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진리에 가까이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타인의 잘못에 대해 너그러워진다. 그 반대 또한 진리이다.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의심할 여지없는 원칙이 있다. 그것은 만약 어떤 일이 선을 배반하지 않고는 이루어질 수 없다면, 그것은 진짜 선한 일이 아니거나 아직 그 일을 할 시기가 되지 않은 것이다. 신은 양심과 이성의 힘으로 사람들의 마음에 믿음의 불을 켜주고 있다. 폭력으로는 믿음의 불을 켤 수 없다. 폭력과 위협이 가져다주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공포이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사람, 방황하는 사람을 비난하고 나무라서는 안 된다. 그들은 그 미망으로 인해 이미 충분히 불행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것이 그들에게 이익을 가져다주고 있을 때는 그들을 나무라도 상관없지만, 오히려 그것은 대부분의 경우 그들에게 반발심을 일으켜 그들을 더욱 돌아서게 만든다. (파스칼) 우리는 오히려, 과거의 것을 대신할 수 있는 새로운 일치의 기초를 탐구해야 하지 않을까? (마르티노) 신앙은 사랑과 마찬가지로 억지로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정치적 수단으로 신앙을 도입하고 그것을 보호하려 해도 잘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랑을 강요하면 오히려 증오를 불러일으키듯
이성은 우리들에게 우리가 인생의 법칙을 배반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 배반에 완전히 익숙해져서 그것을 편하게 여기고 있기 때문에, 자신들의 그 익숙한 생활을 방해하려는 이성의 목소리를 압살하려고 애쓴다. 사람은 자신의 생활이 양심에 합치되지 않으면 양심이 마비되어 생활에 장단을 맞춘다. 사격을 받고 있는 엄폐물 뒤에서 아무 것도 할 것이 없는 병사들은, 위험한 순간을 더 쉽게 견딜 수 있도록 애써 일거리를 찾는다. 사람들도 때때로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은 명예욕으로, 어떤 사람은 오락으로, 어떤 사람은 법률 문서를 씀으로써, 어떤 사람은 향락으로, 어떤 사람은 정치활동으로 그것을 견디고 있다. 폭풍이 나무를 뽑고 바위를 굴리지만 하루를 못 갑니다. 정말 크고 강한 것은 소리 없이 흐르는 맑은 시내입니다. 살진 들을 적셔 천하를 기르는 것도 그것이요, 모든 비, 바람, 구름, 물결을 일으키면서도 자기는 억만 년 노함도 흔들림도 없는 대양의 가슴을 채워주는 것도 그것입니다. 그리고 시내는 억억만만의 물방울이 음악 속에 하나 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연의 시내보다도 더 무한히 큰 것은 역사의 흐름이요 그 흐름을 이루는 것은 씨ᄋᆞᆯ입니다
기도의 보람은, 네가 가장 선한 순간에 도달했을 때, 네 가슴속에 삶의 의의에 대한 최고의 깨달음을 주는 것이다. 신에게 봉사하는 내적 형식으로서, 신의 은총을 구하는 수단으로 이해되고 있는 ‘기도’란 공허한 미신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원래 언어를 필요로 하지 않는 존재인 신에게 언어로 자신의 소망을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기도에 의해서는 우리는 본질적으로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으며, 또 신의 계율로서 우리의 마음에 각인된 의무의 하나를 수행한 것도 아니므로, 결국은 실제로 신에게 봉사한 것이 아니다. 우리의 모든 행위를 통해 신을 기쁘게 하려는 마음으로부터의 소망, 다시 말해 우리의 모든 행위가 바로 신에게 봉사하는 거라는 마음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소망 속에는, 우리의 마음에 절대적으로 내재해야 하는 기도의 정신이 들어 있다. 이 소망에 언어와 형식을 부여하는 것은, 결국 우리의 마음에 그런 기분을 느끼게 하는 수단일 뿐이다. (칸트) 이따금 어린아이처럼 누군가에게(신에게) 호소해 도움을 청하고 싶어질 때가 있다. 이것은 좋은 감정일까? 아니다. 좋지 않다. 그것은 나약한 마음이고 믿음이 없는 것이다. 뭔가를 간절히 소망하는 기도
