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은 그 사람의 도덕과 인품을 말해준다. 혀는 배의 방향을 결정하는 키와 같습니다. 또한 혀는 불과 같습니다. 혀는 우리 몸의 한 부분이지만 온몸을 더럽히고 세상살이의 수레바퀴에 불을 질러 망쳐 버리기도 합니다. (야고보서) 남의 흠이 눈에 띄는 것은 자기 자신의 흠을 잊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남을 비난하면서 자기가 방금 비난한 잘못을 똑같이 저지르기도 한다.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지 않는 자는 쉽게 유혹에 빠지고 남의 악을 모방하게 된다. 남에게 상처를 주는 험담을 퍼뜨려서는 안 된다. 이웃의 결점을 친구에게도 적에게도 얘기해서는 안 된다. 그의 행위 속에 좋지 않은 점이 있음을 알아도 그것을 들춰내서는 안 된다. 남의 험담을 하는 사람이 있거든 될 수 있는 한 말리도록 하라. 재주가 뛰어난 사람이 가장 뿌리치기 힘든 유혹은 친구에 대한 교묘한 비난과 비웃음이다. 교묘한 비난은 썩은 고기에 친 향신료와 같다. 향신료가 없으면 구역질이 나지만 향신료 때문에 모르고 삼키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을 나쁘게 말하고 너를 좋게 말하는 사람들의 말에는 절대로 귀를 기울리지 말라. 자기가 할 말을 미리 생각하지 않고 말을 하게 되는 두 순간이 있다. 하나는
인간의 지적 활동은, 종종 진리를 해명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은폐하는 데 이용되곤 한다. 재판의 목적은 현재의 사회체제를 유지하려는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지적 수준이 높은 사람들 또한 수준 낮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박해하고 처벌한다. 나는 농부들을 사랑한다. 그들은 잘못된 판단을 내릴 만큼 많이 배우지 않았으므로. (몽테뉴) 도대체 왜 그 사람은 종교적, 정치적, 학문적으로 그토록 괴상하고 불합리한 입장을 옹호하는 것일까 하고 참으로 이상하게 여겨질 때가 종종 있지만, 잘 살펴보면 그저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는 호신술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잘 알 수 있다. 사람이 자신의 행위를 복잡한 이론으로 설명하려 할 때는, 그 행위가 나쁜 행위라는 것을 믿어도 된다. 양심의 결정은 항상 간단명료하고 솔직하다. 영혼이 구원 얻기 위해 먼저 도덕적인 인격의 자유로운 사람이 되지 않을 수 없고, 자유의 길을 걷기 위해서는 현실의 발길에 채이는 돌을 우선 치워놓지 않을 수 없다. 목적은 하늘에 있으나 일은 땅에 있다. 땅을 박차지 않고 날아오르는 새는 하나도 없다. 이 의미에서 예수께서 기도를 가르치실 때에 “나라가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죽어가는 자의 말과 태도는 주위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 그러므로 잘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죽는 것은 그에 못지 않게 매우 중요하다. 미련을 버리지 못한 추한 죽음은 잘 살아온 자신의 삶에 상처를 내고, 깨달음을 얻은 의연한 죽음은 이전의 나쁜 삶을 보상해준다. 무대장치가 한 장면에서 다른 장면으로 완전히 바뀔 때, 우리가 그때까지 현실 속의 장면처럼 생각했던 것이 한탙 장치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너는 죽음의 순간,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무대장치였는지 깨닫게 될 것이다. 죽어가는 사람은 살아 있는 사람을 잘 알아보지 못하는데, 그것은 그가 그 순간 이해력을 잃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는 뭔가 다른 것을, 살아 있는 자는 알지 못하고 알 수도 없는 뭔가를 알게 되어, 그것에 영혼이 사로잡혀버렸기 때문이다. 한 인간이 죽는 순간, 그가 그때까지 그 아래에서 불안과 기만과 슬픔과 악으로 가득 찬 책을 읽어 왔던 촛불이, 그 어느 때보다 밝게 타올라 지금까지 어둠 속에 있던 모든 것을 비추어낸 뒤, 이윽고 지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어두워지면서 영원히 꺼지는 것이다. (아미엘) 죽어가는 사람은 어느 정도 이미 영원한 세계에 발을 들여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경험했을(특히 유년 시절에) 다음과 같은 행복한 감정을 알고 있다. 즉 이웃도 부모도 형제도 악인도 원수도 개도 말도 풀도 사랑하고 싶어지는 감정, 오로지 모든 사람이 즐겁고 행복하기를 바라고, 특히 내가 그들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은 감정, 언제나 모든 사람이 즐겁고 기쁘게 살기 위해 자기 자신을, 자신의 생명을 바치고 싶은 감정이다. 