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치는 것들은 직선으로 달리지 않는다. 토끼는 지그재그로 달리고 사슴은 펄쩍 뛰어 오른다. 맹수의 추적을 따돌리는 방법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임을 본능으로 안다. 사람 역시 다르지 않다. 몸을 숨기려는 사람은 목적지까지 단숨에 가지 않는다. 버스나 전철을 이용할 때도 미행하는 자가 있는지 먼저 확인한다. 버스나 전철이 도착해도 바로 타지 않고 기다렸다가 문이 닫히기 직전에 올라탄다. 내릴 때는 목적지로부터 두 정거장 전에 내리는데, 역시나 문이 닫히기 직전에 내린다. 최종 목적지로 향할 때도 곧장 가지 않는다. 큰길을 피하고 구불구불한 골목길만 골라서 걷는데, 뒤따르는 그림자가 없는지 모서리를 꺾을 때마다 확인한다. 사내 역시 그랬다. 삼십여 년 전, 사내는 시국사건 수배자로 청춘의 한 토막을 보냈다. 그 시절, 사내에게는 지켜야 할 수칙이 있었다. 함께 수배된 청춘들과 약속한 원칙이었다. 원칙 가운데 가장 우선시 되는 것은 은신처를 지켜내는 것이었다. 은신처는 수배된 청춘 모두의 것이어서, 그곳이 털리면 모두의 안전도 털릴 수밖에 없었다. 털리지 않기 위해서, 사내와 또 다른 청춘들은 멀리 걷고 많이 걷고 오래 걸었다. 명절이나 기념일이 되어도 집에 가지
할머니가 앉았다. 시장 입구다. 기다란 우산에 비닐을 씌워 비를 피한다. 생김새만 보아서는 아메리카 인디언의 천막 같다. 생김새만 닮았을 뿐, 저렇게 작은 천막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쪼그리고 앉은 라면 박스 위로 비가 들친다. 할머니 발치에 놓인 플라스틱 바구니에도 비는 어김없다. 상추랑 쑥갓은 이천 원이고 고추는 천오백 원이다. 파란 바구니가 상추랑 쑥갓이고 빨간 바구니는 고추다. 빨간 바구니는 파란 바구니보다 작다. 할머니의 굽은 어깨도 비닐을 씌운 우산보다 작다. 우산을 씌운 비닐을 타고 빗물이 줄줄 흐른다. 비닐 안쪽은 할머니의 입김으로 뿌옇다. 비 오는 날의 하루가 뿌옇다. 할머니 앞에 아주머니가 앉는다. 두부가게 아주머니다. 기다란 우산에 비닐을 씌워 비를 피하는 할머니에게 콩물을 건넨다. 콩물 담은 바가지에서 모락모락 김이 난다. 으짤라고. 오늘 같은 날은 나오지 말고 쉬어야제. 말은 억세도 눈빛은 살갑다. 아주머니는, 손사래 치는 할머니 비닐 천막 안으로 콩물 바가지를 밀어 넣고 돌아선다. 한참을 꿈쩍도 하지 않던 할머니가 콩물 바가지를 집어 든다. 한 모금이나 마셨을까. 할머니는 빈 페트병에 콩물을 부어 담는다. 페트병 두 개에 콩물이 가득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 공항에 도착하자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친히 맞이하였다. 김대중 대통령을 맞이하는 북녘 동포는 울었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마주하는 남녘 동포는 TV앞에서 뭉클하였다. 이제 통일이 되는 건가. 이렇게 남과 북이 하나가 되는 건가. 백날을 그리워하였던 사람들은 천날을 끌어안고 울어도 되는 건가. 손수건 꺼내 분단의 눈시울을 적실 수 있는 건가. 아, 백록담의 물을 퍼 담아 백두산 천지에 부을 수 있는 건가. 반도의 허리에 숨겨진 지뢰란 지뢰는 모두 무효일 수 있는 건가. 2000년 6월 15일, 남과 북은 이렇게 발표하였다.