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승의 날 내력
6.25 내전이 끝난 직후, 온 나라가 가난하던 시절. 충남 강경여고에서 있었던 일이다. 등록금을 내지 못하는 학생들의 그 짙은 슬픔을 풀어주고, 기숙사에서 앓고 있는 학생에게 손수 죽을 끓여 먹이고 약을 달여준 교사가 있었다. 훗날 그 분이 연로하여 몸이 좋지 않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 위로와 존경의 마음을 전했다.1958년이었다. 그 3년 뒤, 윤석란양이 병석에 누워 있는 은사를 돌보다가 퇴직교사들을 모셨다. 이 뭉클한 사연은 순식간에 충남 전체에 펴졌다. 충남 RCY는 ‘은사의 날’ 행사를 벌이게 되었다. 그 물결은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RCY 전국 중앙회는 1965년 겨레의 큰 스승 세종대왕의 생일(5월 15일)을 스승의 날로 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것이 스승의 날과 관련된 감동적인 역사다. 17살 소녀는 수녀가 되어 이웃사랑과 봉사를 소명으로 받아들이고 조용하게 지내고 있다고 한다. 이제 80살이다. 만인이 공교육 붕괴에 대해 절망하는 이 시대에 어느 날 모교를 방문한 수녀가 말했다. “학교는 여전히 아름답고 훌륭한 선생님들이 많습니다. 그것은 샘의 물이 마르지 않는다면 언젠가 마른 흙도 생명을 얻고 되살아나게 되는 이치입니다.“

어떤 사제지간
다석-남강-함석헌
100년 전, 3.1독립만세 운동을 주도했던 평양고보 학생 함석헌(1901~1989)은 학교가 형식적인 반성문을 쓰면 징계하지 않겠다는 제안을 거절하고 퇴학을 당했다. “목이 타 마르도록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고 팔을 비트는 순사를 뿌리치고 총에 칼을 꽂아 가지고 행진해오는 일본군인과 마주 행진을 해대들다가 발길로 채여 태연히 짓밟히고 일어나고...” 그는 3.1의 감격을 이렇게 표했다. 그 백두산 호랑이의 기백을 가진 청년 앞에서 그 이북 최고의 명문학교 졸업(장)은 시시한 사안이었다.
함석헌은 2년 뒤, 평북 정주의 민족사학 오산학교로 편입했다. 교장은 다석 유영모 선생(1890~1981)이었다. 스승과 제자는 11살 차이였지만 교학상장(敎學相長)의 관계였다. “내 뒤에 오는 자가 나보다 앞선 자라. 내 뒤에 오는 이가 할 것이다", “내가 오산에 온 것은 함군 자넬 만나러 온 것"이라며 운명적 인연을 고백했다. 다석은 당시 조선 3대 천재로 알려진 인물이었다.
함석헌이 편입해왔을 때 오산학교 설립자 남강 이승훈 선생(1864-1930)이 감옥에 있었다. 3.1 독립선언자 33인 가운데 가장 비중 높은 인물이었다. 교장은 면회를 가서 특별한 제자에 관해서 전했다. 남강은 출옥 후 7개월 동안 그 제자를 지켜봤다. 그리고 일본 유학을 확정하고, 둘째 아들을 미리 동경에 보내어 제자가 학업에 전념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주었다. 그리고 6개월을 함께 지내며 안정되게 정착하도록 도움을 주고 돌아왔다. 조선의 민중들은 세 끼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다석과 남강은 훗날 세계가 인정하는 사상가, 평화와 인권운동가, 전설의 언론인으로 우뚝서고, 1979년과 1985년 노벨평화상 유력후보로 오른 제자를 우리 민족에게 선물로 주었다.
김장하-문형배
김장하 선생과 문형배 헌법재판관 사이도 참으로 특별한 사제지간이다.둘 사이에 놓인 사연과 내력들을 듣고 읽을 때마다 문판사처럼 눈물이 난다. 김장하 선생의 그 크고 깊고 올곧은, 그리고 부드러운 삶을 접하면서 남강 이승훈을 떠올리게 된다. 문형배 판사의 맑고 옳은 말과 글, 선한 표정을 만날 때마다 기질은 다르지만 본질은 차이가 없는 함석헌을 생각하게 된다.
죽을 끓여 먹이고, 약을 달여준 교사와 그 은혜를 국가가 기리도록 만든 윤석란, 다석 유영모 남강 이승훈 김장하 선생 같은 큰 스승들과 함석헌 문형배 같은 특별한 제자들이 이 망할 놈의 신자유주의 세상 어느 구석에선가 소멸하지 않고 굳세게 살아있기를 하늘에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