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처음이야?” “…네.” “그런 줄 몰랐어. 윤희 씨가 워낙 조숙해서…. 미안해서 어쩌지?” 최현규의 미안하다는 말이 마음에 걸렸다. 그가 문득 낯설게 느껴졌다. 왜 미안하다고 했을까. … 기간이 짧았지만, 공연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막을 올린 일주일간 윤희는 세상에 태어나서 가장 분주하고도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신문에도 커다란 사진이 났다. ‘혜성 같이 나타난 연극계의 기대주…’ 김도숙 기자가 쓴 주간 스타 스토리 기사 말고도 여러 신문 문화면에 비슷한 타이틀이 걸렸다. 두 사람이 보여준 진짜 입맞춤 연기에 관해서도 호평 일색이었다. ‘연극을 위해 혼신을 불사른 정열…’이라는 칭찬도 있었다. 김도숙 기자는 연극의 제목을 ‘윤심덕 in 나폴리’로 정하고도 윤심덕과 김우진이 이탈리아로 도피한 이야기를 마지막 장면에서 독백처럼 살짝 노출한 것도 절묘한 연출이었다고 평가했다. 공연이 끝난 날 두물머리 수련장에서 쫑파티가 열렸다. 백두 단장은 오지 않았다. 이민지도 참석하지 않았다. 즐거워야 할 회식이었으나 무거운 분위기에서 시작됐다. 그래서였던지, 술판이 벌어지자 배우들은 많은 술을 마셨다. 윤희도 제법 여러 잔의 소주를 마셨다. 연극 ‘윤심덕 in 나폴리
…윤희는 기습적으로 자신의 입술을 최현규의 입술에 갖다 댔다. 그가 깜짝 놀라 몸을 옴츠렸다. 윤희가 입술을 잠시 떼고 짧게 “진짜로 해요!”라고 말했다. 그제야 최현규도 끌어안은 손에… “아아, 이제 나는 어찌해야 한다는 말인가. 눈을 떠도 어른거리고, 눈을 감으면 더 잘 보이는 그녀의 모습. 그녀를 만나지 않고는 더 살아갈 수가 없겠구나. 어쩌다가 내가 이렇게 되었나.” 김우진 역을 맡은 최현규의 매력은 대단했다. 굵고도 부드러운 목소리가 속절없이 빠져들게 했다. 그 음성에는 강한 중독성을 부르는 마력 같은 것이 있었다. 상대방이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로 적당히 배려하고, 때로는 전혀 감정이 상하지 않게 허점을 일러주는 자상함도 갖추고 있었다. 연출을 맡은 한상석은 연극 공연 계획을 대폭 축소했다. 공연일도 단 일주일간으로 줄였다. 이민지가 만년의 윤심덕 역을 맡아 나폴리를 배경으로 펼치려던 후반부는 삭제됐다. 윤희와 최현규 두 사람이 끌고 가는 러브스토리 무대로 바뀌었다. 동경에서 레코드 취입을 마친 윤심덕이 김우진을 만나 치밀한 계획을 짜서 현해탄에서 동반자살한 것으로 거짓을 꾸며가는 과정을 섬세하게 묘사하는 스토리가 중심이 됐다. 관부연락선 갑판장 역
*총론과 본론이 다른 따로국밥 역사학 흔히 가야를 수수께끼의 왕국이라고 말한다. 경상남북도 일대에 가야관련 유적, 유물은 숱하게 널려 있는데, 가야사에 대한 체계적 기록은 부족한 것이 가장 큰 이유다. 『삼국유사』 「가락국기」가 가장 자세한 기록이지만 시조 김수로왕과 허황후에 대한 내용에 집중되어 있고, 그 이후의 임금들에 대해서는 아주 소략하다. 『삼국사기』는 「김유신 열전」에서 가야 시조와 건국시기는 적고 있지만 따로 「가야본기」를 편찬하지 않았다. 『삼국사기』가 부록 형태로라도 가야나 부여 같은 나라들에 대해서 서술했으면 연구에 큰 도움이 될 수 있었을 텐데 아쉽기 그지없다. 그렇기 때문에 가야와 관련된 단편적 기록이나마 꼼꼼히 살펴보면서 그 전체상을 그릴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함은 물론이다. 가야에 대해서 한국의 대학 강단을 차지하고 있는 강단사학자들의 견해를 『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가야’ 관련 기술로 살펴보자. 먼저 가야에 대한 ‘정의’편에서 “서기전 1세기부터 서기 6세기 중엽까지 주로 경상남도 대부분과 경상북도 일부 지역을 영유하고 있던 고대 국가”라고 서술하고 있다. 이 ‘정의’는 『삼국유사』 및 『삼국사기』의 가야 관련 사료를 잘 정리한 문장