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염원하는 온 겨레의 숭고한 뜻에 따라 대한민국 김대중 대통령과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2000년 6월 13일부터 6월 15일까지 평양에서 역사적인 상봉을 하였으며 정상회담을 가졌다. 남·북 정상은 분단 이래 최초로 열린 정상 간 상봉과 회담이 남북화해 및 평화통일을 앞당기는 데 큰 의의를 갖는다고 하면서 선언문을 채택하였다. 선언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 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기로 하였다. ② 남과 북은
선(線)은 점(點)이 모여 흘러가는 강이다. 점과 점을 딛고 걸어가는 길이다. 앞선 점의 어깨와 다음 점의 이마를 밟을 때 흘러나오는 신음소리다. 그런 이유로, 흘러가는 것들은 죄다 서럽다. 끌려가는 것들은 고달프고 밀려나는 것들은 안쓰럽다. 도시의 뒷골목은 둥둥 떠내려가는 것들의 비명으로 한낮에도 먹먹하다. 먹먹하든 막막하든 도시는 멈춤을 허락하지 않는다. 신호등에 있는 빨간불이 세상살이에는 없다. 멈추면 죽고 흘러야 산다. 깨지든 말든 멈추지 마라. 침 발라가며 돈을 세는 손가락 역시 예외일 수 없다. 전염병이 별을 삼켰다. 입과 코에서 뱉은 작은 점들이 집과 마을과 도시로 흘러들었다. 강처럼 바람처럼 흘러드는 바이러스의 점들 앞에 사람이 쳐놓은 방어선은 속수무책이었다. 점이 서고 선이 자빠졌다. 총구를 겨누는 군대도 힘으로 무장한 권력도 무너지기는 마찬가지였다. 봉쇄와 추적과 격리의 선을 전염병은 놀리듯 넘나들었다. 전염병 앞에서 만물의 영장은 한없이 무력했다. 급히 만들어진 백신과 치료제는 흥정할 틈도 없이 팔려나갔다. 돈 많은 나라 국민은 천천히 죽었고 가난한 나라 백성은 빨리 죽었다. 집에서 죽고 길에서 죽고 병원에서 죽었다. 슬퍼할 겨를도 없는
호미 같은 할머니다. 꼬부라진 허리가 호미를 닮았다. 호미를 닮아서, 반듯하게 서도 얼굴은 땅으로 쏟아진다. 할머니는 종일 땅만 보고 산다. 이불을 개고, 밥을 하고, 마당을 쓸고, 풀을 뽑고, 밭고랑을 맨다. 할머니는, 고개 들어 하늘을 보는 것보다 물웅덩이에 비친 하늘을 내려다보는 게 편하다. 내려다보는 것에 익숙한 할머니가 집 앞 자갈밭에 물을 준다. 한 마지기 자갈밭은 할머니의 전부다. 호미로 긁어 판 한평생이 고스란히 자갈밭에 묻혀있다. 아들 하나에 딸 하나, 고구마 같이 튼실한 자식들도 밭일을 하다 낳았다. 호미 같은 할머니가 자갈밭에 물을 준다. 마당에 있는 수도꼭지에 호스를 꽂아 물을 뿌린다. 호스는 마당과 텃밭을 이어주는 탯줄 같다. 가느다란 호스를 타고 밀려온 수돗물이 마른 자갈밭에 찔끔 떨어진다. 전립선(前立腺) 걸린 늙은 사내의 오줌발도 저러할까. 할머니의 한숨이 물을 따라 자갈밭으로 추락한다. 딸을 건져 올릴 때도 저렇게 물이 떨어졌었다. 사십년 세월이라고 지울 수 있겠는가. 그날, 저수지로 물놀이 간 딸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밭일을 하던 할머니는 맨발로 저수지로 달려갔다. 건져낸 딸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호미 같은 할
