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 첫 코로나19 확진자가 발생한 2020년 1월 20일. 낯선 감염병과의 싸움은 예상보다 길어지면서 힘겹게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나고 있다. 기초지방자치단체 중 가장 많은 인구가 살고 있는 수원시가 감염병에 대응해 온 지난 1년을 되돌아본다. ◇ 1월 : 수원시, '과잉대응'이란 기치를 들다 1월 22일 수원시가 코로나19와 관련한 첫 대책회의를 열었다. 메르스를 비롯해 이전에 발생했던 각종 재난재해 상황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과잉대응’을 강조했다. 염태영 수원시장이 “시민들에게 신속·정확하게 정보를 공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시한 대로 당시 상황이 ‘대응일지 1보’ 형식으로 시민들에게 전파됐다. 1년 뒤인 이달 18일 현재 1710보까지 전달됐다. ◇ 2월 : 기초지자체 중 감염병 대응 선도 2월 2일 수원에서도 첫 확진자가 발생하자 시는 선제적으로 일주일간 어린이집에 임시휴원을 권고, 시민과의 대면 행사, 집합 프로그램들을 중단했다. 시는 확진자와 접촉자들을 자가격리할 수 있는 임시생활시설로 수원유스호스텔을 활용하기 시작했다. 기초지자체로서는 첫 시도였다. 지역 내 대학교의 개강을 앞두고 있는 유학생들과 시민들의 접촉을 차단하기 위해 공항에서
수원 ‘남문로데오거리’는 1980~90년대 수원지역 상권의 중심지이면서 최대 번화가였다. 이른바 ‘젊음의 거리’로 불리며 평일, 주말 구분없이 사람들로 북적였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서면서 수원역과 인계동, 영통, 광교 등 새로운 상권들이 잇따라 성장하면서 남문로데오거리를 찾는 이들은 급격히 줄어들었다. 어느덧 ‘구도심’으로 불리며 긴 침체기를 겪고 있다. 내년 경기도청이 광교신도시로 이전하고 나면 상권은 더욱 위축될 것으로 보인다. 남문로데오거리 시장 상인회가 나서서 남문로데오거리의 부활을 위해 꾸준히 노력하고 있다. 여기에 수원시도 나문로데오거리 일원에 청년혁신점포를 지정하고 수원시지속가능도시재단 창업지원센터와 ‘청년바람지대’가 문을 여는 등 거리 활성화를 적극 돕고 있다. 2017년 1월에는 ‘남문로데오시장 상권활성화사업 선포식’을 열기도 했다. ‘2021년’ 올해는 남문로데오거리 일원에 빅데이터 분석을 기반으로 ‘타깃 마케팅’ 광고를 표출하는 ‘디지털 옥외광고물’을 설치해 구도심 활성화에 나선다. 디지털 옥외광고물은 행궁광장에서 남문로데오거리, 수원향교로 이어지는 2㎞ 구간에 들어선다. 행궁광장 공방거리 입구 1곳, 남문로데오거리 3곳, 인근 버스
수원시가 앞으로의 10년을 준비하는데 초점을 맞춰 올해 한 해 시정 계획에 담기로 했다. 시는 이 같은 ‘다가오는 10년을 다시 시작하자’는 구상을 복지, 문화, 미래 성장 기반 마련 등에 두루 적용했다. 염태영 수원시장은 5일 “수원만의 가치를 창출하고 지속가능한 도시 발전의 기틀을 세우는 일은 한시도 늦출 수 없는 과제”라며 “위대한 시민이 위대한 도시를 만들어 왔듯이 2021년 우리는 어두운 터널을 완전히 빠져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 모두를 위한 사람 중심 포용도시 수원시는 2021년 사회적 관심과 지원이 필요한 취약계층의 생활과 직접 연결된 사회안전망을 더 촘촘하고 탄탄하게 정비해 사람이 중심이 되는 포용도시로 성장시킬 전망이다. 거주 중심이면서 복지 수요가 많은 동 행정복지센터에 ‘찾아가는 보건복지팀’을 시범 설치해 복지플랫폼 중심이 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하반기부터 4개 구 12개 동에 복지와 건강서비스를 함께 지원받을 수 있는 종합상담과 방문상담, 통합사례관리 등이 시범적으로 운영된다. 또 다자녀가구의 주거 안정을 위한 수원휴먼주택은 올해 30세대 이상 공급해 주거복지 사각지대를 좁힌다. 권선구 곡반정동에 건립 중인 수원시 사회복지타운
