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9년에서 1799년까지는 프랑스 혁명기였다. 이 기간에도 파리 살롱은 아주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파니 드 보아르네(Fanny de Beauharnais) 백작 부인은 그 대표적 인물이었다. 여류 작가인 그녀는 보기 드물게 살롱을 지속적이고 안정적으로 운영했다. 물론 그녀의 살롱 역시 1789년부터 1792년 사이 몇 차례 일시적인 중단과 공포 정치 시대 완전히 문을 닫기도 했지만 말이다. 보아르네 부인은 여느 살로니에르(살롱 여주인)처럼 평탄한 운명을 타고나진 않았다. 그녀는 1737년 10월 4일 시종이자 재정 총감이었던 아버지 프랑수아 아브라함 마리 무샤르와 왕의 식료품 저장실에서 일하며 루이 15세의 사저에서 요리하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불행히도 그녀가 두 살 때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어린 딸을 파리 생탕투안 거리에 있는 한 수녀원으로 보냈다. 그곳에서 어린 소녀는 귀족 규수들에게만 허락된 교육을 받았지만 그 교육은 아주 엄격했고 심지어 굴욕적이기까지 했다. 열 살이 되던 해 이 소녀는 도전적인 시 한 편을 지었다. 수녀들은 그 시를 이단으로 간주하고 압수해 불태워 버렸다. 종교적 소명에 저항했던 그녀는 열다섯 살이 되자
한 동안 모 정치전문대학원에서 강의를 했다. 이곳에 오는 학생들은 대부분 스펙을 쌓기 위해서다. 따라서 학위 논문을 쓸 능력이 아주 부족하다. 그런데도 학교는 그들에게 논문을 쓰게 하고 학위를 준다. 시스템이 이러하니 학생들은 너도나도 박사 학위를 따겠다고 야단이다. 여러 명의 박사과정 학생이 내게 논문 지도를 해달라고 간청을 했다. 안타까운 나머지 논문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써야 하는지 알려줬다. 하지만 그들은 좀처럼 이해하지 못했다. 결국 나는 주제까지 잡아주고 지도에 지도를 거듭했다. 그 중 몇은 박사학위를 따고 내게 말했다. “교수님, 평생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이 언약을 지킨 이는 거의 없다. 이 씁쓸한 경험 때문일까? 나는 요즘 은혜를 알고 의리를 지키는 사람이 무척 그립다. 은혜를 잊지 않고 갚고자 하면 더 나은 인간관계를 형성하고 사회 전체를 보다 풍요롭게 만들기 때문이다. 일본 긴자 마루칸(銀座まるかん)의 창시자 사이토 히토리(斎藤一人) 씨가 떠오른다. 그는 인생에서 의리(Giri)와 인정(Ninjyo), 그리고 은혜(On)를 소중히 여긴다. 의리는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정도이고 인정은 상대를 배려하는 따뜻함, 그리고 은혜는 삶에 있
아직도 기후변화를 음모론으로 몰고 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미국 대통령 트럼프와 같은 자본가다. 반면에 우리 대중은 기후 변화를 피부로 절실히 느낀다. 4계절이 뚜렷하던 한국은 이제 여름과 겨울 두 철로만 나뉘는 나라가 되었다. 지구촌 여기저기는 잦은 가뭄, 홍수, 산불, 태풍과 같은 천재지변으로 위협받고 있다. 카리브해 섬 역시 마찬가지다. 지난 달 말 이 섬에 시속 300km의 허리케인 멜리사가 몰아닥쳤다. 가장 높은 5등급의 이 허리케인은 자메이카를 휩쓸고 쿠바로 올라갔다. 이 열대성 폭풍이 지나간 자리는 수많은 인명 피해와 재산 피해로 황량하고 쓸쓸했다. 자메이카 지방정부 장관 데스몬드 맥켄지에 따르면, 멜리사가 지나간 후 53만 명이 넘는 자메이카 주민들이 전기 공급을 받지 못했다. 남서부에 위치한 인구 15만 명의 세인트 엘리자베스 교구는 물에 잠겼다. 자메이카의 곡창고로 불리는 이곳은 피해 규모가 대단했고 한 병원은 지붕이 무너져 내렸다. 중부 세인트 캐서린에서는 리우 코브레 강이 범람하여 강풍이 울타리와 지붕을 무너뜨렸다. 맥켄지 장관은 “멜리사의 피해는 상당하며, 자메이카 전체가 파괴적인 피해를 입었습니다.”라고 발표했다.