…윤희에게 달려들어 마구 앞섶을 풀어헤쳤다. 소리를 치며 있는 힘껏 떠밀었다. 뒤로 나자빠졌다가 일어나는 남자의 얼굴이 갑자기 백두 단장으로 바뀌었다. 기겁을 하고 소리치다가 잠이 깼다.… “나 좀 서울 갔다가 올 테니까, 연습 잘 하고 있어.” 외출복으로 갈아입은 이민지가 윤희에게 말하고는 서둘러 구두를 신었다. 표정이 심각했다. 무슨 일이 있는지 왜 그러는지 묻고 싶었지만, 윤희는 차마 입을 떼지 못하고 엉거주춤 대문 밖까지 따라나서서 이민지를 배웅했다. 그녀는 대문 앞 공터에 세워 둔 승용차에 올라 시동을 걸고 빠른 속도로 골목을 빠져나갔다. 김미리가 사고를 친 모양이야…김도숙 기자와 대화를 나누고 들어온 한상석이 이민지에게 던진 말이 뇌리에 감돌았다. 한상석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배우들을 리드하며 오후 연습을 시켰다. 그러나 그의 표정에도 어두운 그림자가 사라지지 않았다. * “국내 유명 극단 카프카 소속의 한 여배우가 소속 극단 단장으로부터 수년 동안 성폭행을 당했다며 자살을 암시하는 메시지를 남기고 잠적해 경찰이 긴급 수배에 나섰습니다. …” 식탁에 모여앉아 저녁밥을 먹으며 텔레비전 뉴스를 보던 단원들이 모두 숟가락을 떨어뜨렸다. 김미리가 쳤다는
◇ 일제 패전 후에도 살아남은 황국사관 일제 식민사학은 1945년 8월 15일 일왕 히로히도(裕仁)의 무조건 항복선언과 함께 관 속에 들어갈 운명이었다. 1945년 4월 30일 히틀러의 자살과 함께 나치 역사관이 종언을 고한 것과 같은 운명이어야 했다. 그러나 나치 붕괴 이후 나치 역사관은 유럽에서 종언을 고했으나 일제 황국사관(皇國史觀)은 일제 패망 후에도 왕성한 생명력을 과시하고 있다. 1939년 9월 독일·일본·이탈리아가 파시스트 삼국동맹을 맺은 데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일제 식민사관과 나치 역사관은 쌍둥이였다. 나치의 인종 차별주의 정책은 게르만 민족의 우월성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나치는 게르만족이 속한 아리안인은 외형으로 봐도 우수한 인종이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게르만족뿐만 아니라 켈트족, 앵글로 색슨족, 슬라브족 할 것 없이 유럽인들은 대부분 아리안족 계통이고, 중동의 이란도 아리안족 계통인 것처럼 선천적 인종 우월주의는 허구의 이론에 불과하다. 그러나 나치가 인종 우월주의 이론에 기대어 유태인 말살정책을 자행한 것처럼 일제도 극심한 민족차별정책을 실시했다. 일제는 일본인들은 1등국민으로 높이고, 조선인과 유구인(琉球人:오키나와인)은 2등국민,…
…김도숙을 보내고 돌아온 한상석의 얼굴이 사색이 돼 있었다. 이민지가 놀라서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뭔 일 있어요?” “김미리가 사고를 친 모양이야.” “김미리가요?”… “막은 넉 달 뒤에 오른다. 빡빡한 일정이지만 최선을 다해주길 바란다.” 백두 단장의 말은 짧고 단호했다. 사무실에 모여앉을 때부터 단원들의 분위기는 탱탱한 긴장이 넘쳤다. 이민지는 다른 일정이 있다면서 나오지 않았다. 중년 윤심덕 역 주연엔 이민지, 예비주연은 이성희가 맡도록 발표됐고, 젊은 윤심덕 주연에는 김윤희, 예비주연으로 송현아와 김미리가 차례로 지명됐다. 김우진 역에는 윤희의 예상대로 최현규가 주연, 박정욱이 예비주연으로 지명됐다. ‘화가와 여간호사’에서 화가 역을 맡았던 한상석은 조연출을 맡게 된다고 발표됐다. 그밖에 10여 명의 단역 배역이 정해졌다. 배역 발표를 마친 백두 단장은 휭하니 사무실을 나갔고, 사무실 분위기는 술렁대기 시작했다. 윤희는 극단에 들어온 지 며칠도 되지 않아 주연으로 발탁된 자신에게 쏟아지는 질시를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명단을 발표할 적에 심하게 일그러지는 김미리의 표정을 보았다. 솟아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듯한 그녀는 백두 단장이 나가자
◇ 내물왕이 최초의 신라왕? 한국 강단사학의 이른바 태두(?) 이병도 박사가 ‘매우 존경할만한 인격자’라고 칭송한 도쿄대 교수 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1878~1952)도 물론 ‘『삼국사기』 불신론’을 주창했다. 이병도는 이케우치의 ‘연구방법이 실증적이고 비판적인 만큼 날카로운 점이 많았다’고 회고했는데, 실제로 그런지 살펴보자. 같은 식민사학자지만 마에마 교사쿠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는 믿을만하다고 평가했는데 이케우치 히로시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도 불신했다는 점이 다르다. 이케우치는 물론 「신라본기」·「백제본기」를 막론하고 『삼국사기』는 믿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서는 “진성여왕까지의 28대 제왕 중 역사상의 인물로 인정되는 최초의 왕은 내물왕이고 그 이전의 제왕은 모두 공상(空想)의 인물”이라고 주장했다. 현재 한국의 국정·검인정을 막론하고 모든 『국사교과서』가 신라를 내물왕이 건국한 것처럼 써 놓고 있는 것은 이케우치가 내물왕이 최초의 왕이라고 우긴 것을 이병도가 받아들여 이른바 정설로 삼은 결과이다. 이케우치는 또한 신라에서 박·석·김(朴石金) 세 성씨가 교차로 왕이 된 것은 “중국의 하·은·주의 왕위 계승관