새우잡이, 새우젓. 작은 어류지만 우리 밥상에 올라 입맛을 돋우던 전통 염장식품이다. 새우젓에 쓰이는 새우는 ‘젓새우’로 십각목 젓새우과의 갑각류이며 얕은 바다의 뻘에 서식한다. 30~40년 전, 한번 새우잡이에 나가면 언제 돌아올지 모르던 멍텅구리 ‘새우잡이배’, 그래서 한때는 인신매매의 오명도 있었는데 그것은 조업의 ‘힘듦’ 그리고 수 개월 육지와 ‘단절’의 상징이었고, 일종의 극한직업인 셈이었다. 극한직업이 이뤄지는 바다 위 현장, 무동력선 멍텅구리배 ‘곳배’가 그것이다. 그리고 곳배의 고장 장봉도... 장봉도를 중심으로 한 새우잡이와 곳배에 대해 알아본다. 현재 이들의 흔적은 과거의 유산으로 희미하게 남아있을 뿐이다. 장봉도에는 2015년 옹진군이 축소 제작한 모형선박이 건어장 해변에 전시돼 있다. 곳배를 탔던 새우잡이 일상은 어땠을까? 장봉도를 중심으로 북으로는 강화도 및 주변 도서, 서로는 덕적도, 문갑도에 이르기까지 20세기 후반 경기만의 주된 어업활동이었던 새우잡이 모습을 현재의 활동을 통해 알아본다. ▶ 체크 Point 1. 현대 새우잡이 어부의 하루 새우잡이 어부들의 하루를 구성해 본다. 새벽부터 밤까지 기나긴 하루를 배 위에서 보내는 어부
이번에는 덕적군도를 살펴보는 세 번째로 지도, 울도, 선갑도의 유산을 찾아 함께 떠나보자. 지도(池島)는 인천의 유인섬 중 가장 작은 섬으로, 그 이름은 마을 안에 작은 연못이 있어 못 지(池)자를 써서 붙여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도의 마을은 봉화산 서쪽해안에 위치한 선착장 부근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데, 마을 뒷산에는 친환경에너지로 알려진 풍력발전과 태양광발전 단지가 있어 에너지자립의 에코 섬으로도 유명하다. 지도를 구성하고 있는 암석은 중생대 백악기에 생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유문암질 응회암이다. 해안가에는 주상절리와 파도의 작용에 의해 형성된 해식애, 해식동굴 등이 발달돼 있다. 지도 선착장 동쪽 해안가에는 기둥모양으로 갈라진 주상절리를 볼 수 있다. 울도는 인천에서 남서쪽으로 71㎞, 덕적도에서는 남서쪽으로 23㎞ 떨어진 곳에 위치한 섬으로 조선시대 문헌에는 숲이 우거져 있는 섬이라고 해 초목우거질 울(鬱)자를 사용해 울도라는 이음이 붙었다. 또 주민들은 ‘울섬’이라고도 하는데 섬 모양이 울타리처럼 생긴데서 유래한 지명이라고 한다. 구전에 의하면 울도라는 지명은 육지 사람들이 어물을 사려고 배를 타고 이 섬에 들어올 때 무서운 파도에 울고, 섬에 있는
덕적군도는 덕적도를 비롯해 7개의 유인섬과 34개의 무인섬으로 구성돼 있다. 이번에는 두 번째로 선단여, 가도, 백아도의 유산을 찾아 함께 떠나보자. 선단여는 굴업도 남쪽, 백아도 동쪽, 가도 남쪽의 해상에 서 있는 세 개의 돌기둥으로 이뤄진 섬이다. 선단여에 접근해 구성 암석을 살펴보면 주상절리가 발달한 응회암으로, 특이한 모양의 돌기둥은 주상절리를 따라 풍화침식이 활발하게 일어나 형성된 것으로 추정한다. 선단여에는 슬픈 전설이 전해지고 있는데 그 내용은 ‘백아도에 늙은 부부와 남매가 살고 있었는데 부모님이 갑자기 돌아가시자 외딴섬에서 외롭게 살고 있던 마귀할멈이 여동생을 납치한다. 시간이 흘러 성인이 된 오빠는 배를 타고 낚시를 하던 중 풍랑을 만나 이름 모를 섬에 흘러 들어가게 된다. 그 곳에서 아름다운 아가씨를 만나 사랑에 빠지지만, 그 아가씨는 오래 전에 헤어졌던 자신의 여동생이었다. 이들의 사랑을 안타깝게 여긴 하늘은 선녀를 보내 둘의 관계를 설명해 주었으나, 남매는 이 사실을 부인하고 차라리 죽는 것이 났다고 고집을 부린다. 이들에게 노한 하늘은 오빠와 동생 그리고 마귀할멈에게 번개를 내려 죽게 했다. 그 후 이 곳에는 3개의 절벽이 솟아나게 됐
경기도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상당수의 유물들이 기증 절차를 통해 들어온 것들이다. 개인이나 단체 등에게 있어 그 가치가 얼마나 소중할 지는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음이다. 이에 본보는 기증된 유물들의 가치와 기증자들의 뜻을 기리는 의미에서 특별 기획 시리즈를 마련했다. 도박물관 전시실의 기증 유물을 중심으로 총 10회에 걸쳐 그 내용을 소개한다. <편집자주> 지난 2014년 봄으로 기억된다. 중국 연변에서 60대 초반의 남자인 중국동포에게서 전화가 왔다. 박천민 씨의 연락처를 알려줄 수 있겠냐는 내용이었다. 사정을 들어보니 지금껏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이종사촌인데, 경기도박물관에서 독립운동과 관련한 자료를 기증받았다는 언론 소식을 보고 뒤늦게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도움을 요청한다는 것이었다. 일단 만남에 대한 박천민 씨의 의사가 중요했다. 중국동포에게는 어느 날 다시 연락을 달라고 하고, 박천민 씨에게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이후 흔쾌히 만나겠다는 이야기가 돌아왔다. 그로부터 멀지않은 시간, 박물관에서 첫 만남을 가진 그들은 다름 아닌 독립운동가 박찬익(1884~1949) 선생의 외손과 친손으로, 자료의 기증이 생면부지의 사촌들을 찾게 했
