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와 정의를 추구하는 사람은 고독 속에 혼자 있을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베르시에) 납과 같은 본성에서 황금같은 행동을 이끌어내는 것은 어떠한 정치적 연금술로도 불가능하다. (허버트 스펜서) 만약 사람들이 세계를 구원하는 대신 자기 자신을 구원하고자 하고, 인류를 해방시키는 대신 자기 자신을 해방시키고자 한다면, 그들은 세계를 구하고 인류를 해방하기 위해 참으로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텐데! (게르센) 사회주의에는 두 종류가 있다. 그리고 둘 다 모든 사람의 최대 행복을 추구한다. 하나는 모든 사람의 행복을 획득하려고 노력하고, 다른 하나는 모든에게 저마다 제 나름대로 행복해질 수 있는 가능성을 주려고 한다. 전자는 국가의 권력을 인정하지만, 후자는 어떠한 권력도 인정하지 않는다. 전자는 국가의 전제를 요구하지만, 후자는 모든 계급의 절멸을 요구한다. 전자는 사회주의적 전쟁을 긍정하지만, 후자는 오직 사회주의의 평화적 방법만을 믿는다. 사회주의에는 이 두 가지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는 어린이의 사회주의, 다른 하나는 어른의 사회주의이다. 전자는 과거의 것이고 후자는 미래의 것이다. 따라서 전자는 후자에게 마땅히 그 자리를 물려주어야 한다.
해박한 지식을 높이 평가하는 것은 잘못이다. 중요한 것은 지식의 양이 아니라 질이다. 소크라테스는 어리석음과 현명함을 양립하지 않는 것으로 보았으나, 무지를 어리석음이라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자기 자신을 모르고, 자신이 알고 있지 않으면서도 아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다고 했다. 어떤 사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거나, 또 매우 드문 일이지만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는 사람은, 그 사실에 대해 조금밖에 모르면서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보다 훨씬 훌륭하다! (소로) 우리는 자주적으로 사색함으로써 불필요한 독서를 얼마나 많이 피할 수 있는지 모른다! 과연 독서와 학문은 같은 것일까? 어떤 사람은 도서 출판이 학문의 광범위한 보급에 공헌했을지는 몰라도, 학문의 질과 내용은 그것 때문에 훼손되었다고 주장했는데, 근거가 없는 말이 아니다. 지나친 독서는 사색의 적이다. 내가 연구한 학자들 가운데서 가장 위대한 사상가는 바로 책을 가장 적게 읽었던 사람들이었다. 만약 사람들이 무엇을 사색할 것인가에만 매달리지 않고, 어떻게 사색할 것인가를 배운다며 그로 인해 생기는 많은 오해를 미리 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리히텐베르크) 모르는 것
인간에게 가장 큰 행복은 자유이다. 어떤 사람이 불행하고 괴로워하고 신음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누군가의 혹은 무엇인가의 노예가 되어 있는 것이다. 자유로운 사람은 자신이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지배할 수 있는 것만 지배한다. 그런데 완전히 자유롭게 지배할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뿐이다. 그러므로 만약 어떤 사람이 자기 자신이 아닌 남을 지배하고자 하는 것을 보거든, 그는 자유롭지 않음을 알라. 즉 그는 남을 지배하려는 욕망의 노예인 것이다. (에픽테토스) 내면의 자유가 없는 외면의 자유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 설사 외적 폭력에 억압당하지 않더라도 무지, 죄악, 이기주의, 공포 때문에 자기 마음을 스스로 지배할 수 없다면, 외면의 자유가 내게 무슨 소용이 되겠는가? 나는 자기 자신이나 자기 영역 속에 갇혀 있지 않은 사람 곧 오만, 분노, 게으름을 극복하고 인류의 행복을 위해 몸을 바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 그런 사람만을 자유인이라고 부른다. (채닝) 진정 자유롭기 위해서는 너는 항상 신에게서 받은 것을 언제라도 신에게 돌려줄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너는 자신의 의지를 신의 의지와 연결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오직 신의 의지에 어긋나는 일에서
