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생명은 시간과 공간 밖에 있다. 그러므로 죽음은 이 세상에서의 생명의 현상을 바꿀 수 있을 뿐, 결코 생명 자체를 멸망시킬 수는 없다. 남을 아는 사람은 지혜롭고 자기 자신을 아는 사람은 밝음이 있다. 남을 이기는 사람은 힘이 있고, 자기 자신을 이기는 사람은 강하다. 죽으면서 자기가 멸망하지 않음을 아는 사람은 영원히 존재를 유지한다. (노자) 나는 현존하는 모든 종교를 믿지 않기 때문에, 내가 무언가의 전승과 교육의 영향에 맹목적으로 따르고 있다고 의심 받을 이유가 없다. 나는 평생동안 내가 할 수 있는 데까지 깊이, 우리의 삶의 법칙에 대해 생각해 왔다. 나는 그것을 인류의 역사와 나 자신의 의식 속에서 탐구한 결과, 다음과 같은 흔들리지 않는 신념에 도달했다. 즉, 죽음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생명은 원래 영원한 것이어야 하며, 늘 그 자리에 있으며 변하지 않는 것이 진정한 생명의 법칙이라는 것, 내 안의 모든 능력과 모든 사상, 모든 요구는 실천을 통해 살려야 한다는 것, 우리 안에는 우리가 세상살이에서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을 훨씬 넘어서는 높은 사상과 동경이 있다는 것, 우리 안에 있는 그러한 동경은 우리의 감성을 통해 그 출처를 확인할
인간의 거의 모든 지식은 노동하는 사람들의 수고를 덜어주는 것이 아니라, 부자들의 게으름을 거들고 그것을 장식하는 데 이용되고 있다. 정신적, 육체적으로 인간의 본성을 배반하는 삶을 살아온 현대인들은, 바로 그러한 삶이 가장 참된 삶이라고 끊임없이 사람들을 설득하려 한다. 현재, 문화라고 불리고 있는 것, 즉 학문, 예술, 온갖 형태의 진보와 발달은 모두 인간의 정신적 욕구를 기만하려는 시도에 지나지 않는다. 어린이가 어른을, 어리석은 자가 지혜로운 자를 지배하는 것이 자연의 법칙에 어긋나듯, 굶주린 군중이 생활필수품도 없어서 쩔쩔매고 있을 때 몇몇 사람들이 사치품에 싫증내는 것은 자연의 법칙에 어긋나는 것이다. (루소) 식인(食人)의 시대에는 강자가 약자를 먹었다. 단적으로 말해 약한 자의 살을 먹었다. 그 뒤 온갖 법률이 정해지고 온갖 학문이 발달했지만, 무자비한 강자는 오늘날까지 여전히 불행하고 힘없는 약자들을 착취해서 살아가고 있다. 그들이 그 살코기를 먹지 않고 그 피를 마시지 않는 것은 사실이지만, 약자를 곤경과 궁핍에 빠뜨리면서 살고 있다는 점에서는 다를 바가 없다. 가혹한 노동으로 몸을 망쳐가면서 한평생 자신과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고생하고 있
진실이 없으면 선은 있을 수 없다. 선량함이 없으면 진리를 전할 수 없다. 선과 진리는 마차의 두 바퀴와 같다. 진리를 아는 자는 진리를 좋아하는 자보다 못하고, 진리를 좋아하는 자는 진리를 즐기는 자보다 못하다. (공자의 지(之)를 진리로 해석함) 덕으로 증오에 보답하라. 모든 일은 아직 쉬워서 더 어려워지기 전에 점검하고 대책을 강구하라. 또 작은 일은 커지기 전에 처리하라. 천하의 가장 어려운 일도 반드시 쉬운 일에서 시작되며, 천하의 큰일도 반드시 작은 일에서 시작된다. (노자) 덕에 이르는 두 길이 있다. 올바를 것, 생명이 있는 것에 악을 행하지 않을 것이 그것이다. 진리를 결코 폭력으로 맞서지 않는다. 그 밝은 빛과 내면의 강인함이 무엇보다 강하게 악을 타파한다. (소로) 모든 악은 나약함에서 생긴다. (루소) 위선보다 나쁜 것은 없다. 위선은 노골적인 악보다 더 불쾌하다. 씨ᄋᆞᆯ 여러분, 길은 오직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참이 길이요 생명이 길입니다. 살자는 것, 스스로 살았다 믿는 것이 사는 길입니다. 믿으면 삽니다. 믿지 않으면 이미 죽었습니다. 참을 하면 반드시 이길 것입니
겸양은 자기만족에 빠진 오만한 자는 결코 알 수 없는 기쁨을 준다. 사람들 사이의 평화는 행복한 삶의 필수 조건이다. 평화에 대한 가장 큰 장애는 오만이다. 오직 겸양만이 - 모욕을 참고 매도를 견디고 오해도 두려워하지 않는 각오만이 - 사람이 자신과 타인의 관계 속에, 또 사람들 사이의 관계 속에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세상이 우리를 질책하고 비난할 때 결코 화를 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 비난 속에 어떤 근거가 있지 않은지 살펴보아야 한다. (흄) 만약 네가 지난 날 성현의 가르침을 무시하고 성현이 산 것처럼 살지 않아서, 자신이 성현의 명예를 얻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해 자존심에 고통을 느낀다면, 그런 것에 대해 미련을 두지 않는 것이 좋다. 네가 성현으로서의 평판을 얻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오히려 좋은 일이다. 또 만일 지금 당장 네 양심이 요구하는 대로 살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오만은 오만뿐만 아니라 인간의 다른 모든 죄악도 옹호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비난을 싫어하고 치료를 거부하기 때문이며, 죄악을 숨기고 그것을 정당화하려 하기 때문이다. 인간을 겸허하게 하는 죄의식은 그의 오만을 부추기는