프랑스 계몽주의와 혁명의 불꽃을 피우는 데는 파리 문학 살롱의 역할이 큰 몫을 했다고 이미 언급한 바 있다. 신문이 아직 흔치 않던 시절, 살롱은 정보를 얻고 생각을 교환하는데 필수적인 장소였다. 이 살롱은 우아한 여성들에 의해 운영되었다. 그들은 대부분 지혜로웠지만 학식이 높거나 문장력이 탁월하진 않았다. 그러나 데피네 부인(Madame d’Épinay)의 경우는 달랐다. 그녀의 지적 능력은 탁월했고 아방가르드적 글을 써서 명성을 날렸다. 그녀는 살로니에르(살롱 여주인)였지만 고리타분한 관습을 반격하는 주제로 논쟁을 벌였고 그를 토대로 독창적이고 기교적인 글을 써서 널리 영향력을 펼쳤다. 하지만 많은 살로니에르의 운명처럼 데피네 부인 역시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았다. 그녀의 본명은 루이즈 플로랑스로 1726년 3월 11일 프랑스 북부 발랑시엔에서 후작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쉰여덟에 서른 살의 젊은 여인과 결혼한 아버지는 발랑시엔 성채의 총독이며, 생루이 왕립 기사단의 사령관직을 수행했다. 자상했던 아버지는 딸의 교육에 심혈을 기울였지만 불행히도 그녀가 아홉 살 때 원정 중 국왕을 섬기다 전사했다. 청상과부가 된 어머니는 부유한 세금 징수원의 아내가 된 언니를
추석 연휴, 계속해서 비가 내렸다. 가을 풍경을 만끽하러 해외로 떠난 사람들이야 별 문제가 없었겠지만 국내에 머문 사람들은 황금 휴가를 지리 하게 보내야 했다. 몇 년 전 의왕으로 이사 온 이래 학의천의 징검다리가 물속에 잠긴 걸 본 적이 별로 없다. 그런데 올해는 넘실거리는 물로 돌다리를 한 번도 건너지 못했다. 콸콸 흐르는 시냇물 소리를 들으며 청계천 길을 걷노라면 베네치아가 자연스레 연상되며 들뜬 기분도 든다. 그러다 문득 ‘이 비로 올 가을 농사는 무사할까? 배추밭이 누렇게 주저앉을 텐데’라는 걱정이 앞선다. 어린시절 장마로 배추밭이 누렇게 주저앉으면 이웃집 농부들이 탄식하던 걸 자주 봤다. ‘하느님 그만 비를 멈추시고 쨍쨍한 햇살을 비추소서. 가을 곡식을 잘 야물게 하소서.’ 근엄해지던 찰나 지구촌 저편에서 반가운 소식이 들려온다. 이탈리아 북서부 피에몬테 알바(Alba) 지역에서 진귀한 하이트 트러플을 수확했다는 뉴스다. 은은한 향이 특징인 이 희귀한 버섯은 마늘 향과 단맛이 깃들어 있다. 식품 중 가장 비싼 이 버섯의 가격은 가히 천문학적이다. 지난 경매에서 낙찰된 가격은 850g에 7만 5천유로(1억 2500만 원)였다. 피에몬테(알바 랑게,
나도 이제 나이가 든 모양이다. 한평생 잘 살다 가는 사람들을 보면 부러우니 말이다. 과거에는 명성이 높거나 돈을 많이 벌어 화려한 삶을 사는 사람들을 더러 선망했다. 요즘은 시류에 물들지 않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삶을 살다 간 사람들이 더 멋져 보인다. 영화배우 로버트 레드포드는 내게 그런 사람이었다. ‘위대한 개츠비’, ‘아웃 오브 아프리카’, ‘흐르는 강물처럼’ 등, 숱한 히트작으로 세계 영화 팬들을 사로잡아 부와 명성을 얻었지만, 그는 스타로서의 화려함보다 가치 있고 보람된 자신 만의 삶을 추구했다. 그런 그가 지난 16일 미국 유타주 선댄스 자택에서 영면했다. 89세로 마감한 그의 인생은 ‘칼로스 카가토스(καλὸς κἀγαθός)’ 그 자체였다. 즉, 아름다움과 지성을 겸비한 숭고한 삶이었다. 그는 배우로서 신중한 캐릭터를 연기하고, 감독으로서 관대하고 진취적이며 낭만적인 영화를 제작했다. 그의 영화 대부분은 자신의 정체성을 묻는 것이었다. 그는 또한 그 정체성을 바꾸고, 새로운 재능을 발굴하며, 유토피아를 찾고자 열망했다. 1936년 8월 18일 캘리포니아 산타모니카에서 태어난 레드포드는 청소년기 학교를 결석하기도, 술을 마시기도 해 퇴학을 당한
파리의 문학 살롱은 프랑스 혁명이 가까워질수록 급진화 되고 정치화 되어갔다. 혁명 초기, 살롱은 어떤 의미에서 클럽과 아카데미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즉. 다양한 프로젝트가 기획되고 개발되는 정치적 영향력이 발휘되는 장소였다. 오퇴유에 있는 엘베티우스 부인(Madame Helvétius)의 살롱이 가장 대표적이었다. 이 살롱은 저명한 철학자이자 작가였던 클로드 아드리앙 엘베티우스(Claude-Adrien Helvétius)가 1760년 파리 생탄 거리에 열었던 서클의 후신이라고 볼 수 있다. 철학자는 자택에 서클룸을 만들어 당대의 고귀한 지성인들과 백과사전파를 맞이했다. 이들은 엘베티우스의 집에 1년 중 넉 달 간 매주 화요일 모여 ‘철학적인 점심’을 함께 나누고 여러 이야기를 나눴다. 1771년 엘베티우스가 사망하자 그의 부인이 뒤를 이어 받았다. 아름답고 재치 있는 그녀는 오퇴유 거리 59번지에 위치한 한 저택으로 이사하고 그곳에 오퇴유 서클(Cercle d'Auteuil)을 설립했다. 남편이 사용하던 ‘서클’이란 단어를 그대로 사용했지만 안주인이 여성이었기 때문에 훗날 ‘엘베티우스 부인 살롱’으로 불려졌다. 오퇴유는 파리 외곽에 위치한 매력적인 마을이었다
