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문학 살롱은 프랑스 혁명이 가까워질수록 급진화 되고 정치화 되어갔다. 혁명 초기, 살롱은 어떤 의미에서 클럽과 아카데미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즉. 다양한 프로젝트가 기획되고 개발되는 정치적 영향력이 발휘되는 장소였다. 오퇴유에 있는 엘베티우스 부인(Madame Helvétius)의 살롱이 가장 대표적이었다.

이 살롱은 저명한 철학자이자 작가였던 클로드 아드리앙 엘베티우스(Claude-Adrien Helvétius)가 1760년 파리 생탄 거리에 열었던 서클의 후신이라고 볼 수 있다. 철학자는 자택에 서클룸을 만들어 당대의 고귀한 지성인들과 백과사전파를 맞이했다. 이들은 엘베티우스의 집에 1년 중 넉 달 간 매주 화요일 모여 ‘철학적인 점심’을 함께 나누고 여러 이야기를 나눴다.
1771년 엘베티우스가 사망하자 그의 부인이 뒤를 이어 받았다. 아름답고 재치 있는 그녀는 오퇴유 거리 59번지에 위치한 한 저택으로 이사하고 그곳에 오퇴유 서클(Cercle d'Auteuil)을 설립했다. 남편이 사용하던 ‘서클’이란 단어를 그대로 사용했지만 안주인이 여성이었기 때문에 훗날 ‘엘베티우스 부인 살롱’으로 불려졌다. 오퇴유는 파리 외곽에 위치한 매력적인 마을이었다.
유명한 남편 덕에 엘베티우스 부인은 이미 전 세계적으로 알려져 있었다. 1722년 낭시에서 귀족의 딸로 태어난 그녀의 본명은 카트린 드 리니빌(Catherine de Ligniville). 그녀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가문이며 로렌 공작의 시종장의 딸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양반집 딸들이 흔히 겪는 조신한 운명에서 벗어나고자 결혼을 택했고 목적을 달성했다.
남편 엘베티우스는 본래 세금 징수원이었는데 이를 통해 그는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 그러나 그는 이 재산을 자선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했고 볼테르, 뷔퐁, 디드로, 몽테스키외와 친분을 나누며 대단한 철학자로 변신해 갔다. 1750년, 그는 세금 징수원을 자발적으로 사임하고 이듬해 카트린과 결혼했던 것이다.
훌륭한 남편을 만났지만 엘베티우스 부인은 단순히 자녀와 행복한 결혼생활을 꾸리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반 문맹에 교육 수준도 낮고 문학 작품도 쓰지 못한 그녀였지만 살롱을 통해 당대 유명 작가들과 교류하며, 특히 자신이 주최한 살롱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그중 일부는 미국 독립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다른 일부는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쿠데타를 지지했다.
그녀의 살롱은 뜨거운 이슈를 토론하는 토론장이 되었다. 이곳에서는 자유와 관용을 중시했고 차별 없는 이상적인 도시 건설을 구가했다. 작은 혁명이 진행되고 있었던 셈이다. 이 살롱은 콩도르세와 브리소(Jacques Pierre Brissot)를 중심으로 한 지롱드파에 대체로 동조했고 혁명가들의 초기 그룹 형성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는 엘베티우스 부인의 살롱을 연구한 앙투안 기요아의 증언에서 알 수 있다. “오퇴유의 모든 단골손님이 조금씩 혁명 운동에 참여했습니다. 당시 그들은 세 곳에서 모임을 가졌어요. 아침에는 미라보의 모임, 낮에는 의회, 저녁에는 엘베티우스 부인의 모임이었지요”

엘베티우스 부인의 살롱은 안주인이 아이들, 고양이, 새들로 가득 찬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더욱 인기가 많았다. 이곳을 자주 찾던 유명 인사들은 작은 모피 안감을 댄 망토를 두른 앙고라 고양이 18마리를 보고 즐거워했다. 그들은 엘베티우스 부인을 ‘미네트(새끼 고양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 살롱은 재치와 우아한 대화로 물들었다. 작가, 화가, 음악가, 철학자는 다른 손님을 즐겁게 할 뿐만 아니라 각자의 분야에서 아방가르드 트렌드를 보여줌으로써 안주인의 호감을 샀다. 수학자 블레즈 파스칼과 같은 젊은 천재들의 존재가 이를 증명하듯, 나이는 이곳에서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보나파르트뿐만 아니라 미국 정치가 벤저민 프랭클린도 이곳에서 크게 환영받았다. 프랭클린은 오퇴유 마을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푸는 엘베티우스 부인에게 ‘노트르담 오퇴유(Notre-Dame d’Auteuil: 오퇴유의 성모마리아)’라는 별명을 달아줬다. 그리고 그는 부인에게 흠뻑 빠져 청혼했지만 거절당하고 말았다. 60세에 미국에 건너가 새 삶을 시작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어느 날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그녀의 정원이 너무 작아서 놀랐을 때, 엘베티우스 부인은 이렇게 말했다. “장군님, 3에이커 땅에 얼마나 많은 행복이 담겨 있는지 아세요? 이걸 아셨다면 세상을 정복하려는 생각은 덜 했을 거예요.”

살롱을 적시는 음악은 보통 경박하고 오케스트라 연주회 수준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프란츠 리스트를 비롯한 몇몇 저명한 음악가들이 순회공연을 함으로써 분위기가 바뀌었다. 특히 꽃미남 리스트는 이곳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그에 대한 여성들의 숭배는 ‘아이돌’을 훨씬 능가했다. 과학자들 역시 환영을 받았는데, 그들은 손수 도구를 가져와 재미있는 시연을 보여 주었다. 네덜란드 천문학자 크리스티안 하위헌스도 자주 왔는데, 그 역시 다른 많은 지식인처럼 살롱을 통해 인맥을 넓히고 경력을 쌓았다.
문필가들은 종종 미발표 작품의 발췌문을 읽고 대중의 반응을 살펴 필요한 경우 수정 작업에 들어갔다. 어떤 작가들은 후원회의 부조리를 한탄했고, 어떤 작가들은 귀족 사회의 지적 능력을 노골적으로 비판했다. 저녁 식사는 파리의 대부분 살롱과 비슷했다. 처음에는 침묵이 흐르고, 그다음에는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이 난무했고, 그다음에는 종종 재미없는 농담, 거짓 소문, 거짓 논쟁, 약간의 정치 이야기, 그리고 온갖 중상모략 역시 오고 갔다.
1790년 4월 혁명을 즈음하여 엘베티우스 부인의 살롱은 지롱드파 카바니스(Pierre Jean Georges Cabanis)와 백과사전파 모렐레 신부 간의 분쟁의 소용돌이가 되었다. 모렐레 신부는 튈 지역의 귀족 지주들이 인근 브리브 지역의 새 시의회와 분쟁을 벌이자 전자의 편을 들었다. 튈 지역 의원들의 청원서는 브리브 출신 카바니스의 반대에 부딪혔다. 카바니스에게 저지당한 모렐레는 결국 엘베티우스 부인의 살롱을 떠났고 그로 인해 서서히 막이 내렸다.
엘베티우스 부인은 “이로써 내가 노년을 위해 정성과 근면, 그리고 헌신으로 갈고 닦은 피난처가 닫혔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녀는 1800년 7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요청대로 그녀는 오퇴유의 자택 정원에 묻혔지만 1817년 집이 매각되면서 오퇴유 묘지로 옮겨졌다.
[ 경기신문 = 우경오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