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혜주의 라이프 in]영화 '왕사남' 엄흥도 후손 엄춘미, “우리 조상님과 함께 영화 찍은 것 같아요”

2026.03.30 13:49:38 5면

광천골 마을 사람으로 출연
결혼 후 접었던 연기 대한 갈증 무대와 스크린에서 결실
긍정적인 마인드, '리셋' 마음가짐 통한 행복한 무대 선사

 

배우 엄춘미는 1969년 10월 10일 생으로, 연극 '사미인곡', '열개의 인디언인형', '상설의 시대',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칠수와 만수', '어린왕자', '증인' 등 다양한 작품을 선보여 왔다. 최근에는 천만 영화 '왕과 사는 남자'에 출연해 이름을 알렸으며, 넷플릭스 드라마 '달러' 공개도 앞두고 있다.(약력)

 

화려한 순간 뒤 가려진 시간들이 겹겹이 쌓여 완성되는 한 사람의 인생.

 

'서혜주의 라이프 in'은 그렇게 알려진 얼굴 너머의 이야기를 펼쳐보는 기록이다.

 

그 세 번째 기록으로 26일 청주 청년극장을 찾아 '호장 엄흥도'의 직계 후손이자 영화 '왕과 사는 남자'에 출연해 주목 받은 연극 배우 엄춘미(57)를 만났다.

 

그의 삶을 관통하는 한 축에는 선대의 이름이 자리한다.

 

호장 엄흥도는 조선 전기 단종(노산군)의 시신을 거두어 장례를 치른 인물로 알려져 있다. 정치 격변기의 시대, 계유정난과 왕위 교체 과정 속 '절의'의 상징으로 평가된다.

 

단종은 숙부인 세조에게 왕위를 넘겨준 뒤 유배됐다가 끝내 사사됐고, 이 과정 속 단종을 돕거나 애도하는 행위는 정치적 위험을 수반했다.

 

그럼에도 사료와 전승에 따르면 엄흥도는 당시 정권의 눈을 피해 단종의 시신을 수습하고 매장했다.

 

이 같은 그의 충의는 조선 후기와 근현대에 들어 충신의 표상으로 재평가됐으며, 단종에 대한 추모가 공식화되는 과정에서 다시 주목받았다.

 

 

이러한 역사적 비극을 담은 영화 '왕과 사는 남자'는 개봉 50일 만에 1500만 명을 돌파하며 흥행을 이어가고 있다.

 

이에 영화 속 광천골 마을 사람으로 출연한 엄춘미 역시 제2의 인생을 맞이했다.

 

1987년. 학창 시절부터 연극에 몸담아온 그는 1993년 결혼과 동시에 고향 청주를 떠나 김포에 정착했다. 아내이자 엄마로서의 시간을 보내며 연기를 포기했지만, 그의 열정과 갈증은 꺼지지 않는 불씨처럼 가슴 한켠에 남아 있었다.

 

결국 그 열정은 2024년 그를 다시 무대 위로 불러냈고, 33년 만에 복귀한 엄춘미는 연극 '상설의 무대'로 돌아왔다.

 

이후 연극 '열 개의 인디언 인형'에 이어 영화 '왕과 사는 남자'까지 출연하며 관객들에게 자신의 이름 석자를 완벽하게 각인시켰다.

 

콘텐츠 범람과 OTT 확산으로 영화 시장이 축소된 요즘, '왕과 사는 남자'는 자극적 소비 흐름을 벗어나 '사람의 이야기'에 집중하며 서사의 본질로 되돌아갔다.

 

엄춘미 역시 삶을 '리셋'하듯 다시 다잡으며, 배우와 엄마, 아내, 딸로서의 역할 속에서 균형을 찾아가고 있다.

 

 

이번 라이프 in은 "나는 배우 엄춘미"라는 그의 정체성을 따라가 본다.

 

엄춘미는 영월 엄씨 충의공파 30세손으로, 호장 엄흥도의 직계 후손으로 큰 주목을 받았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를 찍은 후에야 직계 후손임을 알게됐다는 그는 아버지에게 감사를 전했다.

 

그는 "사실 처음에 영화를 출연할 때만 해도 직계 후손이 아닌 반계 후손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어렸을 적부터 호장 엄흥도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지만, 그때 당시에는 가볍게 넘어갔죠. 예전에는 족보에 남자 이름 밖에 없었어요. 두 번째 개편할 때 아버지께서 여자 이름도 모두 넣었는데, 이때의 기록이 오늘날 후손의 증거가 돼 영광의 순간을 누리고 있네요"라고 말했다.

 

엄춘미의 말처럼 연일 식지 않는 뜨거운 관심에 그의 휴대폰은 쉴 틈 없이 울리며 인기를 실감케 했다. 이러한 행복의 배경에는 가족들의 응원과 지지가 있었다.

 

그는 "남편은 연애할 때부터 연극을 했다는 걸 알고 있었고, 여전히 갈증이 있다는 것도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크고 나니 '엄마 연극하는 모습 보고싶어'라고 하더라고요. 이러한 가족의 응원 덕에 용기를 내 무대 위로 복귀하게 됐죠"라고 말했다.

