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을 견딜 수 있어야 한다. 슬픔이 짓누르는 것 같은 때에도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매우 강하고, 틀림없이 슬픔은 우리의 필수적인 부분이 되기 때문이다. 슬픔으로부터 도망가면 안 되고 어른스럽게 슬픔을 견뎌야 한다. 증오를 통해 슬픔을 줄이려 하지 말고, 모든 독일의 어머니들에게 복수하려 하지도 마라. 그들도 아들이 죽임 당하고 살해당해서 슬픔을 겪는 어머니일 뿐이다. 우리 안에 슬픔을 담기에 마땅한 공간과 안식처를 마련하라. 모든 사람이 슬픔을 정직하고 용감하게 견디면 세상을 가득 채운 슬픔이 누그러질 것이다. 반면에 슬픔이 머물 수 있는 적절한 안식처를 준비하지 않고 내면을 대부분 증오와 복수할 생각으로 채우면, 거리로부터 다른 사람들에게 새로운 슬픔이 생겨날 것이고, 이 세상에서 슬픔이 결코 그치기는커녕 훨씬 더 많아질 것이다. 전쟁은 근원에 있는 인간, 사랑하는 데 실패한 인간, 끔찍한 결과를 맞은 인간, 비탄과 슬픔에 빠진 인간을 나타낸다. 우리가 직시할 수밖에 없는 엄연한 사실을 포기한다면, 즉 엄연한 사실이 우리의 머릿속과 가슴속에 깃들 곳을 마련하여, 그것이 자리 잡고 우리를 분발시킴으로써 우리가 그것을 통해 성장하고 의
“그렇게 많은 (유대인) 동포들이 고통을 겪는 가장 큰 이유는 내면의 준비가 많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에티는 (집단 학살의) 두려움을 직시하고 마음을 가누고 깊고 고요한 중심을 찾는 법을 배웠다. 환상에 빠지려는 유혹에 맞서 투쟁했다. 그리고 상황이 악화되자 피할 수 없다고 여기는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 끊임없이 심리적 연습(mental rehersal)을 했다. 피할 수 없는 것을 예상함으로써 그 힘을 빼앗을 수 있었다. 오늘 진정으로 경험한 것은 티데의 방 한 구석에 있는 목련이었다. 그 신비로운 아름다움에 놀란 나는 그 자리에 뻣뻣이 굳어버렸다. 거의 5분 동안 입을 다물지 못한 채 바닥에 못 박힌 듯이 서 있었다... 그토록 아름다운 것이 거기에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고, 그걸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차마 그 꽃들 곁을 떠날 수 없어서 손가락 끝으로 꽃잎을 아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그리고 티데에게 “매일 네 방에 와서 이 목련을 보면 안 될까?”라고 부탁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젯밤 비를 맞으면서 발에 물집이 잡히도록 먼 길을 걸어 집에 왔다. 그리고 꽃가게를 찾아 길을 조금 돌아가서 큰 장미꽃 다발을 사 왔다. 그리고 그 꽃들이 지금
우리는 영혼으로 숨 쉬며 살아야 한다. ... 생각만으로 산다면 불쌍한 존재에 불과하다. 내면의 세계는 외부 세계만큼 실제이다.... 내면의 세계에도 풍경, 형태, 가능성, 한없이 넓은 지역들이 있다. 나는 일종의 너그러움으로 충만하며, 심지어 나 자신에게도 너그럽다... 그리고 모든 존재와 하나라고 인식한다. 더 이상 이것 아니면 저것을 원하지 않으면, ‘삶’은 위대하고 선하고 매혹적이고 영원하다고 여긴다. 그리고 지나치게 자신에게 연연하고 허둥대고 실수하면 거대하고 영원한 흐름인 삶을 놓친다. 개인적 야망이 모두 사라지고, 지식과 이해에 대한 갈증이 가라앉고, 영원의 작은 조각이 휘몰아치듯 날갯짓하며 내게로 내려오는 것은 바로 그런 순간들이다. 나는 그 순간들이 매우 감사하다. 요즘은 한 잔의 커피도 경외감을 지니고 마셔야 한다. 매일매일이 마지막 날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신이여, 요즘은 걱정이 많은 시기입니다. 오늘 밤 눈앞에 인간이 고통받는 장면들이 꼬리를 물고 떠올라 눈시울이 뜨거워진 채 어둠 속에 누워 있었습니다.... 신이여, 미리 보장할 수는 없지만, 당신을 도와 내 기력이 점점 빠져나가는 걸 멈추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는 명확해지고 있습