인간은 모두 노예가 아니면 안 된다. 문제는 누구의 노예가 될 것인가이다. 만약 욕망의 노예라면 말할 것도 없이 인간의 노예가 될 것이고, 정신적 본원의 노예라면 신의 노예가 될 것이다. 기왕이면 높은 주인에게 속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나 너희 곁에 있다’는 예수의 말씀은 매우 사악한 의도로 해석이 되고 있다. 오늘날의 사회적 진보와 발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잘못도 아닌데 기초생활을 꾸려나갈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 있다면, 이는 ‘우리’의 잘못이며 ‘우리’의 치욕이다. 누구든지 주위를 돌아보면 노동자들에게 당연히 주어져야 할 권리와 이익이 보장받지 못하고 있고, 가진 자들의 부정과 불의로 인해 우리 모두가 부유해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헨리 조지) ‘모든 것이 합동하여 선을 이룬다’는 성서의 가르침이 이상하게 작동을 하여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악도 선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잘못된 태도를 낳고 있다. (조헌정) 어떤 사물, 어떤 습관, 어떤 법률이 존중받으면 받을수록, 정말로 그것이 존중할만한 가치가 있는지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현재 생활의 악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 속의 종교적 허위를 버
땅은 사람의 몸과 마찬가지로 사고파는 대상이 될 수 없다. 땅을 사고파는 것은 사람을 사고파는 것과 같은 행위이다. 노예제도의 본질은 남의 노동을 대가도 주지 않고 빼앗을 수 있는 권리를 특정한 사람에게 주는 것이다. 땅의 개인 소유는 노예 소유의 권리와 마찬가지로 특정한 권리를 특정한 사람에게 주는 것이다. 노예 소유자는 자신의 노예에게 그 노동에 의해 얻어지는 것 가운데 그가 사는 데 필요한 만큼은 남겨준다. 그런데 과연 자유국가의 무수한 무산계급 노동자들은 그 필요한 만큼을 받고 있는 것일까? (헨리 조지) 땅은 자연이 인간에게 준 엄숙한 선물이다. 적어도 땅 위에 태어난 사람은 모두 땅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아기에게 어머니의 젖을 물 권리가 있는 것처럼 당연한 권리이다. (마르몽텔) 내가 땅에 태어난 이상, 그것을 갈고 씨를 뿌리는 데 필요한 만큼은 주어져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내 몫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 (에머슨) 남자든 여자든 인간의 몸을 사고팔아서는 안 되며, 영혼은 더더욱 사고팔 수 없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땅과 물과 공기도 매매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러한 것들은 인간의 육체와 영혼을 지탱하는 데 없어서
지나간 일을 후회하지 마라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허위는 회개하라고 한다. 그러나 진실은 오직 사랑하라고 말한다. 모든 추억을 멀리하라. 지나간 일에 대해 얘기하지 마라. 오직 사랑의 빛에 살며 그 밖의 모든 것은 내버려 두어라. (페르시아 격언) 젊을 때 쌓은 지성은 노년기의 악을 미리 예방하는 것과 같다. 만일 당신이 지성을 갖추는 것이 노년기를 위한 양식을 미리 준비해 두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당신이 늙었을 때 영양 결핍이 되지 않기 위해서 당신은 젊었을 때 미리 대비하고 준비하여야 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길은 가까운 곳에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헛되이 먼 곳에서 찾고 있다. 일은 해보면 쉬운 것이다. 시작을 하지 않고 미리 어렵게만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들을 놓쳐버리는 것이다. (맹자) 씨ᄋᆞᆯ은 물입니다. 가는 길이 좁고 험하면 험할수록 아름다운 노래를 부릅니다. 노래는 나만 아니라 남까지도 하나로 싸서 전체에 바치는 향기입니다. 몸을 가졌으니 쾌ㆍ불쾌를 느끼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저 스스럽게 받을 뿐, 나를 거기 팔아서는 안 됩니다. 얻고 피하기에 마음을 쓰게 되면 나를 판 것인데, 나를 잃고는 역사의 주