인간의 마음에는 신성이 있다. 모든 진리의 근원에는 신이 있다. 진리가 인간 속에 나타난다고 해도 그것은 진리가 인간으로부터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다만 인간에게 진리를 비추는 거울과 같은 성질이 있기 때문이다. (파스칼) 빗물이 홈통을 따라 흐를 때 마치 홈통 속에서 흘러나오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다. 성자들이 우리에게 얘기하는 신성한 가르침도 그와 같아서, 성인에게서 나오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신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라마 크리슈나) 자신의 정신력을 신의 힘과 따로 떼어놓고 생각하는 것은, 노자의 가르침에 의하면 풀무 그 자체가 공기를 만드는 독자적인 원천이며, 진공 속에서도 바람을 일으킬 수 있다고 믿는 것과 같다. 만일 우리가 한순간이라도 자신의 보잘것없는 ‘자아’를 떠나 악을 생각하지 않고 빛을 반영하는 맑은 거울이 된다면, 우리가 비추지 못할 것이 뭐가 있을까! 만물은 당장 밝은 빛이 되어 우리의 주위에 펼쳐질 것이다. (소로) 이 땅에서 인간이 해야 할 진정한 일은 자기 존재를 영원한 것과 조화시켜 살아가는 것이다. 그때 비로소 사랑과 이성의 힘이 맑은 운하를 흐르듯 그를 통해 도도히 흘러갈 수 있다. 참다운 예
가족 이기주의는 개인 이기주의보다 훨씬 더 맹렬하다. 자기 한 사람을 위해 다른 사람의 행복을 희생시키기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사람도, 가족을 위해서 다른 사람들의 불행과 곤경까지 이용하는 것을 자신의 의무로 여긴다. 인색, 뇌물, 노동자의 탄압, 부정한 상술, 이러한 것들은 모두 가족에 대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합리화되고 있다. 가족이니 조국이니 하는 것이 우리의 영혼을 제약할 수는 없고, 또 제약해서도 안 된다. 인간은 태어난 날부터 몇몇 사람들에게 둘러싸이는데, 그 사람들의 사랑이 그의 마음속에 인간에 대한 사랑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가족애와 조국애가 배타적인 것이 되어 그것 때문에 인류의 보편적인 요구를 물리치게 된다면, 그것은 우리의 마음의 양육자가 아니라 그 무덤이 되고 만다. (채닝) 가족에 대한 사랑은 결국 자기애의 감정이며, 그렇기 때문에 부정하고 나쁜 행위의 원인은 될 수 있어도 결코 그 변명이 될 수는 없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 (예수) 가족에 대한 사랑 속에는 자아에 대한 사랑과 마찬가지로 도덕적인 의미의 선악이 들어
명파 캠핑장에서 송정마을 캠프장까지 20킬로. 길을 떠나기에 앞서 근 10년 만에 동해에 몸을 담가보았다. 민통선 입구까지 걸어가서 그곳에서부터 공식적인 출발을 했다. 중간중간 쉬면서 걸었지만, 뜨거운 태양열 아래 걷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그러나 일단 어깨에 배낭이 없으니 할만했다. 발바닥이 아파오는 게 심상치가 않다. 두 시간 반을 걷다 보니 어제저녁 우리 일행을 반겨주었던 이상중 목사께서 시무하는 초댁제일교회를 지나가게 되어 쉴 겸하여 연락을 드렸더니 쾌히 허락하시어 잠시나마 에어컨의 찬 바람을 맞으면서 잘 쉬었다. 행복이란 이렇게 쉽게 찾아오는 것임을 깨닫는다. 오후 중간에 수박화채를 먹으니 절로 기운이 난다. 두세 분이 식사와 간식을 준비하여 주시니 사실 따지도 보면 그동안 내가 네팔이나 스페인에서 걸었던 순례길에 비하면 거저먹기나 다름이 없다. 걷게 되면 차로 갈 때 그냥 지나치기 쉬운 경치를 보게 된다. 루소는 걷는 일에 대해 이렇게 얘기했다. “한 곳에 머물러 있으면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고 할까, 몸이 움직여야 마음도 움직인다고 할까. 시골 풍경, 계속 이어지는 기분 좋은 전망, 신선한 공기, 왕성한 식욕, 걷는 덕에 좋아지는 건강,
