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을 맞고 또 한 살을 먹는다. 새해 떡국을 먹으면 한 살 먹는다는 옛말이 실감 난다. 한 살을 먹는다는 의미가 더욱 와닿는 건 나 역시 생각지도 않은 60세를 훨씬 넘었기 때문이다. 한 살의 의미는 그만큼 더 성숙해진 인생살이를 뜻한다. 누구나 먹는 한 살인데 이런 여러 생각을 하는 것은 그만큼 헤아릴 일이 많기 때문이다. 인생사, 세상사가 그만큼 복잡해지는 것인데 꼭 모두가 나쁜 것만은 아니다. 살면서 인생사는 복잡해질 수밖에 없는 일인데 갑자기 어르신이 된 느낌이다. 갑자기 어르신처럼 황당한 일은 없을 것이다. 시대는 급변하는데 나는 그 흐름에서 비껴 나 있는 듯한 느낌이다. 그 누가 도도히 흐르는 시간과 문명의 거대한 흐름을 막을 것인가? 이 순간 중요한 것은 대처하려는 마음가짐이다. 밀어닥치는 거대한 문명의 흐름을 막을 수 없다면 그에 대처하는 마음가짐이라도 있어야 하는 것이다. 세상은 급변한다. 가족의 해체와 인터넷 환경, 금융권의 환경 변화, 문화 환경 등 급변하는 세상을 살려면 그만큼의 대처 능력과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 공연 한 편을 보지 않고 신작영화의 대화에 끼지 못하고 이즈음 나오는 가요에 공감이 안 간다면 그야말로 뒷방 어르신이 아닌가
노년은 사전적으로 정상적인 인간의 일생에서 마지막 단계이다. 과거에는 60세 이상이면 노인이었으나 현재는 65세 이상이 노인으로 분류된다. 노인이 되려고 희망하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마는 짧은 인생길에서 하염없이 불쑥 찾아오는 게 노인이라는 두 글자이다. 노인은 편히 쉬라고 공경 받으라고 만들어진 말일 텐데 전혀 그렇지 못하니 이러 부조리가 어디 있을까? 노인이 되었다고 편하게 자식들에게 용돈을 받는 부모는 과연 몇이나 될까? 요즘 어르신들에 대한 여러 복지 혜택이 늘었다. 하지만 정상적인 구직을 통해 안정적인 수입을 원하는 노인과 생활 형편으로도 아직은 일해야 할 노인이 모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오히려 노년이 되면 돈이 더 필요하다. 혼사를 앞둔 자식들이 있을 수밖에 없고 돈 필요한 일은 사방에 산적해있다. 품위 유지비가 아니라 꼭 필요한 생활비용이 절대 필요한데 의료비 등 돌발비용까지 손수 마련해야 하는 처지이다. 이런 비용은 용돈으로 처리될 비용은 절대 아니다. 젊어서 비축해놓은 노후자금을 마려한 노인이 얼마나 될까? 내 주변을 둘러보면 살고 있는 집 한 채가 모두인 사람들 뿐이다. 그들은 연금 생활자인데 연금이 생활비가 안된다며 한숨들이다.
노래만큼이나 우리 삶과 밀접한 장르도 없다. 노래는 심오한 인생의 철학을 음유하기도 하지만 당대 생활상을 반영한 것이다. 그래서 노래 가사를 읽고 노래를 듣는 것은 그 시대를 이해하는데 절대적인 장르이다. 그동안 쭉 노랫말과 곡을 들어본 바 한국 노래는 굴곡진 우리에 근현대사를 읽는 필수 요소이다. 한국가요는 일제강점기에 시작되어 오늘에 이른다. 일본 엔카의 영향에 대한 반론이 고 박춘석 작곡가에 의해 제기되었고 지금도 그 유래와 영향에 대한 설은 끊임없이 이어진다. 1960년대에는 서양 팝송의 영향으로 음악의 흐름이 곁가지로 퍼져나갔고 그것은 청년문화를 태동하는 계기가 됐다. 그러나 이러한 흐름과 상관없이 한국가요는 한국인의 심성과 아픔, 즐거움을 노래하며 대중의 환호를 받아왔다. 노래란 가수 이외에도 작곡가, 작사가의 몫이 크다. 한국가요는 가수들이 잘 부를 수 있는 요소를 갖고 있다. 일제강점기는 물론이고 광복 후부터 한국전쟁, 그리고 휴전 후의 유행가를 통해 알 수 있다. 당시 노래를 들어보면 온통 한과 눈물의 노래이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격동의 세월이 만들어 낸 것이다. 우리 어르신들은 1945년 광복을 맞고는 행복의 시작인 줄 알았지만 현실은
장수에 대한 갈망은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그러나 마음대로 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장수의 방법은 있다. 누구나 아는 상식적인 일이지만 꾸준히 운동하는 일이다. 적당한 식생활로 칼로리를 소모하고 신체가 피로를 부담을 갖지 않게끔 운동하는 것은 우리 삶에서 필수이다. 운동 후 사우나를 하고 스트레스를 줄인다면 누구나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 그러한 습관적인 일상을 도모한다면 장수도 가능하다. 일생에 이루어 놓은 성과는 개인 별로 다르지만 자신의 현재에 만족하며 자신의 삶을 즐길 줄 아는 지혜도 필요하다. 가진 이가 한 푼 더 벌려고 아등바등하는 인생은 슬기롭지 못하다. 얼마 전 한국영화계의 거목이신 동아술출공사의 이우석 회장을 따라 그의 고향인 성주를 방문했다. 경북 성주는 인구 4만 5천 명의 군이다. SRT로 1시간 20분 거리인 김천역에서 내려 차로 30분 거리이다. 참외의 주산지로 알려져 있고 최근 사드기지로 세인의 주목을 받은 곳이다. 이곳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를 다녔다. 그리고 부산을 근거지로 살다가 서울에서 본격적인 영화사업을 시작했던 그이다. 고향은 누구에게나 소중하기에 그는 후학들을 위해 거금 1억 5천만 원을 쾌척했다. 그의 삶의 발자취는 모
