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순간 지속되는 사랑. 밤, 그것은 빛의 그림자, 생명, 그것은 죽음의 그림자. (알제논 스윈번) 생명은 지구에 충만한 하나의 태양 현상이다. 생명은 지구 대기와 물, 태양을 세포로 바꾸며, 우주 전체로 볼 때 극히 제한된 곳에서 일어나는 변화다. 생명은 성장과 죽음, 처리와 배제, 변화와 부패가 뒤얽힌 복잡한 패턴이다. 생명은 다윈의 시간을 통해 최초의 세균과 연결되고, 베르나드 스키의 공간을 통해 생물권의 모든 구성원과 연결되는 팽창하고 있는 하나의 조직이다. 신이고 음악이고 탄소이며 에너지로서 생명은 성장하고, 융합하고, 죽어가는 존재들이 소용돌이치는 결합체다. 생명은 피할 수 없는 열역학적 평형의 순간(죽음)을 무한정 앞지르기 위해 자신의 방향을 정할 수 있는 억척스러운 물질이다. 생명은 또한 우주가 인간의 형태로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살아있는 물체를 그토록 다르게 만들기 위해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그 답은 과학적이면서도 역사적이다. 생명은 모방할 수 없는 자신만의 역사다. 일상의 눈으로 보면 “여러분”은 나이가 몇 살이든 태어나기 약 9개월 전에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진화적 관점에서 더 깊숙이 보면 “여러분”은 생명의 대담
동일한 상태에 머물기 위해 변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바로 자기 생산의 핵심이다. 이는 세포뿐만 아니라 생물권에도 적용된다. 종에 적용되면 진화가 일어난다. 그렇다면, 생명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느리게 밀려오는 기묘한 파도처럼 물질 위에 나타나 파도타기를 하는 물질적인 과정이다. 그것은 통제된 예술적 혼돈이며 기절할 만큼 복잡한 일련의 화학 반응으로, 8,000만 년보다 더 전에 표유류의 뇌를 만들었고, 이제 인간의 모습으로 연애 편지를 쓰고, 컴퓨터를 이용하여 우주 탄생 당시 물질의 온도를 계산하기에 이르렀다. 게다가 생명은 바야흐로 가차없이 진화하는 우주에서 자신의 낯설지만 진정한 위치를 처음으로 자각하려는 듯하다. 지구 표면의 국지적인 현상인 생명은 사실상 우주 환경을 함께 생각할 때에만 비로소 이해될 수 있다. 46억 년 전 초신성 폭발의 잔재가 응축하여 지구를 탄생시킨 지 얼마 되지 않아 생명은 별의 구성 물질로부터 생겨났다. 생명은 대기 자원의 감소와 태양으로부터 오는 열의 증가로 인해 지국의 온도 조절 시스템이 마침내 붕괴하여 단 1억 년 안에 끝날지도 모른다. 아니면 생명은, 생태계에 둘러싸인 채 탈출하여 안전한 피난처에서 약 50억 년 후
사람은 저항하는 거다. 저항하는 것이 곧 인간이다. 저항할 줄 모르는 것은 사람이 아니다. 왜 그런가? 사람은 인격이요 생명이기 때문이다. 인격이 무엇인가? 자유하는 것 아닌가? 우선 나는 나다 하는 자아의식을 가지고 나는 나를 위한 것이다 하는 자주하는 의지로서, 내 뜻대로 내 마음껏, 나를 발전시켜 완전에까지 이르자는 것이 인격이다. 저항! 얼마나 좋은 말인가? 모든 말이 다 늙어버려 노망을 하다가 죽게 된다 해도, 아마 이 저항이라는 말만은 새파랗게 살아나고 또 살아나 영원의 젊은이로 남을 것이다. 아마 ‘맨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하던 그 말슴은 바로 이 말 곧 ‘저항’이었을 것이다. 왜 그러냐고? 말씀은 근본이 반항이다. 가슴 속에 갇혀 있지 못해 터지고 나오는 기(氣), 음(陰)한 주머니 속에 자지 못해 소아 나오는 정(精), 맨송맨송한 골통 속에 곯고 있지 못해 날개치고 나오는 신(神), 그것이 곧 말씀이다. 깨끗하다는 동정녀의 탯집도 그냥 있을 수 없어 말구유 안으로하도 박차고 나오는 아들이 곧 말씀이다. 천지창조하려는 ᄒᆞᆫ님 곧 물 위에 운동하셨다는 그 운동은 무슨 운동이었나? 반항운동이었다. 암탉이 알을 까려 품고 앉은 듯한, 무슨 큰일을