…윤희는 단원들이 다 모인 소극장 무대 위에서 ‘사의 찬미’를 불렀다. 희로애락을 과하게 보여주는 것은 빵점짜리 배우야. 관객들은 울지 않는데 배우가 먼저 우는 것은 어디까지나… “우리가 별로 대화를 나눈 적이 없구나, 그치?” 파가니니 홀 탈의실에서 옷을 챙겨입은 뒤 이민지는 윤희를 호텔 2층에 있는 모모야마라는 일식당으로 데리고 갔다. 기모노 차림의 여종업원에게 회 초밥 정식으로 주문을 마친 이민지가 생각지도 못했던 누드모델 여파로 정신이 아직 얼떨떨한 윤희를 향해 물었다. “네.” 윤희는 이민지가 어떤 사람인지 더욱 궁금했다. “나는 네가 정말 신기해. 처음 보는 순간 너의 내면에 엄청난 잠재력이 있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는데, 틀리지 않았어. 오늘 누드모델 연기 아주 좋았어. 첫 경험이었는데, 그렇게 해낼 수 있다는 것은 네가 타고난 연기자라는 증거야.” “칭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디에서 살다가 왔니? 부모님은 뭐 하시는 분들이시니?”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윤희는 잠시 생각을 다듬었다. 그리고 말했다. “동천시에서 왔어요. 부모님들은 지난해 교통사고로 두 분 다 돌아가셨고요. 고등학교 연극반에서 활동했어요. 세상에 혼자 남게 돼서, 연극배우가 되
◇ 일본 사료에 안 나오니 가짜라는 주장 일제강점기 한국사를 연구했다는 일본인 학자들의 논문들을 보면 그들의 정신상태를 의심하게 된다. 아무런 근거도 없는 내용을 그렇게 많은 학자들이 천편일률적으로 주장할 수 있는지 신기할 정도다. 하긴 아유카이 후사노신(鮎貝房之進:1864~1946)처럼 칼 들고 명성왕후 시해에 가담했던 낭인깡패가 붓을 잡은 후 한국사 연구의 대가로 대접받았으니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일본인 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삼국사기 불신론’을 주창했는데, 그 중 마에마 교사쿠(前間恭作:1868~1942)라는 인물이 있다. 마에마 교사쿠는 조선총독부의 통역관이었는데, 1925년 ‘신라왕의 세차(世次)와 그 이름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썼다. 그는 이 논문에서 “이마니시 류(今西龍)가 『삼국사기』 소지왕(炤知王) 이전의 기사를 믿을 수 없다고 한 것은 확고부동의 단안(斷案)으로 믿는다”라고 말했다. 이마니시 류가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21대 소지왕(재위 479~500) 이전은 믿을 수 없다고 주장한 것을 따른다는 것이다. 소지왕의 재위연대는 서기 479년부터 500년까지이니 이를 따르면 『삼국사기』 「신라본기」는 500년 이상 가짜가 된다. 그런데…
2008.12 - 다시는 있어서는 안 될 사건 발생 08년 12월 오전 8시경 안산시 단원구에서 등교 중이던 초등학교 3학년(만 8세) 여아를 납치 후 교회 건물 화장실에서 수차례 강간·폭행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피해 아동은 대장과 항문, 생식기의 80%가 영구적으로 훼손되는 등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야 하는 심각한 신체적 피해를 입었다. 범죄의 잔혹성과 인면수심한 가해자 조두순의 행태가 뉴스와 인터넷을 통해 전해지면서 엄벌을 촉구하는 여론이 크게 확산됐다. 2009.03 - 겨우 '징역 12년'…솜방망이 처벌 논란 검찰은 09년 1월 강간상해죄로 기소된 조두순에게 무기징역을 구형했지만 법원은 1심 판결에서 음주로 인한 심신미약이 참작돼 징역 12년을 선고했다. 조두순은 "형량이 너무 무겁다"며 항소 및 상고 신청을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해 9월 대법원은 1심 판결을 그대로 수용하면서 징역 12년, 전자발찌 7년, 신상공개 5년형을 확정하고 조두순은 경북북부 제2교도소(당시 청송교도소)에 수감됐다. 법원의 솜방망이 처벌과 조두순의 항소 사실이 알려지면서 조두순에게 ‘법정 최고형’을 요구하는 청원 운동이 일어나는 등 국민적 분노가 극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