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죽음을 향한 끊임없는 접근이다. 따라서 삶은 죽음이 더 이상 어둠으로 생각되지 않을 때 비로소 행복한 것이 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쇠사슬에 묶여 있는 광경을 상상해 보라. 그들은 모두 사형선고를 받고 있고, 날마다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이 눈앞에서 죽어 가고 있다. 이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에게는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는 운명이 보일 것이다. 이런 상황에 있을 때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과연 서로 때리고 괴롭히고 죽이고 해도 되는 것일까? 아무리 흉악한 강도들도 이런 상태에서는 서로 악을 행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모두 그러한 상태에 놓여 있다. 그런데도 그들은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인가? (파스칼) 우리는 중요한 지위에 있는 사람이 갑자기 쓰러져 이내 죽어가는 것을 보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이 매일 조금씩 소모되고 쇠약해지는 것을 알고, 언젠가 결국 죽어버리는 것을 보기도 한다. 이러한 충격적인 사건이 어느 누구의 관심도 끌지 못하고 어느 누구의 마음도 움직이지 못한 채 끝난다. 사람들은 그런 사람에 대해 꽃이 시들거나 잎이 떨어지는 것을 볼 때만큼의 관심도 기울이지 않는다. 단지 그
완전성에 대한 관념을 가지지 않는 사람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 만족하고 현실과 다투지 않으며, 그 현실이 그대로 정의이고 행복이며 아름다움이라고 믿고 있다. 그런 사람에게는 아무런 진보도 없고 생명도 없다. (아미엘) 개인의 경우나 집단의 경우나 모두 마찬가지이지만, 완전성을 향한 추진력은 그 개인과 집단이 현재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가질 수 있는 것에 대한 관념이다. (마르티노) “하늘에 계시는 ᄒᆞᆫ님처럼 너희도 완전하라.” 신의 완전성, 즉 모든 사람의 최고선에 대한 이념이야말로 전 인류가 지향하는 궁극의 목표이다. 해안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헤엄치고 있는 사람에게는 저 언덕, 저 곶, 저 해안을 따라 헤엄치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항해하고 있는 사람에게 지침이 될 수 있는 것은 오직 아득한 별과 나침반뿐이다. 아무리 타락한 사람이라도 항상 자신이 지향해야 하는 완전성만은 볼 수 있을 것이다. 신앙은 힘이다. 말이 아니다. 생각이 아니다. 사상이 아니다. 지식이 아니다. 이론도 아니고 학설도 아니다. 술(術)도 아니요 방편도 아니다. 신앙은 힘이다. 살리는 힘이다. 말로써 영혼을 구원하였다는 일을
자신의 영혼과 세속적인 행복을 동시에 돌볼 수는 없다. 세속적인 행복을 바라거든 영혼을 거부하라. 만약 자신의 영혼을 지키고 싶거든 세속적인 행복을 부정하라. 그렇지 않으면 너는 분열만 되풀이하다 결국 하나도 얻지 못할 것이다. (에픽테토스) 사람은 선택에 따라 두 종류의 삶을 살 수 있다. 진실한 내면적인 삶과 허위의 외면적인 삶이다. 내면적인 삶은 사람이 단순히 외적인 자극과 겉모습만으로 살지 않고 모든 것 안에서 피안을, 즉 신을 보며, 자신의 생명이 자신의 만족을 위해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님을 알고 신의 이름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재능을 실천적으로 발휘하여 그것을 흙 속에 묻힌 채 두지 않는 것을 말한다. (고골리) 의무의 감정은 우리로 하여금 물질적 세계의 현실성을 느끼게 하고, 그 생활에 참여케 하지만, 동시에 우리를 그 세계에서 떼어놓고 우리에게 그 비현실성을 드러내 보여준다. (아미엘) 눈에 보이지 않고 손으로 만져지지도 않는 정신적인 것, 우리가 자신의 내부에서 자기 자신으로 의식하는 것, 오직 그것만이 현실이다. 눈에 보이고 손에 만져지는 것은 모두 우리의 감각기관이 만든 것이며 따라서 환영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내 사상을 여러 사람에게 전