얼굴은 ‘얼의 꼴’이다. 법정 스님이 한 말이다. 얼은 넋이고 꼴은 겉모양이니, 얼굴은 넋의 겉모습인 셈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정신의 줏대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얼굴을 보면 그 사람의 삶이 보인다고들 한다. 법정 스님의 말대로라면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렸다. 넋에 따라 삶의 궤적이 그려지기는 하지만 현재의 삶이 곧바로 얼굴에 드러나지는 않는다. 얼굴에는 삶은 없고 정신의 줏대만 있다. 졸업논문과 연봉계약서와 등기부등본은 없고 뼈와 살과 주름만 있다. 뼈와 살과 주름을 따라서, 부딪고 보듬고 벼르는 생각의 흔적만 있다. 얼굴에는 거짓이 없다. 화장이나 성형으로도 감춰지지 않는다. 뼈를 깎고 주름을 덮어도 정신의 줏대는 바뀌지 않는다. 얼굴은 저마다 지닌 정신세계의 조감도(鳥瞰圖) 같아서,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눈빛에서 묻어난다. 인물 사진을 즐겨 보는 까닭도 그래서다. 그렇다고 내게 작품을 보는 안목이 있다는 건 아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에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앎이 얕아서 깊게 보지 못하는 나의 눈은 작가의 의도를 따라가지 못한다. 대신 내 눈이 쫓는 건 사진에 담긴 얼굴의 흔적이다. 눈빛과 표정과 주름에 드리워진 생각의 발자취이다. 얼굴에는
알 길이 없다. 거기가 흡연이 가능한 곳인지 아닌지. 소사역 1번 출구를 나와 왼쪽으로 틀면 곧장 파출소다. 파출소 앞에는 6차선 도로를 가로지르는 횡단보도가 있다. 그녀의 위치는 횡단보도와 파출소를 y축 밑변으로 하는 직삼각형의 x축 높이에 해당하는 지점이다. 그리도 오묘한 꼭짓점 좌표에서 담배를 물어서일까. 야트막한 화단 담벼락에 엉덩이를 붙이고 이등변삼각형처럼 한쪽 다리를 꼰 체 담배를 피우는 그녀가 문득 궁금하다. 화단은 구청 직원들이 심어놓은 봄꽃으로 요란하지만, 내 눈에 클로즈업 되는 건 그녀 하나뿐이다. - 아시죠. 술 보다 담배가 더 해로운 거. 임플란트 시술을 마친 의사는 금연을 요구했다. 치과 의사의 명령이 없었다면 나 또한 그녀와 한편이 되어서 담배를 태워 물었을까. 저기, 죄송한데요. 뒤통수 긁적이며 다가가 그녀에게 담배 한 개비 적선할 수 있었을까. 주신 김에 라이터도 좀...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궁둥이를 쑥 빼고, 담배 문 입술만 그녀의 라이터를 향해 전진시킬 수 있었을까. 착각은 자유지만 그런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다. 상황이 일어나기에는 그녀가 물고 있는, 아니 그녀에게 물림을 당하고 있는, 담배의 물림 형태와 구조가 너무 도드라졌
엄마, 당신이 낳은 딸을 보세요. 낳고 기른 딸이, 이제는 또 다른 딸의 엄마가 되어서 걸어가요. 낮게 걸린 비구름 사이로, 건듯 내딛는 걸음걸이가 바람 같아요. 바람은 멈추지 않아요. 멈춤과 바람은 전혀 다른 성질의 것이라서, 끝끝내 멈춤 없는 세상으로 나아가요. 엄마, 당신이 낳은 딸이 그래요. 이제는 또 다른 딸의 엄마가 되었지만, 그렇다고 당신의 딸이기를 포기한 적은 없어요. 의사의 입에서 사망선고가 떨어지던 그 날도 그랬어요. 