삶이 무료하다고 느끼는 분들이 늘어난다. 모든 것이 정상인데 그렇게 무기력증에 빠진 분들을 위한 제안이다. 첫째, ‘유튜브’ 친구 삼기이다. 유튜브에는 여러 볼거리가 충만하고 특히 ‘EBS 다큐프라임’을 검색하면 우리가 모르고 살았던 호기심 충족의 유익한 볼거리로 가득하다. 둘째, 그것도 무료하다면 유튜버가 되어 자신이 만든 영상을 유튜브에 올리는 것이다. 자신의 이름 뒤에 TV를 붙인 자신의 TV 채널을 개설해 자신이 편집인, 제작 PD로 새 인생을 사는 것이다. 제작 경험이 늘어나 직접 단편영화를 기획하고 제작하여 볼 수도 있다. 그렇게 만든 영화가 노인영화제에서 상이라도 받는다면 아예 전업감독으로 나서 자신의 숨은 재능을 발휘하고 알바로 수입도 올려 볼 일이다. 전국에서 개최되는 단편영화제의 숫자는 무려 300여 개에 이른다. 거의 매일같이 영화제가 열리고 있는 셈이다. 이런 호시절에 영화제 수상이 꼭 남의 일만은 아니다. 무엇을 만든다는 것은 분명히 재미있는 일이다. 특히 영화 만들기만큼 재미있는 작업은 없다. 그것은 종합예술이며 가장 창의적인 작업임을 바로 실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튜버가 되는 방법은 의외로 쉽다. 자신의 휴대폰을 이용해 촬영할
홍콩은 지금의 사태 이전만 해도 아주 이상적인 꿈의 도시였다. 지난 세기에 영국의 식민지였지만 민주주의를 뿌리내리며 자유를 누리는 이상적인 도시국가로 나아갔다. 그래서 전 세계 금융이 몰리고 무역의 중심지로 자리잡았다. 홍콩을 놀러가는 일은 여러 사람들에게 즐거운 일이었고 ‘홍콩 간다’는 말은 최고의 즐거움을 대변하는 말이 됐다. 홍콩은 한국 영화와 관련 깊은 곳이다. 한국연예주식회사는 1958년 한국 최초로 쇼브라더스와 ‘이국정원’이라는 영화를 만들었다. 이후 신상옥 감독이 여러 편의 합작영화를 감독·제작했고 위장합작영화로 일컬어지는 영화교류가 성행했던 곳이기도 하다. 한국의 정창화, 장일호, 김수용 감독이 쇼브라더스에 초빙돼 홍콩영화를 감독하기도 했다. 또한 김지미, 최무룡, 양훈, 윤일봉, 남석훈, 진봉진, 김기주, 오경아, 방수일, 방인자, 지한재, 황인식, 이해룡, 이승룡, 황정리, 당룡, 권영문, 김정란 등 수많은 배우가 그곳에서 활동하며 홍콩영화에 출연했다. 내게 개인적으로 홍콩은 영화도시로 꿈의 도시였다. 쇼브라더스의 무협영화나 골든하베스트의 성룡영화, 그리고 오우삼 감독의 홍콩 누아르영화를 봤던 세대이기에 홍콩에 대해 갖는 연모 감정은 남다르
우리는 국토가 크다고 할 수 없는데 남북으로 쪼개지고 다시 영호남으로 갈리더니 이젠 진보 보수라는 굴레로 나뉘어 싸우고 있다. 국론이 분열되어가지고 잘 될 일은 없다. 흔한 말로 뭉쳐야 살 수 있는 것이다. 임진왜란 직전이나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 격인 구한말을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그때처럼 나라의 주권 침탈을 호시탐탐 노리는 적에게 국가의 운명의 결정되어서는 안된다. 발전이란 참으로 멋진 말이고 가슴 설레기까지 하다. 그러나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온 민족이 하나가 되어 목표를 가지고 하나로 뭉쳐야 가능한 일이다. 광복 이전부터 그러했지만 좌우로 나뉘어 남과 북이 갈라졌고 한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자리잡았다. 대한민국 헌법 1조에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임을 밝히고 있다. 우리는 사상의 자유도 보장하는 민주주의 공화국이다. 이 체제는 거저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인류의 역사는 투쟁의 역사였다. 체제의 전복과 계급 간, 국가 간의 전쟁은 일상화된 인류의 역사이다. 전쟁이 남긴 폐해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잔인한 결과이다. 그러한 아픔 속에 인류의 역사는 강자만이 살아남았다. 일제강점기를 겪은 우리는 피지배민적으로서의 아픔을 숱하게 겪었다. 징용, 징병 그리