선량함이 따르는 겸손처럼 사람의 마음을 끄는 것은 없다. 그러나 그것은 스스로 찾는 것이며, 전시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강과 바다가 저들이 흘러내리는 골짜기를 지배하는 것은 강과 바다가 골짜기보다 낮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인은 만약 사람들보다 높아지기를 바란다면 사람들보다 낮게 있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사람들보다 앞장서고 싶다면 그들 뒤에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하여 성인은 설사 사람들보다 높이 있어도 사람들은 그것을 느끼지 못하며, 사람들 앞에 서 있어도 사람들은 그것을 보지 못하니, 그것으로 괴로워하지 않는다. 성인은 누구하고도 말다툼을 하지 않고 세상의 어느 누구도 그와 시비를 벌이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은 끊임없이 그를 기다리는 것이다. (노자) 제자들이 누구를 제일 높게 볼 것이냐는 문제로 옥신각신하는 것을 보고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세상의 왕들은 강제로 백성을 다스린다. 권력을 휘두르는 사람들은 백성의 은인으로 행세한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높은 사람은 낮은 사람처럼 처신해야 하고 지배하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처럼 처신해야 한다. 식탁에 앉은 사람과 심부름하는 사람 중에 누가 높은 사람이냐? 나는 심
동물에 대한 연민은 우리에게 지극히 자연스러운 감정인데, 세상의 온갖 관습과 암시의 힘에 의해 우리는 동물의 고통과 죽음에 대해 냉혹하고 무자비해지고 있다. 동물에 대한 연민은 선량한 인격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어서, 동물에게 잔인한 자는 결코 선량한 인간이 아니라고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다. (쇼펜하우어) 신을 두려워하라. 그리고 동물을 학대하지 말라. 기꺼이 일해 주는 동안에는 그들을 부리고, 지치면 쉬게 해주며, 말 못하는 그들에게 충분히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어라. (마호메트) 육식은 동물을 죽이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동물을 죽이는 것은 행복으로 가는 길을 가로막는다. 인간들이여, 육식을 삼가라. (바라문 법전) 인간이 동물들보다 위에 서는 까닭은, 우리가 동물을 냉혹하게 괴롭힐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동물을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부처) 아이들로 하여금 벌레를 죽이지 못하게 하라. 무서운 살인의 시작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피타고라스) 동물에 대한 연민의 정이 우리에게 주는 기쁨은, 사냥과 육식을 끊음으로써 잃는 만족을 보상하고도 남는다. 인간이 신의 형상을 닮았다는 말은 신을 대신하여 모든 생명들을 잘 보살피라는 말이다.
교육의 기초는 삶의 의의와 그 사명을 명백히 하는 일이 아니면 안 된다. 사람들은 법정에서의 거짓말을 범죄로 생각하고, 같은 성인들끼리 잘못된 말을 하는 것을 한심한 일로 생각하지만, 어린이들에 대해서는 아무리 허황된 말을 지껄이고 아무리 거짓말을 하여도 잘못이 아니며 오히려 필요한 일처럼 생각하고 있다. 이 얼마나 잘못된 생각인가? 인생의 의의와 사명에 대해 설명하는 종교상의 가르침은, 천년 전의 사람들에게는 만족을 주었지만 현대인들은 만족시키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어린이들에게 천년 전의 사람들에게 가르쳤던 것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실정이다. 이것은 무서운 잘못이다. “어린이를 교육할 때, 아직 확실히 밝혀지지 않는 것은, 어린이들에게도 모르는 것으로 가르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리히텐베르크) 이 말은 흔히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듯, 어린이들에게 의심스러운 미신을 제법 근거가 있는 것처럼 믿게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그렇게 하면 어린이들은 애매하고 어중간한 논거에 만족하는 버릇이 생겨서, 모르는 것도 아는 척하게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어린이를 교육할 때 그들을 지나치게 힘들게 하는 것은 생각해볼 문제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아직 인간
