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시 산책] 골목

2013.12.03 22:27:51 20면

/허만하

나는 골목길을 택했다.
골목에는 녹슨 양철 처마와 불빛 꺼진
꾸부러진 창과, 팔짱 낀 발자국 소리의 비밀을
발설하지 않는 신의가 있다.
골목 끝에 간신히 그곳만이 환한 가게가 있다.
잠드는 일을 태만이라 믿는 반질반질한
사과 알들이 베개 맡 책갈피처럼
잠들지 않고 있는 심야의 가게.
지워진 어릴 적 기억 속 풍경의 한 단면이
망각의 깊이 밑바닥에서 정다운
오렌지 빛 삼투압을 띄고 조용히 수면 위에
떠오르는 별빛 얼어붙는 겨울 하늘 골목 끝.

-- 허만하, 「시의 계절은 겨울이다」, 문예중앙 2013

 

우리 곁에서 자꾸만 사라지는 골목이 그립다. 꿈속에서도 복기되던 어린 날들의 골목이 사라지고 있는 도시가 퀭하다. 골목마다 끓어 넘치던 따뜻한 밥냄새, 양파조림 냄새가 아직도 코끝에서 환하다. 어느 날 걸었던 북창동 좁은 골목길이 기억에 남아 있다. 좁은 길이 구부러지고 구부러져 막다른 골목에 조그맣게 달려있던 가게, 가게 옆 한그루 나무가 깃발처럼 서있던 모습이 오래된 편지에 붙어있는 우표 같이 반가웠다.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걷는 발자국 소리 정겨운, 고만고만하게 마주한 집과 어깨를 나란히 한 집에서 튀어나오는 하루와 마주치기도 하는 좁은 골목은 마침내 탯줄 잘린, 우리들의 자궁처럼 아늑한 기억으로만 남았다.

 

경기신문 webmaster@kgnews.co.kr
저작권자 © 경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영덕동 974-14번지 3층 경기신문사 | 대표전화 : 031) 268-8114 | 팩스 : 031) 268-8393 | 청소년보호책임자 : 엄순엽 법인명 : ㈜경기신문사 | 제호 : 경기신문 | 등록번호 : 경기 가 00006 | 등록일 : 2002-04-06 | 발행일 : 2002-04-06 | 발행인·편집인 : 김대훈 | ISSN 2635-9790 경기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Copyright © 2020 경기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kg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