안중근 의사 순국 후인 1910년 8월 22일 일제는 한일합병조약을 강제 체결하였고 8월 29일 공포됨으로써 대한제국은 일제강점기에 들어간다. 안중근 의사는 스스로 대한국인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조선이라는 말이 통용되었다. 조선은 이성계에 의해 건립된 나라의 국호이다. 고종은 조선의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당시 일제는 대한제국을 부정하며 계속해 조선이라는 국호를 사용하며 망국의 이미지를 극대화시켰다. 한국인을 조선인이라고 지칭했는데 멸시의 어감이 확실하여 식민지인, 미개인, 노예 등 차별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래서 대한제국인들은 스스로를 조선인이 아닌 대한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안 의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유묵에도 대한국인 안중근이라고 서명하였다. 1884년에 일어난 갑신정변(甲申政變)을 계기로 1897년 8월 고종은 연호를 광무(光武)로 고쳤고, 1897년 10월 12일 황제즉위식을 올리며 조선의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선포하였다. 이로써 자주독립국으로서의 위치를 세계에 알렸다. 일제는 1904년 러일전쟁이 시작되자 서울을 점령하고 2월 23일 대한제국과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를 체결한다. 이로부터 대한제국의 주권은 침탈되고 1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이 날은 의미심장하다. 1909년 안중근 의사는 하얼빈 역에서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척살한다. 그것은 일본인들이 주장하는 테러리스트로서가 아닌 의병장으로서의 전쟁 수행이었다. 안 의사는 스스로 한국인임을 알리기 위해 “코리아 우라(대한국 만세)”를 힘차게 외치고 선선히 체포된다. 세계만방에 한국의 상황을 알리고자 의도했던 쾌거였다. 70년 후인 1979년 10월 26일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정보부장에 의해 총살 당했다. 한국의 현대사가 요동을 치던 역사의 한 장면이다. 그렇게 10월 26일은 한국인들에게 특별히 기억되는 날이 되었다. 이토는 1841년생이며 한국을 비롯하여 중국 대륙을 넘어서 아시아를 아우르는 대동아공영권을 꿈꾼 침략자였다. 그는 1905년 11월 을사늑약(乙巳勒約)을 체결함으로써 대한제국의 외교권과 내정을 장악하였다. 그리고 헤이그 특사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켰으며 일제의 통치기관인 조선통감부의 초대통감으로서 한국의 식민지화를 주도한 원흉이다. 잃어버린 조국의 주권을 되찾고자 독립운동에 뛰어든 안중근으로서 이토는 용서할 수 없는 조국과 민족의 원흉이었다. 안중근은 1879년 황해도 해주 출생이다.
1926년 단성사에서 상영한 ‘아리랑’은 한국영화사상 최초로 한국 관객들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잘 보여준 영화였다. 이 영화로 감독 데뷔한 나운규는 민족영화 감독으로서 위치를 확고히 하며 대중적 명성을 얻었다. ‘항일’이란 용어를 들어내놓고 말 못하던 그 시절, 검열을 의식해 가며 만든 민족영화 ‘아리랑’은 많은 부분이 삭제된 후 공개된다. 당시 한국 옷을 입은 한국사람만 나와도 환호하던 관객들에게 나운규는 더 큰 호응을 받을 수 있는 영화가 무엇인가를 염두에 두고 ‘아리랑’을 만들어 민족적인 감동까지 이끌어 낸 최초의 감독이다. ‘아리랑’은 민족영화로 일컬어지는데 그것은 한국인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한국인만이 느낄 수 있는 정서의 영화라고 볼 수 있다. 즉 민족영화의 전제 조건은 한국사람의 이야기를 한국사람이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민족영화라는 개념은 이렇듯 다분히 자국의 전통적 사상까지를 포함하는 범위로 좁혀진다. 지금 ‘아리랑’은 필름이 분실돼 볼 수가 없고 다만 문헌 자료를 통해 영화를 유추해볼 뿐이다. ‘아리랑’은 항일영화로 볼 수 없지만 다분히 항일성을 상징한 대립요소의 드라마 트루기를 갖고 있으며 은유적으로 표현된 영상의 표현이 일제강점기 핍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