‘글로벌 수무드 함대(Global Sumud Flotilla).’ 국제 해상사업을 벌이는 비정부기구(NGO)이다. 이 단체는 글로벌 팔레스타인 귀환캠페인, 자유함대연합, 마그레브 수무드 호송대, 그리고 동남아시아 누산타라 수무드 이니셔티브, 이 네 개의 연합으로 구성돼 있다. 이들은 수십 척의 소형 민간선박에 인도적 지원 물품을 싣고 팔레스타인을 향해 항해 중이다. 이스라엘의 불법 봉쇄를 뚫고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구출하기 위해서다. 함대이름 수무드(ṣumūd)는 아랍어로 ‘인내, 확고부동함’을 의미한다. 이스라엘 식민지화에 대한 팔레스타인의 저항정신을 상징한다. 인내의 표상인 수무드 함대는 과연 종착역에 도착할 수 있을까? 50여 척의 배로 구성된 글로벌 수무드 함대는 지난달 31일 카탈루냐 항구에서 일부가 출발했고, 이번 달 4일 시칠리아, 튀니지, 그리스의 항구에서 또 다른 일부가 출발했다. 여기에는 44개국 출신의 독립활동가, 구호활동가, 시민사회 지도자들 수백 명이 타고 있다. 그 중 스웨덴의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 미국 여배우 수잔 서랜던, 평화 운동가 겸 배우 리암 커닝햄과 같은 유명인과 수많은 무명의 국제 시민이 함께 타고 있다. 글로벌 수무
지구촌은 지금 사면초가다. 기후 변화, 민주주의 위기, 인구감소와 지방 쇠퇴 등등, 총체적 난국이 아닐 수 없다. 이 복합적 위기에서 벗어나려면 모두가 나서야 한다. 인간은 종종 누군가가 우리를 대신해 줄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대신해 줄 사람은 없다. 그 사실을 직시한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너무나 많고 우리의 잠재력 또한 무궁무진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오늘의 폐기물로 내일의 물건을 만들고, 이 작은 지구에서 자원을 파괴시키거나 고갈시키지 않고 작은 아이디어로 건강한 삶의 방식을 만들 수 있다. 프랑스의 콜리브리(Colibris: 벌새) 운동은 이를 잘 보여준다. ‘벌새’의 이름에서 영감을 얻은 이 운동은 생태적이고 포용적인 사회 건설을 위해 지역민의 행동을 촉구한다. 즉 모든 사람이 생태적, 사회적 전환을 위해 자신의 역할을 다하면 변화는 반드시 찾아온다는 명제다. 아메리카 원주민의 전설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어느 날 큰 산불이 났다. 모든 동물이 공포에 질려 그 참사를 속수무책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벌새는 포기하지 않고 부리에 물 한 방울을 물고와 불길에 던졌다. 그러자 아르마딜로 한 마리가 물었다. “벌새야, 벌새야! 설마 이
계몽주의 시대 파리 문학 살롱은 다양한 계층이 섞일 수 있는 장소였다. 여성도 초대되어 성별이나 사회적 지위, 그리고 재능이 다양한 사람이 모이는 진정한 향료 단지가 되었다. 또한 작가와 출판사를 연결하고 사상가와 다른 사상가를 연결하여 아이디어의 확산을 촉진하는 촉매제 역할을 하였다. 미국 역사학자 J. W. 욜튼은 “사회적 침투성 때문에 살롱은 프랑스에서 혁명 이전, 사상의 중요한 포럼이 되었다. 궁정의 후원이 사라지고 출판 산업이 성숙되기 전, 살롱은 출판사와 후원자, 독자들이 작품을 제작하고 배포할 수 있도록 저자를 찾는 데 도움을 주는 역할도 했다.”라고 평가했다. 이 살롱의 중심인물은 안주인이었으며, 그들은 종종 감각과 권위를 갖춘 중년 여성이었다. 그들의 개인적인 매력과 사회적 야망, 조직력, 지성, 재치, 고상한 취향이 살롱의 분위기를 결정했다. 물론 안주인들은 매주 또는 격주로 열리는 모임에 초대할 사람을 선택하는 책임도 있었다. 전편에서 이미 살펴보았듯이 탕생 부인, 데팡 부인, 조프랭 부인은 이를 모두 잘 수행한 안주인들 이었다. 오늘은 그들의 후배이자 경쟁자였던 쥘리 드 레피나스(Julie de Lespinasse)가 운영한 살롱에 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