자신의 허물을 알고 있는 자만이 남의 허물에 너그럽다. 아들딸들아! 만약 누군가가 너희를 모욕하는 말을 하거든, 아랑곳도 하지 말고 생각도 하지 마라. 그러나 만약 너희가 남을 모욕하는 말을 하였다면 “우리가 못할 말이라도 했단 말이냐? 아무 일도 아니지 않은가? 별것도 아닌 걸 가지고”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양심을 속여서는 안 된다.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말고 자신의 행위를 돌아보며, 너희들 자신의 기도나 친구의 중재에 의해 너희가 모욕한 자와 완전한 화해를 이룰 때까지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된다. (탈무드) 깊은 강은 돌을 던져도 조용하다. 모욕을 당했을 때 몹시 흥분하는 사람의 마음은 강이 아닌 웅덩이다. 우리는 모두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생각하며 겸허하게 살자. 살이 타서 재가 되기 전에 머리에 재를 뒤집어쓰고 참회하자. (사디) 어리석은 사람의 말에 대한 가장 좋은 대답은 침묵이다. 우리가 대답하는 한 마디 한 마디는 반드시 우리에게 되돌아온다. 모욕으로 모욕을 갚는 것은 활활 타오르는 불길에 장작을 던지는 것과 같다. 자신을 모욕한 자에게 평온한 얼굴로 대하는 자는, 그것으로 이미 상대방을 극복한 것이다. 마호메트와 알리는 어느 날 한 남자를 만났는
예술이란 사람들의 마음속에 숨겨져 있던 것이 드러나고, 어렴풋했던 것이 선명해지며, 복잡했던 것이 단순해지고, 우연이었던 것이 필연이 되는 것과 같은, 사람의 마음에 대한 작용을 말한다. 진정한 예술가는 언제나 모든 것을 단순화한다. (아미엘) 보통 사람은 생각을 사물에 맞추지만, 예술가는 사물을 자신의 생각에 맞춘다. 보통 사람은 자연을 불변하는 것, 고정적인 것으로 생각하지만, 예술가는 자연을 움직이고 변화하는 것으로 생각하여 그 위에 자신의 존재를 새긴다. 예술가에 대해서는, 불복종의 세계도 지극히 순종적이 되어 그의 뜻에 따른다. 그는 흙덩이나 돌멩이에 인간성의 옷을 입히고 그것을 이성의 표현으로 탈바꿈시킨다. (에머슨) 경쟁심으로는 어떤 아름다운 것도 만들 수 없고 오만한 마음으로는 어떤 고귀한 것도 만들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라. (존 러스킨) 진정한 학문과 진정한 예술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는 내면적인 것으로, 학문과 예술의 봉사자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희생으로써 자신의 사명을 수행한다는 것이며, 둘째는 외면적인 것으로, 그의 학문과 예술이 모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이다. 학문과 예술은 폐와 심장처럼 서로
진리와 정의를 추구하는 사람은 고독 속에 혼자 있을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베르시에) 납과 같은 본성에서 황금 같은 행동을 이끌어내는 것은 어떠한 정치적 연금술로도 불가능하다. (허버트 스펜서) 만약 사람들이 세계를 구원하는 대신 자기 자신을 구원하고자 하고, 인류를 해방시키는 대신 자기 자신을 해방시키고자 한다면, 그들은 세계를 구하고 인류를 해방하기 위해 참으로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텐데! (게르 센) 사회주의에는 두 종류가 있다. 그리고 둘 다 모든 사람의 최대 행복을 추구한다. 하나는 모든 사람의 행복을 획득하려고 노력하고, 다른 하나는 모든에게 저마다 제 나름대로 행복해질 수 있는 가능성을 주려고 한다. 전자는 국가의 권력을 인정하지만, 후자는 어떠한 권력도 인정하지 않는다. 전자는 국가의 전제를 요구하지만, 후자는 모든 계급의 절멸을 요구한다. 전자는 사회주의적 전쟁을 긍정하지만, 후자는 오직 사회주의의 평화적 방법만을 믿는다. 사회주의에는 이 두 가지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는 어린이의 사회주의, 다른 하나는 어른의 사회주의이다. 전자는 과거의 것이고 후자는 미래의 것이다. 따라서 전자는 후자에게 마땅히 그 자리를 물려주어야 한다
실의란 인간이 자신의 삶 속에서나 세계의 어떤 삶 속에서도 의미를 찾지 못하는 정신 상태를 가리킨다. 실의와 분노 속에 있으면서 그러한 정신상태에 도취하거나, 심지어는 그것을 자랑하기까지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을 태우고 산을 달려 내려가는 말의 고삐를 놓치고도 여전히 채찍질을 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모든 것이 어둡게 보이고 모든 사람이 나쁘게 여겨지고, 아무한테나 욕을 퍼부으며 심술을 부리고 싶어질 때는, 절대로 자기 자신을 믿지 않는 것이 좋다. 그런 때는 자신을 주정꾼을 보듯 바라보며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런 상태가 빨리 지나가기를 기다려야 한다. 그런 상태에 있을 때는 가능한 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빨리 원상태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이다. 그것은 바로 주정꾼이 하룻밤 푹 자고 나면 말짱해지는 것과 같다. 끝없는 불행은 좀처럼 없는 법이다. 절망은 희망 이상으로 사람을 기만한다. (보브나르그) 인간은 행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일 불행하다면 그것은 그 사람 자신의 잘못이다. /주요 출처 : 똘스또이 '인생이란 무엇인가'
