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사설 [고향갑의 난독일기(難讀日記)] 정추실이라서 믿는다
깊어져서 가을이다. 새벽 닭 울음조차 어스름 너머에서 깊다. 깊음도 흐를 수 있을까. 나는 창문을 열고 한동안 바라만 본다. 방 안에 고인 어둠이 창틀을 타고 넘어가 새벽 속으로 흩어진다. 새벽은 푸름 속에서 더디게 흐른다. 산과 들과 마을에서 흘러온 밤의 색깔들이 푸름 속으로 스며든다. 그런 까닭으로 푸른 것들은 깊다. 밤과 어둠을 삼킨 푸름은 깊다. 바다가 그렇고, 새벽이 그렇고, 피멍 든 가슴 또한 그러하다. 푸름의 깊이는 어떤 눈금으로도 가늠할 수 없다. 하물며 가을이 익어가는 새벽의 푸름 아니던가. 나는 실눈을 뜨고 어둠과 푸름의 경계에서 발돋움 하고 선 여인을 떠올린다. 움푹 파인 그녀의 볼우물에도 새벽은 고이고 있을까. 땅끝, 해남(海南)에서 만난 봄은 목이 말랐다. 갈증 난 논과 밭과 들이 마른하늘을 향해 손가락질을 퍼부었다. 원망 섞인 삿대질에도 하늘은 좀체 비를 뿌리지 않았다. 나는 갈라진 논바닥과 타들어가는 밭고랑을 그대로 뮤지컬 대본에 옮겼다. 해남에서 만난 가뭄은 뮤지컬의 배경이 되는 마을에서도 시뻘겋게 타올랐다. 그녀에게서 처음 연락이 오던 날도 비는 오지 않았다. 보자는 연락에 그러자고 답했다. 약속장소는 해남과 완도가 마주보고 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