼는 절망과 책임을 드러낸다.
소설가 김형은 취재를 위해 통영을 찾았다가 옛 동인을 만나고, 갑골문자 연구자를 찾아가지만 “소설과 엮이고 싶지 않다”는 냉담한 거절을 받는다. 세속의 무관심 앞에서 분노한 그는 결국 쓸쓸히 통영을 떠난다. 작가는 이를 통해 소설의 품격과 존재 이유에 대한 자신의 고민을 투영한다.
‘달걀 벗기기’는 예술의 가치가 정치적 올바름의 잣대에 따라 평가받는 현실을 다룬다. 소설가인 주인공은 고창의 미당시문학관을 찾아갔다가 서정주의 친일 행적으로 인해 그의 시가 교과서에서 삭제됐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는다.
작품은 ‘아름다움’과 ‘도덕’ 사이의 복잡한 관계와 문학이 지켜야 할 점을 섬세하게 짚는다.
‘저 너머 고향’에서는 자유를 억압하는 체제의 폭력을 상징적으로 그린다. 고향으로 가기 위해 ‘빛의 벽’을 넘으려다 실패한 사내는 법정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20년이 넘는 감옥살이 끝에 출소하지만 자유가 오히려 불편한 것이 되어버린다.
그는 다시 감옥으로 돌아가기 위해 살인까지 저지르고 결국 ‘체제에 길들여진 인간’의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옰’은 구소련 체제 아래에서 예술이 이념의 도구로 전락하는 현실을 묘사한다. 음악적 재능을 지닌 까레이스키 소년 비쨔는 체제의 통제 속에서 퇴학 처분을 받고 좌절한다.
작가는 한 소년의 붕괴를 통해 창의성과 자유를 억압한 사회주의 체제의 폭력성을 비판, 이념을 넘어선 예술의 본질적 가치를 되묻는다.
소설집에는 작가 자신의 자전적 서사도 깊게 배어 있다. 한산도를 배경으로 한 ‘탈춤’에서는 전통예술가와의 대화를 통해 예술의 계승과 변화, 시대를 초월한 창작의 의미를 모색한다.
‘… 및 …’의 화자는 한산도에서 은둔 생활을 이어가는 소설가로 세상을 바꾸려던 젊은 날의 열망과 나이 듦의 회한을 동시에 품고 있다.
마지막 작품 ‘혼자 나는 새가 갖추어야 할 다섯 가지 조건’은 죽음과 고독을 넘어 삶의 의지를 다시 세우는 인물의 여정을 그린다.
마칼루 원정 중 친구를 잃은 주인공은 죄책감에 시달리다 다시 산으로 향한다. ‘고독한 새가 갖추어야 할 다섯 가지 조건’을 되새기며 절망 속에서도 새롭게 날아오르려는 인물의 모습은 작가가 고독 속에서 지켜온 창작의 자세와 겹쳐진다.
‘김형의 뒷모습’은 한산도의 고독 속에서 길어 올린 유익서의 문학적 사유이자 지금 이 시대에도 소설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되묻는 진지한 응답이다.
[ 경기신문 = 류초원 기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