일반적으로 비평가들이 찬사를 보내는 가짜 예술작품은 사이비 예술가들이 침을 흘리며 기웃거리는 문과 같다. 진정한 예술 작품은 마치 어머니의 태내처럼 새로운 생명의 결정체로서 극히 드물게 예술가의 마음에 나타나는 것이다. 가짜 예술은 수요자만 있으면 기술자나 직공의 손으로 얼마든지 계속 생산된다. 진정한 예술은 자신을 사랑해주는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처럼, 특별히 화장하거나 치장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사이비 예술은 탕녀처럼 화려하게 치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진정한 예술의 결과는 사랑의 결과가 새로운 인간의 탄생이듯, 새로운 감정을 이 세상에 불어넣는 것이다. 그러나 가짜 예술의 결과는, 인간의 타락과 만족할 줄 모르는 쾌락의 추구, 그리고 인간 정신의 쇠약뿐이다. 자신의 재능을 팔아서는 안 된다. 그것을 팔게 되면 너희는 즉시 성직매매나 매음 행위와 다름없는 죄에 빠지게 된다. 너희는 자신의 노동은 팔 수 있지만 영혼을 팔아서는 안 된다. 장사꾼들을 몰아내지 않는 한 예술의 전당은 진정한 전당이 될 수 없다. 미래의 예술은 그들을 몰아낼 것이다. 여러분은 우물 속의 개구리의 이야기를 들으셨습니까? 그것은 2000년 전 전국시대에 전쟁군주들이 씨ᄋᆞᆯ들을 못살
정의는 그것을 추구하는 것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랑에 의해 실현된다. 과녁을 명중시키려면 그 과녁보다 위를 겨냥해야 하듯이 공정하려면 자기를 희생해야 한다. 즉 자기 자신에게는 오히려 불공정해야 하는 것이다. 오로지 공정하려고만 하면 결국 자신에게 관대해져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불공정하게 되어버린다. 완전하게 올바른 행동만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정직한 인간이 오로지 진실만을 얘기하려고 노력함으로써 거짓말쟁이와 구별되듯이, 정의로운 사람은 정의롭고자 하는 노력에 의해 정의롭지 못한 사람과 구별된다. 부정 그 자체보다 나쁜 것이 있다. 그것은 사이비 기독교 세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거짓 선행, 거짓 사랑, 하느님에 대한 거짓 봉사이다. 사람들은 사랑의 법칙을 실천할 생각으로, 또는 실천하는 척하면서 정의의 요구를 외면하고 자못 우쭐하여 악랄한 부정에 빠져든다. 그들은 교회에 헌금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풀지만, 그들이 내는 것은 그의 형제들이 피땀 흘려 만든 결과물이다. 재판관은 문제의 어느 한 면만을 보고 옳고 그름의 판단을 내린다. 그러나 사실상 인생에 있어 어떤 측면에서 문제를 보느냐에 따라 어는 것이나 옳다고 말할 수 있는 다양한 대답이
모든 학문을 다 잘 알면서 자기 자신에 대해 모르는 사람은 무지한 자이다. 아무것도 모르지만 자기 자신과 자신의 영적 자아를 알고 있는 사람은 충분히 깨달은 사람이다. 인간이 자연을 향해 도대체 나는 무엇인가 하고 질문해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자신이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기 때문이다. 그는 스스로 자신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류시 말로리) 폭력을 휘두르고 싶어지면 사람들 앞에서 즉시 떠나라. (소로) 명예의 길은 왕궁으로 통하고, 행복의 길은 시장으로 통하며, 선의 길은 황야로 통한다. (중국 속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내적 세계는 너무 넓어서 연구하고 싶은 생각조차 들지 않는 큰 바다와 같다. 그러나 언젠가는 그 속에 들어가 그때까지 헛되이 외부 세계에서 찾아 헤맸던 하늘의 은신처를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 (류시 말로리) 인간에게는 언제나 모든 불행에서 벗어날 수 있는 피난처가 있다. 그것은 곧 그의 영혼이다. 만일 인간으로서 자신이 누구인지 깨닫는다면, 자신의 슬픔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 느끼게 될 것이다. 살아서 선을 쌓자 이게 아니라, 사는 것이 곧 선이야. 이렇게 살아나가는 게 곧 이기는 것이야. 사람은 죄를 알지 않고
사람들이 만일 도덕적인 삶을 추구한다면 결코 진리를 떠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신분이 높거나 낮거나, 부유하거나 가난하거나, 학문이 있거나 없거나, 어떤 인간도 두려워하지 말라. 모든 사람을 존경하고 모든 사람을 사랑하되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말라. 너의 이성이 너에게 계시하는 진리를 추구하며, 어떠한 경우에도 신념에 충실하라.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기대하지 말라. 진리를 향한 목소리가 적으면 적을수록 더욱더 목소리를 높여라. 진리가 미망이나 편견, 정욕보다 강하다는 것을 믿고 정의를 위한 수난을 각오하라. 진리는 장소와 시간에 제약받는 것이 아니며, 영원하고 불변한 것, 어떠한 세계에서도 동일한 것, 신과 하나가 되어 그 권능을 지니는 것임을 기억하라. (채닝) 진리를 잡기(雜記)의 책에서가 아니라 사상 속에서 찾아라. 달을 보려거든 웅덩이가 아니라 하늘을 쳐다보라. (페르시아 격언) 네가 진리로부터 떠나는 순간, 태어난 이후 네가 쌓아온 선행의 성과는 모두 사라져 버린다. 네 안에 살면서, 네가 너 자신과 한 몸이라는 것을 아는 지극히 높은 정신이, 모든 곳에서 네가 행하는 선과 악을 관찰하고 있다. (마누 법전) 진리는 단순한 대화를 통해 알 수 있는