세일 없는 세상에서 한번 살아보고 싶다. 세일이 없는 세상은 우선 정직한 세상일 것이다. 30%, 60% 심지어 80%라는 세일 광고를 보았을 때는 온몸에 힘이 빠진다. 재고품을 정리하느라 5%, 10% 정도 값을 싸게 해서 고객에게 서비스하는 것은 소비자에게 고마운 일이다. 그러나 똑같은 물건이 50%나 값이 내려가서 먼저 물건을 산 사람을 바보로 만든다면 그것은 엄연한 횡포다. 처음부터 정당한 가격을 책정해 놓고 그 값을 고수하는 것이 소비자에 대한 상도의이며 예의다. 물건이 너무 많아서 그 물건을 처치하기 곤란할 것 같으면 물건을 조금만 만들든지 아예 만들지 않으면 될 일이다. 넘쳐나서 쓰레기처럼 쌓인 물건들과 그 물건들을 휘젓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사람들도 함께 싸구려 세일이 되어 어느 시궁창으로 둥둥 떠내려가는 것 같아 기분이 몹시 언짢다. 더욱 겁나는 것은 가격파괴니 노마진 세일이라는 새로운 어휘들이다. 어떻게 보면 소비자들을 더욱 현혹하고 부추기는 것 같고 이런 어휘의 범람은 속임수와 거짓의 난장판인 것 같아 현기증이 난다. 값이 싼 물건이 횡재일지 모르지만 그런 물건에 대해서는 애당초부터 어떤 소중한 마음을 간직할 수가 없다. 물건은 어디까지나
여기서 벌어지는 비참한 일들은 결코 말로 설명할 수 없어. 사람들은 큰 막사들 안에서 하수구 안의 수많은 쥐들처럼 살고 있어. ... 지난주 어느 날 밤 포로들을 이송하는 열차가 이곳을 지나갔어. 그들의 마르고 창백한 얼굴. 그토록 피로한 모습은 본 적이 없어.... 이른 아침에 그들은 빈 화물차에 쑤셔 넣어졌고, 그다음에는 열차를 판자로 막는 동안 오래 기다려야 했어, 이제 그들은 동쪽으로 3일 동안 실려 가야 한다. 병자들에게는 바닥에 종이 매트레스를 깔아 주었어. 나머지 사람들은 밀폐된 차량 한 대당 70명가량이 가운데 양동이가 있는 맨 판자 위에서 지내야 해.. 살아서 목적지까지 갈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염려했다. 그리고 내 부모도 그렇게 이송될 채비를 하고 있어. 그런데 말이 옆으로 샜네. 내가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은 이런 거야. 여기서 벌어지는 비참한 일들은 몹시 끔찍하지만, 등 뒤의 심연으로 해가 슬그머니 물러난 늦은 밤에 나는 철조망을 따라 가벼운 발걸음으로 걸을 때가 많아. 그러면 자꾸만 어떤 인식이 가슴으로부터 솟구쳐 올라오지. (있는 그대로의 어떤 근원적인 힘 같은 것이어서 나도 어쩔 수 없어.) 그것은 삶은 장엄하고 숭고하다는 것
“혹시 소식 들었어요? 나는 가야 해요.” 우리는 서로를 오래 바라본다. 그 애는 얼굴이 사라진 것 같고 눈만 남아 뚫어지게 바라본다. 그 다음 고르고 우울한 목소리로 말한다. “참 딱한 일이에요. 그렇지 않나요> 평생 배운 게 모두 쓸모가 없어졌어요.” 그리고 “죽는 게 얼마나 힘든지 몰라요”라고 한다. (최근에 도착한 젊은 여성에 대해) 그녀는 많은 다양한 속옷 세트와 여러 옷을 덧입고 있었다. 이제 그녀는 둔중하고 우스워보인다. 그녀의 얼굴은 얼룩덜룩하다. 그녀는 무방비 상태로 버려진 어린 동물처럼 모든 사람을 은밀하고 머뭇거리는 눈길로 바라본다. 이미 무너지는 상태인 이 젊은 여성이 남자, 여자, 아이들, 아기들과 한데 몰아넣어지고, 가방들이랑 수화물과 한데 섞이고, 가운데 있는 양동이 하나가 유일한 편의시설인 과밀한 화물열차에서 3일 동안 지내면 어떤 모습이 될까? 죽어가는 노인 한 사람이 혼자 쉐마를 읊으면서 실려 가는 걸 본다. ... 떠날 준비가 된 한 아버지가 아내와 자녀를 축복하고, 이어서 눈처럼 흰 턱수염을 한 늙은 랍비에게 축복받는 것을 본다. 수용소장 그의 얼굴은 정말 심중을 파악하기 어렵다. 그것은 이따끔 냉혹함이 슬픔 및 위선
수용소 건물들은 모두 단층이지만, 마치 우리들 가운데 바벨탑이 세워진 것처럼 바이에른과 그로닝겐, 작센과 림뷔르흐, 헤이그와 동 프리슬란트의 다양한 엑센트를 들을 수 있어. 또 폴란드 악센트의 네덜란드어, 네덜란드 악센트의 독일어도 들려, 워터루플라인과 베를린 방언도 들리고. 단지 0.5㎢ 밖에 안 되는 곳에서 이 모든 소리가 들린다. 이 강제수용소에 부족한 것 중 최악은 확실히 공간이 부족한 거야. 급히 만든 거대한 막사들 안을 보면 분명해, 외풍이 심한 널로 만든 격납고 같은 건물 안에 사람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고, 수백 명이 널어놓은 빨래로 이루어진 낮아진 하늘 아래 철제 침대가 3단으로 쌓여 있어. 사람들은 철제 침대 위에서 살고, 죽고, 먹고, 병들고, 밤새 잠들지 못한 채 누워 있기도 해. 우는 애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고, 혹은 어째서 이미 이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보내진 수천 명의 사람들에게서 전혀 소식을 들을 수 없는지 궁금해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야. 대도시의 문화계, 정치계의 유력 인사들도 이 넓은 불모의 황야 위에 좌초했다... 한 번 강력한 격변이 일자 그들이 살던 무대 배경은 모두 허물어졌고, 이제 그들은 베스터보르크라는 바람 쌩쌩
