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숙의 프랑스 문학 살롱 이야기] 혁명기에도 건재한 보아르네 부인의 살롱

2025.11.17 15:05:50 16면

 

1789년에서 1799년까지는 프랑스 혁명기였다. 이 기간에도 파리 살롱은 아주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파니 드 보아르네(Fanny de Beauharnais) 백작 부인은 그 대표적 인물이었다. 여류 작가인 그녀는 보기 드물게 살롱을 지속적이고 안정적으로 운영했다. 물론 그녀의 살롱 역시 1789년부터 1792년 사이 몇 차례 일시적인 중단과 공포 정치 시대 완전히 문을 닫기도 했지만 말이다. 

 

보아르네 부인은 여느 살로니에르(살롱 여주인)처럼 평탄한 운명을 타고나진 않았다. 그녀는 1737년 10월 4일 시종이자 재정 총감이었던 아버지 프랑수아 아브라함 마리 무샤르와 왕의 식료품 저장실에서 일하며 루이 15세의 사저에서 요리하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불행히도 그녀가 두 살 때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어린 딸을 파리 생탕투안 거리에 있는 한 수녀원으로 보냈다. 그곳에서 어린 소녀는 귀족 규수들에게만 허락된 교육을 받았지만 그 교육은 아주 엄격했고 심지어 굴욕적이기까지 했다. 열 살이 되던 해 이 소녀는 도전적인 시 한 편을 지었다. 수녀들은 그 시를 이단으로 간주하고 압수해 불태워 버렸다.

 

종교적 소명에 저항했던 그녀는 열다섯 살이 되자 수녀원을 나와 스무 살 연상인 전쟁 영웅 클로드 드 보아르네(Claude de Beauharnais) 백작과 결혼했다. 꽃다운 신부는 세 자녀를 낳았지만 남편의 사랑을 받지는 못했다. 문학적 재능이 뛰어난 보아르네 부인은 저작 활동을 하면서 살롱을 열어 열정을 불태웠고 당대 지식인 엘리트와 교류했다. 지적 수준이 높던 그녀는 살롱을 문학과 정치적 토론의 장으로 만들어 남녀 불평등과 그로 인한 편견 등 시대를 앞서가는 주제를 다루었다. 그녀는 결혼을 여성에게 불행의 원천으로 자주 비판했고, 작품의 등장인물들을 통해 남성과 여성 사이의 평온하고 유익한 관계 구축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잘 보여줬다. 

 

한편, 남편 보아르네 백작은 자신의 영지에 틀어박혀 은둔 생활을 즐겼다. 추구하는 삶이 다른 이들은 결국 결혼 9년째인 1762년 결별하기에 이르렀다. 보아르네 부인은 남편과 원만하게 타협한 후 연간 6,000리브르의 연금을 받기로 하고 별거에 들어갔다. 파리 몽마르트르 가에 있는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간 그녀는 문학과 시에 대한 자신의 재능을 맘껏 살려 공개적인 작품 활동을 펼쳤고, 여류 작가들의 롤모델이 되었다. 그녀는 여러 문인들을 접대하며 첫 파리 살롱을 오픈했다.

 

1777년 보아르네 부인은 ‘여성지’의 새 편집장인 클로드-조제프 도라(Claude-Joseph Dorat)를 만나 연인이 되었고 잡지의 한 코너를 맡았다. 도라는 매주 금요일 밤 열리는 그녀의 살롱을 적극적으로 후원해 주었고 콜라르도, 페제 퀴비에르 등 굵직한 문인들이 그녀의 살롱을 찾아왔다. 이들은 전통적으로 ‘도라 학파’라는 이름으로 묶여 특별한 문인 공동체를 이루었다. 보아르네 부인은 이 공동체를 활성화하는 촉매제 역할을 했다. 그녀는 세속적 문화에 대한 지식을 활용해 손님들의 문학적 야망을 지원했고 영향력 있는 후원자들의 네트워크를 동원하기 위해 노력했다. 문화적 중재자이자 문학적 멘토였던 그녀는 이를 통해 일부 역사가들이 규정짓는 단순한 영감의 뮤즈가 아닌 그 이상의 역할을 수행했다. 