경기도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상당수의 유물들이 기증 절차를 통해 들어온 것들이다. 개인이나 단체 등에게 있어 그 가치가 얼마나 소중할 지는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음이다. 이에 본보는 기증된 유물들의 가치와 기증자들의 뜻을 기리는 의미에서 특별 기획 시리즈를 마련했다. 도박물관 전시실의 기증 유물을 중심으로, 총 10회에 걸쳐 그 내용을 소개한다. <편집자주> 족두리는 조선시대 왕실과 사대부가 여성의 대표적인 관모로, 영·정조 시대 사치를 조장한다는 이유로 가체를 금지하고 이를 대신해 궁궐 여성의 머리양식으로 규정하면서 정착됐다. 하지만 족두리의 시작은 그 보다 이른 17세기 전반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광해군 중년 이래 착용됐다고 하는 기록과 함께 17세기 전반에 걸쳐 집중적으로 출토 족두리가 확인된다. 이 시기의 족두리는 모자와 같이 머리에 쓰는 방식의 큰 족두리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반(1341~1401) 부인 계림이씨 초상’을 통해 그 착용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큰 족두리는 17세기 중반을 기점으로 더 이상 보이지 않다가 반세기 후인 18세기 들어 머리에 얹도록 훨씬 작아진 형태로 다시 나타난다. 18세기 가체의 사치가 극에 달
조선시대 많은 유민(流民)과 사망자를 발생시켰던 재해(災害)는 가뭄과 역병(전염병)이었다. 전쟁은 이보다 훨씬 심했지만 아주 드문 일이었고 혹독한 세금과 홍수, 냉해 등 다른 자연재해도 정도는 그보다 덜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태조부터 철종 때까지 이에 대한 기록이 끊이지 않는다. 왕권강화를 위해 수 많은 측근 공신과 외척들을 숙청했던 ‘철혈군주’ 태종도 재위 18년 간 매년 계속되는 가뭄에 애를 태웠고, 순조 21년(1821)에는 괴질로 3일 사이에 평양에서 무려 1000여 명이 죽었다는 기사도 눈에 띈다. 현종 때 ‘경신 대기근’은 우리역사 상 전대미문의 재앙이다. 1670(경술)~71년(신해) 2년 간 전국 8도에 가뭄, 홍수, 냉해, 병충해 등 재해란 재해가 한꺼번에 몰아닥쳤다. 화불단행(禍不單行), 뒤를 이어 전염병과 우역(牛疫, 소 전염병)이 만연했다. 이로 인해 당시 인구의 최소 10% 또는 그 이상이 굶어죽거나 병들어 죽었다. “임진왜란 때도 이것보다는 나았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참혹했다. 특히 소리없이 찾아오는 역병은 엄청난 공포 그 자체였다. 콜레라, 장티푸스, 천연두(마마), 이질, 홍역 등 병의 위세는 지금과 똑같은데 그 때의 열악했
1970~80년대 동인천역과 신포동 일대는 인천 청춘들의 집합소였다. 당시 동인천역 광장을 가로질러 지하상가로 들어가 바로 왼쪽으로 꺾어나오면 용동큰우물에 닿는다. 어스름 무렵부터 이곳에는 젊은이들의 발길로 북적였다. 대학생과 직장인, 연인, 휴가 나온 군인들이 삼삼오오 우정을 다지고, 시국과 미래를 논하고, 밀어를 나누며 청춘의 열기를 발산했다. 늦은 밤 술에 취해 거리에서 어깨동무를 한채 목청껏 노래를 부르거나, 여기저기 으슥한 곳에 쭈그려 앉아 배를 움켜쥐고 토악질을 하거나, 취객들 사이에 시비가 벌어지는 풍경은 낯설지 않았다. 이러한 모습은 위로 올라가 용동마루턱과 경동사거리, 신포동으로 이어졌다. 비단 술집뿐만이 아니었다. 동인천역을 나와 신포동 쪽으로 부채살처럼 퍼져있는 곳곳에 다방(음악다방), 음악감상실, 당구장, 탁구장, 빵집, 우동가게, 국화빵·붕어빵 노점, 서점, 야구연습장, 문구점, 독서실 등이 점점이 박혀 있었다. 길을 가다보면 어깨를 부딪칠 만큼 넘쳐나던 청춘들이 이곳에서 수 많은 추억을 차곡차곡 쌓았다. 특히 동인천역에서 답동사거리까지 연결되는 지하상가는 색다른 공간이었다. 인천에서 처음 개통된 이곳 지하상가는 1963년 이미 ‘지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