소중한 친구 마리아에게, 오늘 아침 수용소 위에 무지개가 떴고 진흙 웅덩이에서 태양이 빛났어. 병원 막사에 들어갔을 때 어떤 여자들이 나를 불렀어. “좋은 소식이라도 있나요? 유쾌해 보이네요.” 빅토르 엠마누엘*에 대해, 인기 있는 정부에 대해, 그리고 다가오는 평화에 대해 무언가를 말할까 궁리했어. 무지개 때문이라고 그들을 속일 수는 없었어. 그렇지 않니? 설령 내가 유쾌한 유일한 이유가 무지개였더라도 말이야. * 이탈리아 왕 빅토르 엠마누엘 3세(1869-1947)는 1943년 7월 9일 연합군이 시실리에 상륙한 후, 7월 25일 무솔리니를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오늘 아침에도 2500명을 이송하는 열차 한 대가 떠났어. 간신히 부모님을 거기서 제외시켰지만, 상황이 몹시 절망적이야. 소위 영향력을 가진 좋은 친구들이 오늘 아침에 나의 부모님은 다음 주에 이송될 준비를 해야 할 것이고 말했거든. 수용소에서 사람들을 다 빨아내는 거야. 사정이 점점 더 악화되고 있어. 오늘 밤 나는 아기들에게 옷을 입히고 어머니들을 진정시키는 걸 도울 거야. 그게 내가 바랄 수 있는 전부야. 그것 때문에 거의 나 자신을 저주할 뻔했어. 우리는 아프고 무방비 상태인 형제자매
오늘 아침 사람들이 꽉 들어찬 화물열차가 수용소에 들어왔어. 비가 내리고 있었고, 여기저기에 판자들이 부서져 작은 구멍이 나 있더군. 그런데 갑자기 한 구멍을 통해 어머니의 모자와 아버지의 안경과 미사의 창백한 얼굴이 보이는 거야. 나는 소리지르기 시작했고 가족들이 나를 보았어. 지금 우리에게 일어난 일은 대재앙이야. 지난 24시간 동안 유대인들이 연이은 해일처럼 밀려들어와 수용소가 넘쳐나고 있어. 네게 이 말은 꼭 해야겠어. 오늘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미샤 때문에 충격을 받았어. 아버지는 완전히 무기력하고, 만 하루 만에 웃옷의 칼라가 훌쩍 커진 것처럼 보이고, 까칠한 흰 수염이 애처로워. 하지만 우리가 오늘 아침 빗속에서 몇 시간이나 기다리다가 여호수아기에서 놀라운 인용구를 찾아냈을 때 아버지는 작은 성경을 흔들어댔어. 아버지와 어머니는 지금 큰 막사에 있는데, 그곳은 사람들이 빽빽이 들어 찬 인간 창고 같아. 좁은 철제 침상 하나에 세 사람씩 자고, 매트리스도 없고 물건을 둘 곳도 없고, 아이들은 겁먹고 소리를 질러대서 정말 비참한 상태야. 나는 최선을 다해 이런 상황을 헤쳐 나가려 노력할 거고, 더 기운을 내고 용감해질 거야. 이따금 암흑 말고
나는 수용소에 내가 가든 다른 누가 가든 상관없고, 가장 중요한 것은 수많은 사람들이 수용소에 가야만 한다는 사실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말하면 다른 사람들이 흥분할 때가 많다. 그렇다고 내가 체념의 미소를 지은 채 파멸의 품속에 떨어지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다. 전혀 그렇지 않다. 단지 피할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뿐이다. 그리고 그럴때 조차 궁극적으로 그들은 우리에게서 중요한 것을 빼앗을 수 없음을 확실히 알기에 버틸 힘을 얻는다. 나는 결코 피학증 같은 것 때문에 수용소에 가려하거나 지난 몇 년간 내 경험의 기반이었던 소중한 것들에서 분리되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겪어야만 하는 일에서 내가 면제된다고 해서 행복하지는 못할 것이다. 사람들은 나 같은 사람은 살아남아서 해야 할 일이 많고 남에게 줄 것이 많기 때문에 숨어야 할 의무가 있다고 계속 말한다. 하지만 내가 남에게 무엇을 주어야 한다면, 내가 어디에 있든 줄 수 있다는 걸 안다. 친구들과 함께 여기에 있듯 강제수용소에 있든 상관없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과 운명을 함께하기에는 자기가 너무 좋은 사람이라고 여긴다면 그건 순전히 교만일 뿐이다. 그리고 만일 신도 내가 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