노동은 육체 생활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조건이다. 만약 인간이 노동을 하지 않는다면 그는 얼이 죽거나 굶어 죽게 될 것이다. 이것은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노동이 정신생활의 필연적인 결과인 것은, 육체에 있어서의 그 불가피성과 마찬가지로 분명한 사실인데도 모든 사람이 다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육체노동에 종사하지 않으면 우리는 반드시 체력을 잃고 진리를 놓치게 될 것이다. 나는 현대의 문학과 철학에 나타나 있는 오류와 결함, 그 지나친 장식과 나약함, 우울함이 현대 문단의 허약하고 병적인 습관의 결과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책은 그리 좋지 않더라도 그것을 쓰는 사람이 더욱 노력하는 훌륭한 사람이어야 하며, 현재처럼 그 사람이 쓰는 것과 실제 인물이 너무 동떨어진 대비를 이루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에머슨) 우리는 육체노동을 통해 외부 세계를 배운다. 풍요로움의 은혜는 그것을 공짜로 얻는 사람보다 그것을 생산하는 자에게 주어진다. 삽을 들고 밭에 나가 이랑을 고를 때, 나는 언제나 큰 기쁨과 함께 육체의 건강을 느끼며, 왜 나는 지금까지 내 손으로 할 수 있는 것을 남에게 시킴으로써, 이런 행복을 나 자신한테서 빼앗았던 것일
기도의 보람은, 네가 가장 선한 순간에 도달했을 때, 네 가슴속에 삶의 의의에 대한 최고의 깨달음을 주는 것이다. 신에게 봉사하는 내적 형식으로서, 신의 은총을 구하는 수단으로 이해되고 있는 ‘기도’란 공허한 미신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원래 언어를 필요로 하지 않는 존재인 신에게 언어로 자신의 소망을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기도에 의해서는 우리는 본질적으로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으며, 또 신의 계율로서 우리의 마음에 각인된 의무의 하나를 수행한 것도 아니므로, 결국은 실제로 신에게 봉사한 것이 아니다. 우리의 모든 행위를 통해 신을 기쁘게 하려는 마음으로부터의 소망, 다시 말해 우리의 모든 행위가 바로 신에게 봉사하는 거라는 마음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소망 속에는, 우리의 마음에 절대적으로 내재해야 하는 기도의 정신이 들어 있다. 이 소망에 언어와 형식을 부여하는 것은, 결국 우리의 마음에 그런 기분을 느끼게 하는 수단일 뿐이다. (칸트) 이따금 어린아이처럼 누군가에게(신에게) 호소해 도움을 청하고 싶어질 때가 있다. 이것은 좋은 감정일까? 아니다. 좋지 않다. 그것은 나약한 마음이고 믿음이 없는 것이다. 뭔가를 간절히 소망하는 기도
인생은 운동이다. 따라서 인생의 행복은 어떤 일정한 형태가 아니라 좋은 방향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그 방향은 자신에 대한 봉사가 아니라 자신을 보낸 자(신)에 대한 봉사이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행복과 쾌락을 권력 속에서 찾고, 또 어떤 사람은 학문에서, 또 어떤 사람은 육욕에서 찾는다. 그러나 참으로 행복에 가까이 다가간 사람들은, 행복이란 특정한 일부 사람들만 소유할 수 있는 것 속에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은 인간의 참된 행복이란 모든 사람이 차별이 없고 부러워할 필요도 없이 다 함께 소유할 수 있는 것이며, 누구나 스스로 잃어버리려 하지 않는 한 잃어버릴 수 없는 성질의 것임을 알고 있다. (파스칼) 행복이란 인간이 자기 개인을 위해 바라는 것이고, 선복(善福)은 모든 사람과 함께 자신에게 바라는 것이다. 행복은 투쟁을 통해 얻을 수 있고 선복은 오직 사랑을 통해 얻을 수 있다. 진정한 행복은 아무 데나 흔히 있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행복은 오직 모든 사람에게 행복하고 선한 것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사람들에게 해롭지 않고 유익한 존재가 되고 싶으면 만인의 행복과 일치하는 것만 하라.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도 행복을 얻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