그리고 그 감정만이 인간 생명의 원점이다. 선량함은 독자적이고 현실적인 어떤 것이다. 인간 속에 선량함이 있는 만큼 그 속에 생명이 있다. 이 법칙 중의 법칙을 깨닫는 것은, 우리의 마음에 우리가 종교적이라고 부르고 있는, 가장 행복한 감정을 일깨운다. (에머슨) 쾌락주의는 우리를 절망으로 이끌고, 의무에 관한 철학에는 적지 않은 기쁨이 있다. 그러나 구원은 오로지 의무와 행복의 일치 속에, 개인의 의지와 신의 의지의 합일 속에, 또 그 최고의 의지가 사랑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는 신앙 속에 있다. 율법학자 한 사람이 예수께 물었다. “모든 계명 중에 어느 것이 첫째가는 계명입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첫째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느
적은 것에 길들면 길들수록 우리는 가난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절제는 결코 ‘힘의 억제’를 뜻하는 것이 아니며, 또 선의 정지, 사랑과 신앙의 정지를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인간에게 자신이 악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행하지 않도록 억제하는 정신력의 발현이다. (존 러스킨) 연기가 벌을 벌집에서 쫓아내듯 식탐은 정신적인 신의 선물과 지성을 쫓아낸다. (성 바실리) 자기가 원하는 것을 가지는 것은 커다란 행복이다. 그러나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 외에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것은 더 큰 행복이다. (메네뎀) 불나방은 제 몸이 타는 것도 모르고 불 속으로 날아든다. 또 물고기는 위험을 모르고 낚싯대 끝의 미끼를 문다. 그런데 우리 인간도 육체의 쾌락이 불행의 그물로 싸여 있음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놓치려 하지 않는다. 바닥없는 무분별의 늪이란 바로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인도 속담) 우리의 욕망은 언제나 안절부절못하며 어머니에게 이것저것을 늘 조르면서 무엇을 얻어도 만족하지 않는 어린아이와 같다. 들어주면 들어줄수록 더욱 더 귀찮게 한다. (성현의 사상) 어떤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인가? 모든 사람한테서 무엇인가를 배우는 사람이다. 어떤 사람이 강
매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오늘도 단 한사람이라도 기쁘게 해줄 수 있기를 기원하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은 없다. (니체) 선행은 우리의 의무이다. 이것을 자주 실천하면 결국 자신이 선을 베푼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된다. ‘네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는 말은 먼저 이웃을 사랑해야 하고 그런 뒤에 그 사랑의 결과로서 그에게 선을 베풀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우리는 이웃에게 선을 베풀어야 한다. 그러면 우리의 그 행위가 선을 지향하는 그 행위의 결과인 인류에 대한 사랑을 네 가슴속에 일깨워줄 것이다. (칸트) 어느 누구도 선을 행하지 않는 한, 선에 대한 이념을 가질 수 없다. 또 어느 누구도 희생적으로 몇 번이고 선을 행하기 전에는 진실로 선을 사랑할 수 없다. 어느 누구도 끊임없이 선을 행하지 않으면 그 속에서 안정을 찾아낼 수 없다. (마르티노) 비옥 조금만 악일지라도 이웃에게 악을 행했을 때는, 그것을 큰 잘못으로 생각하라. 그러나 남에게 큰 선을 베풀었을 때는, 그것을 보잘 것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남이 너에게 베푼 작은 선은 큰 은혜로 생각하라. 신의 축복은 가난한 사람을 돕고 베푸는 자에게 내린다. 그때 가난한 사람을 친절하게 맞이하고 친절
자신의 영혼을 정화하고 의심에서 해방된 사람들에게 하늘은 땅보다 가깝다. 육체의 모든 감각으로 얻을 수 있는 모든 지식을 가지고 있다 해도, 만약 그들이 사물의 참다운 본질을 모른다면 그 지식 속에서 아무런 유익함도 차지 못할 것이다. 온갖 사물에 대한 참다운 지식은, 그 속에 사물 자체로서의 참다운 본질이 숨어 있음을 스스로 깨닫는 것이다. (인도의 쿠랄) 인간은 강한 존재이며, 자기 내부에 있는 영혼의 힘을 아는 자, 자기 밖에서 힘을 찾을 때는 무력한 존재가 되어 버린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자신의 육체와 영혼을 통제함으로써 진정한 지배자가 되어, 한눈팔지 않고 전진해 목표를 달성한다. 그는 자신의 두 발로 힘차게 서 있기 때문에 당연히 땅바닥에 쓰러진 자보다 강한 사람이 된다. (에머슨) 어떻게 신을 알고 있느냐고 묻거든 신이 내 마음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하라. 만일 그렇지 않다면 인간은 완전히 구원받을 수 없는 존재가 되고 만다. 이 시공을 초월한 존재자를 육체의 눈이 아니라 마음의 눈으로 보라. 자기 자신을 모르는 자가 어찌 신을 알 수 있겠는가? 진정으로 자신을 아는 것이 바로 신을 아는 것이다. (페르시아 금언) 사람들은 장사를 하고,
