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대신 번호로 불립니다.교도소에 수감된 사람 이야기가 아닙니다. ‘싱어게인’이라는 예능 프로그램 이야기입니다. 방송사의 프로그램 제작 의도는 이렇습니다. “한 번 더, 기회가 필요한 가수들이 대중 앞에 다시 설 수 있도록 돕는 리부팅 오디션 프로그램.” 쉽게 말하자면, 무명 가수에게 무대에 설 기회를 주는 경연 프로그램입니다. 시청자들에게 꽤 인기가 많았는데, 코로나 여파로 새로운 시즌이 최근에야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공식 명칭은 ‘싱어게인 4’입니다.
그렇다고 프로그램을 알리려는 건 아닙니다. 새로운 시즌에 출연한 이름 모를 가수의 이야기를 하려는 것뿐이니까요. 그녀의 이름은 ‘18호’입니다. 이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사람은 이름 대신 각자에게 주어진 번호로 불립니다. 우스갯소리로라도 오징어게임을 떠올릴 필요는 없습니다. 오징어게임에 참여한 사람처럼 게임에 졌다고 해서 목숨을 잃는 건 아니니까요. 다음 라운드에 오르지 못한 출연자는 번호에 가려졌던 자신의 이름을 밝히고 프로그램을 하차하면 그만입니다.
다행히 이번 시즌에 출연한 18호 가수는 1라운드를 통과했습니다. 모든 심사위원이 ‘AGAIN’ 버튼을 눌렀으니 근사한 출발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경연 프로그램 용어대로라면 멋지게 살아남았다고나 할까요. 살아남았으니, 그녀의 이름은 여전히 18호입니다. 나는 이어지는 라운드에서도 그녀가 쭉 살아남기를 희망합니다. 최종 라운드까지 살아남아서, 18호라는 번호를 스스로 떼어내고 세상천지를 향해 자신의 이름을 당당히 밝혔으면 좋겠습니다.
18호로 불리는 그녀는 죽다 살아난 가수입니다. 죽음은 싱어게인 예심에 참가하고 돌아가는 길에 찾아왔습니다. 트럭 운전사는 그녀가 바퀴에 깔린 걸 처음엔 몰랐습니다. 그렇게 몇 미터를 더 굴러간 바퀴 밑에서 그녀는 살아 돌아왔습니다. 죽음은 그녀의 허리뼈를 여섯 개나 부러뜨렸지만 저세상으로 데려가지 못했습니다. 노래 부를 수 있는 목과 기타를 칠 손이 있어 다행이라는 그녀는 병실에 누워서도 노래 연습을 하였습니다. 그리곤 휠체어에 몸을 맡긴 채 1라운드 경연 무대에 올랐습니다. 올라서, 살아 돌아온 세상을 향해 노래를 불렀습니다.
굳이 이름을 밝혀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싱어게인에 출연한 18호 가수만의 이야기가 아니니까요. 나와 당신이 살아가는 세상에는 너무도 많은 인간 18호가 살고 있습니다. 매 순간 죽음의 바퀴로부터 살아 돌아온 인간 18호들 말입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모르게도, 그녀가 부여받은 ‘18’이라는 숫자를 가슴에 새기면서요. 그렇잖습니까. 십팔이든, 씨발이든, 씨팔이든... 세상은 참말 뭣 같기 일쑵니다. 그래서겠지요. 뭣 같은 세상은 이름보다 번호를 선호합니다.
나와 당신도 예외일 순 없습니다. 등수로 줄을 세우고, 서열로 존재를 확인하고, 신용카드 한도로 값이 매겨집니다. 이름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건 이름 뒤에 감춰진 숫자입니다. 연봉의 액수거나, 부동산 평수거나, 묵혀둔 코인이나 주식의 수량 같은 것 말입니다. 그렇게 굴러가는 이 도시의 뒷골목을 배회하는 건 어김없이 또 다른 18호들입니다. 알아주는 사람 하나 없는 명함을 흔들어대며 빌딩 그림자를 향해 소리칩니다.
- 씨발, 아직 안 죽었어.
무명 가수 18호를 응원하는 까닭이 거기 있습니다. 생각할수록 형편없는 게 내가 사는 꼬락서니라서, 그녀를 비껴간 죽음의 바퀴를 부적 삼아 견뎌내고 싶었달까요. 당신은 어떠십니까. 나이만 먹었지, 여전히 속없는 나는 이렇게 믿고 있습니다. 이름은 잊혀도, 노래는 남는다고요. 그래서 액수로 바꿀 수 없는 글을 노래랍시고 불러대고 있답니다.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이렇게 불러대는 노래가 내가 살아온 이름인 것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