세상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오락을 중요하지 않은 것, 심지어는 일부 정통을 주장하는 종교인들의 경우와 같이 좋지 않은 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오락은 노동과 마찬가지로 중요한 일이여 노동에 대한 대가이다. 오락을 통해 기분전환을 갖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오락이 좋지 않은 것은 첫째 다른 사람들의 노동을 억지로 하게 하는 경우, 둘째는 오락이 치열한 경쟁으로 바뀌는 경우, 셋째는 오락이 오직 소수자들만을 위한 경우이다. 그리 나쁜 일(나쁜 일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되지만)도 아니고, 피해를 주는 일도 아니며, 오히려 좋은 일을 하고 건전한 오락에 빠져 있을 때도, 어떠한 즐거움이나 일보다 더 중요한 양심이라는 것이 있어서, 양심이 다른 것을 요구하거나 현재 하기 시작한 일을 그만두라고 명령한다면, 우리는 모든 걸 즉시 그만두어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일이나 오락에는 완전히 사람을 사로잡는 성질이 있어서, 선량하고 도덕적인 사람들마저 도의상의 요구에 대해, “나에게는 시간이 없다. 소를 샀으니 부려 보아야 하고, 죽은 아버지를 묻어야 한다.”며 달아난다. “죽은 자는 죽은 자로 하여금 장사지내게 하라”는 예수의 말을 되새길 필요가
행복하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 신의 품에 안기는 것, 구원받는 것, 이러한 것들은 모두 동일한 것이며, 인생의 사명의 완성이자 삶의 목적 그 자체이다. 슬픔이 성장하듯이 행복도 성장한다. 천국의 기쁨이 흔들림 없이 조용하게 영원히 성장하여 더욱 더 깊이 마음에 스며들고 더욱 더 확고한 내 것이 되어가는 것, 그것이 바로 행복이다. 행복에는 한계가 없다. 왜냐하면 신에게는 밑바닥도 없고 벼랑도 없으며, 행복이란 원래 사랑을 통한 신의 정복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감사하는 기쁨이야말로 신에 대한 가장 큰 제물이다. (레싱)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행복의 가능성을 믿어야 한다. 우리에게는 어떠한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다양한 기쁨으로 넘치는 인생의 행복이 주어져 있는데, 인생에는 기쁨이 적다고 불평한다. 우리에게는 영혼과 육체 양쪽을 교류하는 지극히 큰 삶의 기쁨이 주어져 있는데, 왜 인생은 이렇게도 짧은가, 왜 그 끝이 있는가, 더욱 더 계속되면 좋을 텐데 하고 말한다. 만약 우리가 사랑을 통해 영혼과 육체 양쪽의 세계와 교류할 가능성이 주어져 있다고 하는, 인생의 위대한 기쁨을 올바로 이해하고 판단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아무것도 바라지 않게 될 것이다.
우리의 생명은 우리가 자기 자신을 영원하고 무한한 영혼으로, 다시 말해 현상으로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고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물자체(物自體)로서 시공을 초월한 영혼으로 의식하는 데 있다. 몸뚱이는 외물입니다. 정신이 잠깐 머무는 여관입니다. 이 여관이 무너지는데 그 여관을 갖다가 아무개가 묵은 여관이라고 하며 쓰러진 집을 보고 기념한다고 말합니다. 자손을 두는 것도 치장하려는 것입니다. 각주구검(刻舟求劍)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무사가 배를 타고 가다가 칼을 물에 빠트렸는데, 그 칼을 찾으려고 떨어뜨린 뱃전에 표시를 해두었다는 말입니다. 제 무덤을 치장하겠다는 것은 이런 짓과 같습니다. (류영모) 진정한 인간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세상에 아부하는 태도를 버려야 한다. 진정한 삶을 살고 싶은 사람은 세상에서 선으로 인정하는 것에 이끌리지 말고, 진정한 선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자율적인 정신적 탐구욕보다 존엄하고 생산적인 것은 없다. 무엇보다 먼저 인생의 모든 일에 대해 그러한 태도를 갖고 그런 다음에 직면하는 모든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에머슨) 역사는 심판이 동시에 또 예언이다. 미래에 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