성 프란체스코의 말에 따르면 완전한 기쁨은, 부당한 비난을 받고 거기에서 오는 육체적 고통을 견뎌내며, 그 비난과 고통을 가져다 준 자에게 적의를 품지 않는 데에 있다. 그런 완전한 기쁨은 사람들의 악도 자기 자신의 육체적 고통도 결코 파괴할 수 없는 진정한 신앙과 사랑의 의식 속에 있다. 너희는 일부러 남들이 보는 앞에서 선행을 하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그렇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어버이로부터 아무 상도 받지 못한다. 자선을 베풀 때에는 위선자들이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듯이 나팔을 불지 말라. 나는 분명히 말한다. 그들은 이미 받을 상을 다 받았다. (예수) 선행 때문에 비난을 받아도 슬퍼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기뻐하는 것은 그 무엇보다 숭고하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사람들이 알아주거나 이해해주지 않더라도, 그것을 슬퍼하지 않는 것,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덕이 있는 사람의 특징이다. (중국 금언) 사람을 만날 때, 그들로부터 인정과 칭찬이 아니라, 자신을 단련하고 자신의 오만함을 없애기 위해, 오히려 매도와 굴욕과 억울한 모함을 기대하는 습관을 길러라./ 주요 출처 : 똘스또이 '인생이란 무엇인가'
우리의 영혼에는 신성이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이 깨달음은 나에게 믿음과 용기와 희망을 준다. 영혼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어느 누구도 영혼보다 위대할 수는 없다. 무서워하고 싶은 자는 무서워하라. 영혼은 자기 본원의 나라에 살며 공간을 초월하고 시간을 초월한다. (에머슨) 신은 모든 사람들 속에 살고 있지만 모든 사람이 신 속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 사람들의 고뇌의 원인이 있다. 불이 없으면 등잔을 켤 수 없듯 신 없이 인간은 살 수 없다. (바라문의 가르침)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내 것이다. 창조도 파괴도 내 생각에 따라 일어난다. 세상은 다만 껍데기일 뿐이고 그 핵심은 바로 나다. 그런 내가 티끌이 티끌로 돌아가는 것을 어찌 두려워할 필요가 있으랴. 나는 티끌이 아니다. 그러니 신에게 복종하며 편안하게 이 세상에서 살라. (페르시아 금언) 전체를 건지시려는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자기가 영이신 것같이 인간과 만물을 영으로 변화케 하잔 것이 그 목적입니다. 그러므로 순종하는 어느 한 사람을 들어 그 고난의 짐을 지게 하십니다. 사람은 이미 죽음을 이긴 사람이므로 죽어도 죽는 것이 아닙니다. 저기 있는 저들은 죽음의 종노릇하는 것들입니
사람은 저마다 자기 자신을 위해 삶과 죽음의 의의에 관한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영혼은 배우지 않는다. 다만 원래 알고 있던 것을 떠올림 따름이다. (다우드 엘) 현자는 언제나 만물 가운데서 도움을 발견한다. 왜냐하면 그에게 주어진 재능의 본질은 모든 사물 가운데서 선을 이끌어 내는 데 있기 때문이다. (존 러스킨) 정치적 승리, 수입의 증가, 너희 가운데의 병자의 회복, 멀리 갔던 벗의 귀가 같은 행운은 너희의 마음을 설레게 하고 너희에게 드디어 좋은 날이 온 것이라고 생각하게 한다. 그러나 그것을 믿어서는 안 된다. 너희 자신 외에 너희에게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에머슨) 인생의 사명이라는 문제에 대한 해답을 바깥 세계에서 찾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다. 너희의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은 너희 자신의 마음에 있다. 그러나 그것은 싹의 상태로 있으니, 너희는 선한 생활로 그 해답의 싹을 틔우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만이 예지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다. (류시 말로리) 벗을 찾아 헤매는 자는 가련하다. 왜냐하면 참으로 충실한 벗은 자신뿐이며, 밖에서 벗을 찾는 자는 자기 자신에게 참으로 충실한 벗일 수 없기 때문이다. (소로) 누가 가르쳐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