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숙의 프랑스 문학 살롱 이야기] 탕생 부인과 '영혼의 사무실'

2025.04.21 11:36:08 16면

 

18세기 프랑스는 특권층의 경박함이 특징이었던 군주제에서 모든 사람의 권리를 존중하는 세상으로 나아가는 길목이었다. 이 새로운 물결은 더 큰 평등을 추구하는 철학자, 작가, 예술가들의 자극에 힘입어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결국 이는 혁명의 기폭제가 되었고 프랑스에 민주주의를 앞당겼다. 

 

문학 살롱은 이러한 사상을 꽃피우는 중요한 장소였다. 파리의 품격 있는 여성들은 훌륭한 작가, 예술가, 학자들을 자신의 살롱에 초대해 작품에 대해 토론하고 비평할 기회를 제공했다. 이는 프랑스는 물론 전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지적 활력소인 '계몽주의’를 불러왔다.

 

파리의 살롱은 빠르게 지방과 해외에서 모방되었고 전체 생활 예술, 심지어 연설 예술이 승리한 대화의 장소로 자리 잡았다. 그 동안 국가의 중심이자 의견의 원천이던 베르사유 궁정은 일몰을 맞았고 공격의 대상으로 기조가 변해갔다.

 

이 시기의 살롱은 랑부이예 부인의 '파란 방'처럼 문학적 게임이나 심리적 게임의 장소가 아니라 정보의 교환, 사상의 비교, 비평, 철학적 프로젝트 개발에 보다 중점을 두었다. 또 이러한 교류의 장은 문학적 명성을 쌓거나 깨트리고 작가들에게 추종자와 인맥, 때로는 물질적 지원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살롱 운영자는 교육을 받은 여성들이었다. 이 시기 여성은 대부분 교육을 받지 못하였다. 17세기 말, 프랑스 여성 100명 중 14명이 서명을 할 줄 알았다. 18세기 말 그 비율은 2배로 증가해 27명이었다. 살롱 운영자인 문화계 여성들은 어찌 보면 선택된 사람들이었다. 

 

 

탕생 부인(Madame de Tencin)은 그 중 한 명이었다. 섭정 시대와 루이 15세 시대를 풍미한 이 여인은 젊은 시절 중매쟁이이자 계략가로 격동적인 삶을 살았다. 1682년 4월 그르노블에서 태어난 그녀는 태어날 때부터 그녀의 미래가 정해져 있었다. 비교적 최근에 귀족 신분이 된 그녀의 아버지는 가문의 이익을 공고히 하고 영토를 넓히려는 속셈으로 8세의 딸에게 강제적으로 수녀복을 입혔다. 1711년 말 그녀는 20여 년 간 입었던 적성에 맞지 않는 수녀복을 과감히 벗어던지고 후견인인 비바레 부인과 함께 파리로 상경했다. 

 

수녀원에서 잃어버린 시간이 억울해서였을까? 그녀는 기원전 3세기 아테네의 창녀로 철학 학원을 운영하며 글을 썼던 레온티온이나 폼페이의 정부였던 로마의 창녀 플로라, 예술가와 철학자들로 자신을 둘러싼 밀레투스의 미인 아스파시아처럼 유명인들과 어울리기를 원했다. 

 

섭정의 정부가 된 그녀는 권력의 서클을 자주 드나들었고 1717년에는 당대 가장 유명한 살롱을 열었다. 이 살롱은 처음에는 정치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고, 정치인, 금융가, 큰 은행의 투기꾼들을 환영했다. 또 루이 15세의 정부를 찾는 일을 담당하며 훗날 퐁파두르 부인이 국왕의 정부가 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기도 하였다. 탕생 부인과 앙숙이었던 볼테르는 그녀의 살롱을 '동물원'이라 부르며 비아냥댔다. 

 

 

그러나 1733년부터 탕생 부인은 정치적 음모와 사랑의 즐거움에서 벗어나 그녀의 살롱을 문학과 철학의 중심지로 탈바꿈 시켜 나갔다. 그리고 익명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퐁트넬, 마리보, 프레보스트 신부, 마르몽텔, 몽테스키외 등 당대 최고의 작가들이 차츰 그녀의 단골손님이 되었다. 그녀는 볼테르를 싫어했기 때문에 볼테르는 받지 않았다. 

 

파리 생토노레 거리의 막다른 골목에 위치한 탕생 부인의 살롱은 처음에 7인의 현자라 불리는 재치 있는 사람 일곱 명만을 초대하였다. 이들은 매주 화요일 교황 베네딕토 14세의 초상화 아래 옹기종기 모여 식사를 하고 계몽주의 정신으로 정치와 재정에 대한 토론을 벌였다. 사람들은 이곳을 '영혼의 사무실(bureau d'esprit)'라 부르기 시작했고 파리에서 가장 인기 있는 살롱 중 하나가 되었다. 점차 이 살롱은 다른 사람들에게 개방되었고 저명한 외국인들이 파리 출장 때 꼭 들러 가는 명소가 되었다.

 

재산을 축적한 탕생 부인은 자신이 감사하는 사람들에게 무척 관대하였다. 그녀는 가난한 작가 마리보(Marivaux)를 끊임없이 구제하였고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의 초판 발행을 위해 자금을 지원하였다. 그녀는 '법의 정신'이 출판되자 친구들에게 사본을 배포하기 위해 전체 판을 구입하였다. 철학자는 이 여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내 책의 작은 어머니입니다" 그녀는 '법의 정신'이 검열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인맥을 활용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영혼의 사무실'에서 당시의 국왕 루이 15세의 정치와 태만을 비판하였고, 군주제의 몰락을 예견하였다. 또한 선거, 결혼식, 낭독회 등을 개최하였고 아카데미의 한 자리 또는 두 저명한 집안의 연합에 대한 결정을 내리기도 하였다. 탕생 부인은 다수의 성공적인 소설을 발표하였다. 그녀는 신선하고 표현력이 풍부한 언어와 활기찬 눈빛으로 보는 이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마리보는 이러한 그녀를 '가장 민첩한 영혼'이라고 묘사하였다.

 

이 살롱에 출입을 허락받는 것은 지적인 우아함을 인정받는 증명서를 받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18세기 전반기에 활동했던 그녀의 살롱은 이후에도 그 명성을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 비결은 그녀의 성격과 네트워크 덕분이기도 하였지만, 무엇보다 그녀가 손님을 대하는 친절함과 단순함 덕분이었다.

 

그러나 탕생 부인은 마지막 지난 2년 동안 의자에 앉아 움직이지 못한 채 지내다가 6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92세의 노인장이었던 퐁트넬은 그녀의 사망 소식을 듣고 "매주 화요일 나는 어디 가서 저녁을 먹는담?"하고 중얼거리더니 "어쩔 수 없네! 매주 화요일 조프랭 부인의 집으로 가야겠군!"이라고 자답하였다. 탕생 부인의 시대가 저물고 조프랭 부인의 시대가 동트는 찰나였다. 

 

[ 글=최인숙 논설주간 ]

최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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