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켜 보니 벌써 9년 전의 일이다. 4·19 혁명 56주년이 되던 2016년 4월 19일, 그 역사적인 날에 그야말로 역사적인 한 인물이 유명을 달리했다. 초당(草堂) 신봉승(辛奉承) 선생. 83세의 일기였다. 선생은 ‘국민 사극 작가’로 불린 극작가요, 시·소설·평론·시나리오에 두루 걸쳐 130여 권의 저술을 남긴 광폭(廣幅)의 문인이었다. 그중에 많은 사람이 오래 기억하는 작품은 8년간 지속한 TV 드라마 '조선왕조 5백 년'이었다. 그 가운데는 세조 조의 한명회나 구한말 흥선 대원군에 대한 새로운 역사적 평가를 비롯하여, 그야말로 볼거리가 즐비했고 화제도 만발했다. 역사에 대한 새로운 시각, 이미 오랜 세월이 흘러 그 성격이 확정된 역사에 대한 관점의 ‘반란’은 작위적인 의지만으로 가능할 리 없다. 오랜 사료의 검토와 연구, 그리고 역사관에 대한 자기 확신이 없이는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선생은 이 곤고한 역사 학습의 과정을 초인적인 인내와 근면으로 넘겼다. 그는 언필칭 ‘재야의 역사학자’였다. '조선왕조실록'이 국문으로 번역되기 전에 9년에 걸쳐 통독하고 그 500년 역사를 통시적으로 관통하는 눈을 길렀다. 여러 곳의 말과 글에서 확인되는 선생의 문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스타 문학평론가’ 김윤식 선생이 타계한 지 꼭 7년이 되었다. 필자가 선생을 곁에서 직접적으로 모시게 된 것은 2007년 사단법인 이병주기념사업회가 발족하면서부터였다. 이 사업회의 출발을 위한 발기인대회에서 선생과 함께, 이병주 작가의 고향인 경남 하동 출신의 전 검찰총장 정구영 변호사가 공동대표를 맡고, 이어령 선생이 고문, 임헌영·전상국·김춘미·여상규 등의 인사가 부대표, 이문열·김인환·안경환·김언호 등의 인사가 운영위원, 그리고 필자가 사무총장을 맡게 되었다. 그로부터 김윤식 선생이 우리 곁을 떠난 2018년까지, 필자는 선생과 지근거리에 있었고 늘 아버지를 대하는 심정으로 모시려고 애썼다. 선생이 문학 단체의 수장을 맡은 것은 이병주기념사업회가 유일했다. 함께 이 조직을 구성한 사람들과의 관계도 그러했지만, 이병주라는 작가가 선생과 유다른 관계성을 가졌다는 사실을 여러 경로로 확인할 수 있었다. 한 가지 예화를 들면, 이는 선생 자신이 직접 토로한 대목이다. 이병주, 김윤식 두 분이 TV 토론 프로그램에 같이 출연하여 이병주 장편소설 '비창'에 대해 토론하는데, 김 선생이 그 소설 속 주인공인 술집 마담의 행적에 당위성이 없다고
이어령 선생이 지병으로 타계한 지 벌써 3년 7개월이 지났다. 향년 88세. 참으로 만감이 교차한 순간이었다. 필자는 1988년 '문학사상'을 통해 문학평론가로 등단하면서 선생을 처음 만났고, 선생의 문학에 대해 여러 편의 글을 썼으며, 한국문학평론가협회 회장으로 있을 때는 선생을 고문으로 모셨다. 선생과의 만남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2003년 4월 '문학수첩' 편집위원으로서 ‘대중문화 인물탐방’ 시리즈 첫 순서로 선생과 함께 한 장장 3시간의 대담이었다. 많은 이들이 선생에 대해 ‘세태를 앞서 읽는 눈과 시대의 성격을 규정하는 선언’이 전매특허라고 말한다. 1960년대의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로 출발한 선생의 시대 선언 장정(長征)은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의 전환을 역설하면서 서막을 열었다. 1970년대의 ‘신바람 문화’는 군사독재 시대에 민족의 열정을 깨우는 목소리로, 1980년대의 ‘벽을 넘어서’는 서울올림픽 개·폐회식의 초대형 국가 이벤트를 이끌며 지구촌의 화합을, 그리고 1990년대의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 가자’는 IT강국을 기반으로 한국이 글로벌 정보화 사회의 리더가 되는 길을 제시했다. 2000년대의 ‘디지로그 선언’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