우리 주변을 조그만 돌아보면 우리는 혼돈과 무질서의 어딘가에서 허우적대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바로 알 수 있다. 우리는 거대한 질서 속에서 웅장한 생명의 협주곡을 함께 연주하는 중이다. 우리의 몸을 이루는 분자는 이전에 누구의 몸 혹은 자연의 일부였고, 또 앞으로도 누군가의 몸 혹은 자연의 일부가 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몸을 결코 소멸하지 않고, 지구 상의 생명이 계속되는 한 끊임없이 다시 어딘가에서 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내 몸의 분자 단위만이 아니라, 내 몸을 꾸려가는 기본 원리도 살아 있는 세상의 모든 나머지와 함께 같은 원리로 돌아가며 함께 호흡한다. 우리는 진정 우주에 속한 존재이며, 이 귀속감을 깨닫는 일은 우리 삶에 진정한 의미를 일깨우고 그 깊이를 더해준다. (프리초프 카프라) 예수가 당면했던 사회 분위기와 부처가 출현하신 시대, 혹은 당면했던 사회 분위기는 유사한 점이 있습니다. 형식에 치우친 종교적 관행이라든가, 지식층인 성직자 계급이 일반 백성들의 종교적 욕구를 악용하고 왜곡시키는 작태는 엇비슷했지요. 부처님과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그 모든 걸 ‘파괴하려는 것이 아니라 완성시키러’ 오셨고, 광명과 해방의 길이 모든 인간에게
사랑은 인간에게 그의 삶의 목적을 보여주고 이성은 그것을 실천으로 옮기는 방법을 보여 준다. 태양은 온 세상 구석구석 그 빛을 비추고 있어도 그 빛이 다하는 일은 결코 없다. 바로 그와 같이 네 이성의 빛도 모든 방향으로 비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마르는 일이 없이 모든 곳을 비추며, 설사 장애에 부딪히더라도 안달하거나 노여워하지 않고, 오로지 조용히, 그것을 갈망하며 줄기차게 그 빛을 향하는 모든 것을 감싸면서, 다만 제 쪽에서 얼굴을 돌리는 자만을 그늘에 남겨둘 뿐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인간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삼라만상에 비하면 연약한 갈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생각하는 갈대이다. 아주 사소한 것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모든 생물, 모든 지상의 존재보다 고귀하다. 왜냐하면 그는 죽으면서 자기가 죽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연 앞에 자신의 육체가 얼마나 작은지 알고 있다. 그러나 자연은 아무것도 모른다. 우리 인간의 우수성은 그 사고력에 있다. 오직 사고력만이 우리를 다른 세계 위로 높여 준다. 우리의 사고력을 소중하게 지키자. 그것은 우리의 삶을 골고루 비추며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전쟁과 전쟁 준비가 빚어내는 모든 불행은, 전쟁을 변호하기 위해 제시되는 온갖 이유에 대해 너무 클 뿐만 아니라, 그 이유라는 것이 대부분 논의할 가치도 없을 만큼 하찮은 것이고, 또 전쟁 속에 죽어가는 사람들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들뿐이다. 사람들은 묻는다. 여러 문명국들 사이에 아직도 전쟁이 필요한 것인가 하고, 거기에 대해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이미’ 필요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애당초부터 그런 것은 한 번도 필요한 적이 없었다고. 이따끔이 아니라 어떠한 경우에도 전쟁은 언제나 인류의 올바른 역사적 발달을 저해하고 정의를 파괴하며 그 진보를 방해해 왔다. 대중의 희생 위에서 소수자의 권력욕, 명예욕, 물욕, 대중의 맹신, 소수자에 의해 날조되고 유지되고 있는 각종 편견, 이런 것들이 전쟁을 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가스통 모흐) 전쟁만큼 사람들의 행동에서 외부로부터의 조종의 힘, 또는 이성이 아닌 사람들의 소문에 의해 좌우된 결과가 뚜렷이 나타나는 것은 없다. 몇백만 명의 사람들이 그것이 어리석고 추하고 해롭고 위험하며 파괴적이고 고통스럽고 사악하고 아무런 필요도 없는 것임을 스스로 인정하면서도, 기꺼이 자랑으로 여기며 실행하고, 그것이 일어나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