 

이어 "사실 처음에는 영화에 폐를 끼칠까봐 직계 후손인 걸 말하는 게 맞는지 고민했습니다. 촬영 당시에는 농담처럼 '우리 조상님하고 찍는거야'라고 말하며 웃어 넘겼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관객들의 반응과 댓글을 인지하며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이 들더라고요. 가족들 역시 너무 영광스러워 하고 잘됐다고 함께 좋아해줘서 너무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라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엄춘미는 이 같은 흥행의 배경으로 '사람의 이야기'와 '현장 분위기'를 꼽았다.

 

조심스레 조상 엄흥도의 마음을 유추해본 그는 말문을 열었다.

 

"조상님도 한 사람이었고, 임금이었지만 이홍위도 사람이었다고 생각해요. 저도 영화 흥행과 함께 조상님에 대해 많은 공부를 했는데, 이런 일화가 있더군요. 이홍위(노산군)가 유배지에서 악몽을 꾸고 슬피 울 때 이 소리를 듣고 (엄흥도가) 강을 건너갔는데, '누구냐'는 질문에 '곡소리를 따라온 엄흥도입니다'라고 답했다고요. 이후로 수시로 오고가며 밥도 먹고 유대감이 형성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조심스레 유추해보자면 조상님에게 이홍위는 아들이자 식구이지 않았을까요. 정치적 요소가 아닌 사람으로 봤기에, 또 '우리가 알던 단종이 사실은 나약하지 않고 영화 속 이홍위의 모습이었을수도 있지 않을까' 희망을 심어주는 면에서 흥행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이아 촬영 당시 웃음이 끊이지 않아 가장 행복한 현장이었다는 그는 동료 배우들과 장항준 감독에게 감사의 뜻을 전했다.

 

'해피 바이러스'라는 별명답게 장항준 감독은 이른 아침부터 출연진과 눈을 맞추며 현장을 이끌었고, 스태프들 역시 인상을 찌푸리는 이 하나 없이 연기에만 몰두할 수 있는 분위기를 완성했다.

 

특히 엄춘미는 '태산' 역을 맡은 김민 배우와의 비하인드 일화를 소개하며 현장의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전했다.

 

그는 "단종이 사약을 받는 씬을 찍고 있을 때 입 안에 벌레가 들어간 거에요. 기침을 참으려고 했는데 알다시피 참아지지가 않더라고요. 결국 재촬영을 했는데 그날 햇빛이 내려쬐는 날씨에 땀도 흘리고 있어서 너무 죄송했습니다. 모두들 괜찮냐고 저를 먼저 걱정해주는 와중에 김민 배우가 커피를 어디서 사들고 왔더라고요. 씬이 겹치지 않아 접점이 크게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 감사했고, 저한테는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입니다"라며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이날 엄춘미는 캐스팅과 관련된 비하인드도 전했다.

 

그는 "감독님을 비롯한 관계자들에게 캐스팅 단계에서 '호장 엄흥도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미리 알렸어요. 다만 당시에는 저 역시 반계 후손으로 잘못 알고 있었고, 감독님도 언론과 통화하는 과정에서 단순히 후손이라고만 전달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어 "이후 기자로부터 사실 확인 요청이 들어왔고, 가족을 통해 확인한 결과 반계가 아닌 직계 후손이라는 점을 알게 돼 이를 다시 전달했어요. 이렇게 큰 관심을 받을 줄 몰랐습니다"라고 설명했다.

 

 

현재 엄춘미는 연극 배우이자 극단 청년극장의 선배로서 후배들을 이끌며 더 큰 무대에 설 수 있도록 돕고 있다. 무대에 서는 것 자체가 행복하다는 그는 오늘날의 관심이 극단 후배들에게도 닿기를 바라며 다시 얻은 기회를 잡고자 한다.

 

엄춘미는 "지금처럼. 딱 지금처럼만 주어진 자리에서 뭔가를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연극 '상설의 시대'가 제 복귀작이었는데 많이 울고 힘들었어요. 선배로서 부족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고, 많은 양의 대사를 외울 수 있을지 두려움부터 앞섰습니다. 하지만 오랜 시간 갈증해왔던 나의 모습이 실현되는 순간 느꼈어요. '아, 나는 연기를 해야 하는구나.' 무대 위에 오를수만 있다면 배역은 어떤 것이든 상관없어요. 저는 청년극장 배우 엄춘미니까요"라고 소감을 말했다.

 

그러면서 후배들을 비롯한 모든 이들에게 단단한 한마디를 전했다.

 

그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에 고민하고 걱정하지 말고 연연하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저는 '이 또한 지나가리라'가 좌우명인데요. 방금 제가 한 말도 이미 지나갔듯이 앞으로에 집중해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후회되는 일도 있겠지만 긍정적인 마음가짐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다 보면 점점 더 나아지지 않을까라고 생각해요"라고 말했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에서 이홍위는 "설령 이 거사가 실패할지라도 우리가 역사를 바로잡고자 했다는 흔적을 남길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선조가 남긴 정체성과 오늘날 후손의 열정이 맞닿은 이 작품은 대한민국을 웃고 울리며 역사가 기록의 증거이자 미래를 살아가는 힘임을 다시금 확인시켰다.

 

엄춘미는 이러한 사랑과 관심을 마음 속에 되새기며, 내일은 또 새로운 '배우 엄춘미'로 무대에 오른다.

 

[ 경기신문 = 서혜주 기자 ]

서혜주 기자 judyjudy1017@kg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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