모두가 절망으로 머리를 조아릴 때, 당신이 낳은 딸은 바람처럼 나부끼며 온몸을 펄럭거렸어요. - 울 엄마 아직 안 죽었어요. 엄마, 당신이 기른 딸을 보세요. 낳고 길러 공부시킨 딸이, 이제는 또 다른 딸의 엄마가 되어서 새벽을 열어요. 새벽이면 어둠은 썰물처럼 무너져요. 무너지는 어둠을 딛고 현관문을 나서는 뒷모습이 밀물 같아요. 밀물은 바다를 품었어요. 바다를 품은 밀물이 첫차를 타고 돈 벌러 가요. 엄마, 당신이 기른 딸이 그래요. 가족을 먹이는 일이라면 포기하지 않아요. 포기를 모르는 모습이 엄마를 닮았어요. 뒷모습조차 당신이랑 똑같아요. 금방이라도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서, “고 서방” 하고 부를 것 같아요. 불러 세우
그런 날이 있습니다. 무얼 해야 할지, 왜 해야 할지, 텅 비어버린 날 말입니다. 껍데기만 살아 펄럭거리는 하루는 시간을 삼키는 종이인형 같습니다. 인형이 삼켜버리는 시간 때문일까요. 봄이 찾아왔지만, 사람들은 봄을 맞을 겨를도 없이 겨울을 삽니다. 세상은 ‘확진’과 ‘격리’의 틈에서 몸살을 앓습니다. 약기운인지, 봄기운인지. 거리에는, 계절을 따라 걷지 못하고 주저앉은 그림자로 가득합니다. 애써 길을 걸어도 보이는 건 겨울뿐입니다. 어떻게 살아야할까요. 아무리 찾아도, 왔다는 봄은 아득하기만 합니다. 다시 봄입니다. 움트고 싹트는 것들로 세상은 천지가 젖몸살입니다. 몸살꽃 이파리는 저물고 뜨는 겨울과 봄의 경계에서 돋아납니다. 저무는 것과 뜨는 것들이 경계의 이쪽과 저쪽에서 요란합니다. 삼월의 낮과 밤이 덩달아 흔들립니다. 흔들리는 하늘과 땅에서 잠들었던 봄이 실눈을 뜹니다. 저무는 것들이 흘린 눈물에서 뜨는 것들의 생명이 잉태합니다. 씨에서 싹이 트고 알에서 새끼가 깨어납니다. 흙에서 눈을 뜬 것들은 하늘로 줄기를 뻗고, 물에서 숨을 튼 것들은 바다를 향해 꼬리를 흔듭니다. 새는 날개를 펴고, 꼬리를 접은 올챙이는 네 발로 걷습니다. 다시 봄입니다. 울어
노래하는 것들에게는 이름이 없다. 강을 노래하는 물결이 그렇고, 숲을 노래하는 그늘이 그렇고, 봄을 노래하는 햇살이 그렇다. 사람에게는 있는 저마다의 이름이 강과 숲과 봄을 노래하는 것들에게는 없다. 밀고 밀리는 물결들마다, 덮고 덮이는 그늘들마다, 비추고 부서지는 햇살들마다, 붙여져야 마땅할 저마다의 이름이 없다. 사람 사는 세상도 그와 같아서, 노래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름이 없다. 글이든 그림이든 음악이든 무엇이든, 틈을 열고 틈 너머를 노래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름이 없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무명(無名)이라 부른다. 문학이든 미술이든 음악이든 연극이든 상관없다. 사람을 노래하든 세상을 노래하든 달라지지 않는다. 노래하는 것이 전부인 사람들에게는 이름이 없다. 호봉도 직급도 계급도 없다. 월급도 휴가도 보험도 정년도 없기는 마찬가지다. 그래서일까. ‘싱어게인, 무명가수전’이라는 오디션 프로그램에 시청자들의 눈길이 쏠렸다. 오디션에 참가한 무명가수들은 이름표 대신 번호표를 달고 심사위원 앞에서 노래를 불렀다. 부르는 노래의 깊이와 색깔과 맛깔스러움에 따라 심사위원들의 선택이 갈렸다. 갈리는 승패에 따라 시청자들의 탄식과 환호 또한 서로 갈렸다. 탈락한 무명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