 


1782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보아르네 부인은 수녀원으로 돌아갔지만 여전히 그곳에서 문학계 인사들을 접대했다. 2년 후 남편이 세상을 뜨자 파리 투르농(Tournon) 거리로 이사해 그곳에 있는 앙트라그 호텔에서 가장 아름다운 아파트 하나를 임대해 주요 공간을 파란색과 은색 톤으로 꾸며 살롱을 열었다. 그러나 그녀의 금요 모임은 경쟁자 마담 조프랭의 수요모임만큼은 위상을 가지지 못했다. 조프랭 부인의 살롱에는 방문 중인 국가 원수들도 서슴없이 찾아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아르네 부인은 마담 조프랭과 경쟁하며 그녀의 살롱을 문인 살롱으로 자리매김하며 유명세를 키워갔다. 그녀의 살롱에는 카조트, 보퀼라르 다르노, 바일리, 레티프 드 라 브르톤, 그리고 그녀의 연인이자 신뢰받는 친구가 된 퀴비에르가 모였다. 

 

다작 작가 루이 세바스티앙 메르시에, 로 드 부아시, 올랭프 드 구주(Olympe de Gouges), 그리고 코메디 프랑세즈에 불만을 품은 여러 극작가가 찾아왔다. 페미니스트 작가이자 28세 연상의 극작가인 안 마리 뒤 보카주도 얼굴을 비쳤다. 이들은 앙시앙레짐 시대 파리의 문학계와 과학계에서 명성을 떨친 인물이었다.

 

루소도 방문해 그녀를 재회하고 기뻐했다. 작가이자 과학자인 뷔퐁은 그녀를 ‘나의 사랑하는 딸’이라고 부를 정도로 애정이 깊었다. 볼테르와 서신을 주고받았던 그녀는 이 철학자를 접대했던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과 서신을 주고받았다. 미국 대사 제퍼슨도 그녀의 살롱을 들렀다. 그러나 그는 분위기가 맘에 들지 않는다고 다시는 방문하지 않았다.

 

 

연인 도라가 죽자 보아르네 부인은 퀴비에르의 애인이 되어 그와 함께 1789년 10월 이탈리아로 떠났다. 이듬해 5월, 두 사람 모두 정치적으로 의심받게 돼 프랑스로 돌아와야 했다. 보아르네 부인은 잠시 리옹에 머물면서 인적 네트워크를 더욱 넓혔다. 몇 년 후, 보나파르트와의 인연으로 그의 네트워크까지 가동되자 백작부인의 인적 자본은 크게 증대되었고 총재정부와 제1제국 시대의 사교계에서 그녀는 우월한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1792년 파리로 돌아온 그녀는 쿠데타인 테르미도르 9일 이후 투르농 거리 6번지로 옮겨 둥지를 틀고 살롱을 재가동했다. 여기서 그녀는 세 개의 의회 대표를 접견했고 퀴비에르는 프랑스 페미니즘의 창시자 중 한 명인 구주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헌정한 서한을 낭독했다.

 

보아르네의 부인은 대서양 연안 푸아투에 있는 자신의 영지로 피난을 떠났고 그곳에서 루이 16세가 죽은 후에도 몇몇 친구를 계속 맞이했다. 그리고 공포 정치의 대표적 인물 장 폴 마라를 찬양하는 시를 썼다. 이처럼 혁명 기간 동안 그녀의 사교 활동은 주춤하기보다 오히려 특정 쟁점들을 강화시켰다. 

 

보아르네 부인의 단골들이 다수 가입한 ‘국민 9자매회(Société nationale des Neuf Soeurs)’ 회원들이 애국 작가와 세속적 문인의 주제들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새로운 지적 태도를 추구했다. 이 자매회는 오락 문학을 장려하는 몇 안 되는 단체 중 하나였다. 보아르네 부인의 살롱에서는 가벼운 노래 형식의 시들이 크게 유행했고 이러한 유형의 작품이 창작되고 유통되었다. 

 

많은 역사가는 혁명기에 살롱 문화가 사라지고 박물관과 클럽 같은 전형적인 남성 중심의 사교 공간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보아르네 부인의 살롱은 이 주장을 무색하게 만든다. 

최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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