생명이 드러나는 사실, 즉 진화 이야기는 사람들을 결합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 과학은 수많은 과학자들의 자료를 종합하고 과학 탐구의 전형인 의문과 회의를 키우는 문화적 창조물이고 (잘못을 고친다면) 편협한 신화나 신앙을 요구하여 사람을 분열시키는 종교적 전통보다도 훨씬 설득력 있게 세계를 설명하게 되었다. 과학자들이 언제나 옳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러나 미래 인류의 존재에 대한 가장 의미 있는 이야기는 힌두교, 불교, 유대교와 기독교, 이슬람교보다 과학의 진화적 세계관에서 나오기가 훨씬 쉬울 것이다. 과학 탐구와 창조 신화를 둘 다 이해한다면 과학 이야기 속에 증명할 수 있는 사실과 개인적 의미를 모두 풍부하게 담는 세계관을 형성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298쪽) 참된 진화 심리학 관점에서 보면 영혼과 정신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물질에 의한 불가피한 존재다. 생각은 다른 어떤 것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세포의 활동에서 나온다. (299쪽) 인간은 특별하다고 말한다. 우리는 직립 보행을 한다(바로 이 점 때문에 우리 자신을 말 그대로 다른 종 “위”에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에게는 마주 보는 엄지(도구 사용자 인간), 언어
생명은 에너지와 물질의 변환이다. 태양의 불꽃이 광합성 생물의 녹색 불꽃이 되는 것이다. 녹색 불꽃은 꽃식물의 적색, 홍색, 황색, 자주색 등 성적인 불꽃, 즉 다른 생물계를 설득하는 전문가가 된다. 화석화된 녹색 불꽃은 태양의 경제체제 안에 있는 인간의 방에 축적된다. 생명은 끊임없이 열을 소산 하는 화학작용이다. 그리고 생명은 기억이다. 과거의 화학작용을 반복하면서 행동하는 기억이다. 그리고 생명은 자기 초월적이다. 태양으로부터 온 에너지를 저장하고 재분배하면서 생명은 최고 수준의 활동력과 복잡성을 과시한다. 생명이 우주의 큰 영역을 자신의 보금자리로 만들어 간다면 그 과정에서 자신을 어떤 생명으로 만들지 누가 추측이라고 할 수 있을까? 다른 포유류 종과 마찬가지로 호모 사피엔스 역시 200만 년을 더 견뎌낼 것이다. 신생대 포유류 종의 평균 존속 기간이 300만 년 보다 짧았다. 모든 종은 사라진다. 멸종하거나 둘 이상의 후손 종으로 갈라지는 것이다. 캄브리아기부터 지금껏 살아 있는 동물 종은 없다. 어쩌면 호모 사피엔스도 오늘날 침팬지와 사람만큼 서로 다른 자손 종 둘로 나뉠지도 모른다. 종의 분리가 기술에 의해 더욱 가속화될 수도 있다. 내구력 있는
생명은 세균이다. 세균이 아닌 생명은 세균인 생명에서 진화했다. 시생대 말기에는 불모지란 불모지는 모두 미생물 매트와 일시적인 더께로 뒤덮였다. 황이나 암모니아가 있는 뜨거운 웅덩이마다 개척자들과 밀려드는 이주자들이 가득 찼다. 세균은 소금 알갱이에 끈끈한 점액을 배출했고, 철분이 많은 연못에서 자철광을 침전시켰다. 극지방 근처의 차갑고 메마른 바위에 들러붙고, 열대의 얕은 바다에서 화산암 조각을 뒤덮어 지구를 푸르게 하면서 광합성 생물은 자신들이 만든 양분을 배고픈 기회주의자들에게 내주었다. 발효 세균의 노폐물은 운동성이 있는 호산성 세균의 먹이가 되었으며, 황산염을 환원하는 세균들의 고약한 숨결은 녹색 클로로비움이나 붉은색 크로마티움 세균들에게 값진 원료를 공급했다. 지구에서 이용 가능한 곳은 모조리 개화된 생산자, 분주한 변혁가, 극한의 개척자들인 세균으로 채워졌다. 자연선택을 받은 자손은 살아남았지만, 그것은 개체군의 동료로부터 플라스미드에 들어있는 유전자를 빌렸을 경우에만 가능했다. 유전자 교환은 분해될 단백질, 유해한 망간 찌꺼기, 산화되거나 환원되어야 하는 위협적인 구리 등 환경의 독소를 제거해야 하는 생물에게 필수 불가결한 것이었다. 유전자를
가장 보잘것없는 생물인 단순한 세균조차 이미 엄청나게 많은 수의 분자들이 연합한 결과이다. 그 모든 조각들이 원시 바다에서 개별적으로 형성되었고, 어느 멋진 날 우연히 만나 갑작스레 그렇게 복잡한 체계를 만들어냈음이 틀림없다. (프랑수와 자콥) 생명은 과거 환경, 과거 화학의 표명이다. 초기 지구의 모습은 생명으로 말미암아 오늘날 지구에 남아 있다. 생명은 시공간이 막으로 둘러싸여 있고 물을 머금고 있는 캡슐이다. 죽음도 생명의 일부다. 죽어가는 물질도 일단 번식하면 복잡한 화학계와 새로운 소산구조가 만들어져 열역학적 평형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다. 생명은 상대적으로 어리석고 무감각해 보이는 우주라는 부모 물질에서 감성과 복잡성을 증가시켜온 결합체다. 생명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흩어져버리는 열의 보편적 경향을 거스르면서 자신을 존속해야만 한다. 이러한 열역학적 관점은 생명의 편향성과 목적성을 설명해준다. 수억 년 동안 생명은 살아남기 위해 내기돈을 올리는 데서 벗어날 수 없었다. 열을 잃고 해체되는 경향이 있는 우주에서 이러한 화학적 보존 패턴이 바로 생명이기 때문이다. 과거를 보존하고 과거와 현재 사이의 차이를 만들면서 생명은 시간을 구속하고 복잡성을 계속 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