사람들이 자신의 사명과 행복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든, 학문은 바로 그 사명과 행복에 대해 배우는 것이다. 자혜로운 사람은 스스로 알기 위해 배우고 어리석은 사람은 남에게 알려지기 위해 배운다. (동양 금언) 인간은 자신의 힘이 허락하는 한, 또 사정이 허락하는 한, 자신과 이웃의 행복을 위해서 살고 있다. 그래서 자신의 궁극적인 목적에 더 빨리 도달하기 위해서 그는 앞서간 사람들의 경험을 이용하고 배운다. 이러한 목적의식이 없이 남이 한 말을 그대로 말하는 학문은 가장 저급한 학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도서목록을 책이라고 부를 수 없듯 그런 사람을 진정한 학자라고 부를 수 없다. 진정한 사람은 앞서간 선배들의 학문을 배울 뿐만이 아니라 그와 같은 일을 뒤에 오는 사람들을 위해서 실제로 행하는 사람이다. (리히텐베르크) 종종 미신이 오히려 진리와 더 가깝고 학문이 진리와 더 멀 때도 있다. (소로) 이른바 학문이니 예술이니 하는 것 중의 많은 것들이 쓸데없는 지식과 감정의 소산이며 또 그러한 쓸데없는 자식과 감정에 아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현대의 학문과 예술은 일반 대중에게는 종잡을 수 없는 것으로 별 관계가 없다. 일반 대중의 행복에는 아무 관심
인생의 목적을 정신적 완성에 두는 사람은 어떠한 외적 사건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남자다움은 오직 용맹함 속에만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최고의 남자다움은 분노를 이기고 자신에게 악을 행한 자를 사랑하는 데 있다. (페르시아의 격언) 내가 어두운 데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서 말하고, 귀에 대고 속삭이는 말을 지붕 위에서 외쳐라. 그리고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영혼과 육신을 아울러 지옥에 던져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예수) 옳은 것을 알면서 실천하지 않는 것은 용기가 없는 것이다. (공자) 어떠한 불행도 그것에 대한 공포보다 무섭지 않다. (호케) 만일 무언가가 두렵거든 네 두려움의 원인이 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네 속에 있음을 알라. 강자란 것은 제 살 생각만 하는 것입니다. 전체를 떠나 저란 것이 없는데, 제 생각만 하기 때문에 생명의 부드러운 기운이 거기 가지 않습니다. 강하다는 것은 사실은 하나의 벌인데 사랑의 진리를 무시한 마음은 그건 줄은 모르고 그것을 점점 더 잘난 것으로 알고 더 교만해집니다. 그래서 모든 강자는 반드시 망했습니다. 그리고 역사의 주인은 부드러운 씨ᄋᆞᆯ이 됩니다.
인간이 만약 사후에도 자신의 생명이 불멸이라는 것을 믿는다면, 모든 병은 오직 하나의 생활에서 다른 생활로 옮겨가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병상에 있는 동안 우리는 우리 몸에 일어나고 있는 일의 의미를 이해하고, 다가올 새로운 상황에 대한 준비를 하여야 한다. 우리는 보통 신에게 봉사하고 사람들에게 유익한 존재가 되려면 건강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그건 틀린 생각이다.! 오히려 그 반대인 경우가 많다. 예수가 신과 인류에 최대의 봉사를 한 것은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기 직전 자기를 죽이려 한 사람들을 용서한 그 순간이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병을 앓고 있는 사람도 그것이 가능하다. 잘못된 의술은 환자의 목숨을 연장하는 것만 목적으로 하여, 그들로 하여금 죽음을 피하는 것에 대한 기대를 품게 하고 죽음에 대한 생각을 뿌리치게 한다. 이는 그들로부터 도덕적인 생활로 나아갈 수 있는 기회를 빼앗는 것이다. 중병을 앓고 있는 사람을 대할 때,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죽음의 접근을 그의 눈에서 가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그 자신 속의 결코 나약해지지도 죽지도 않고 항상 성장을 멈추지 않는 신의 자녀로서의 본질을 의식하게 하는
의심할 여지없는 행복의 조건은 노동이다. 그 첫째는 자기가 좋아하는 자유로운 노동이며, 둘째는 식욕을 돋우고 깊고 고요한 잠을 자게 해주는 육체노동이다. 세상 번뇌가 없는 낙원같은 생활이나 동경해 마지않는 호화로운 생활이 매력적인 것은 틀림없지만, 둘 다 어리석고 부자연스럽다. 왜냐하면 쾌락만 있는 곳에는 결코 진정한 쾌락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어쩌다가 틈틈이 찾아오는 짧은 휴식만이 진정으로 즐겁고 또 유익하다. (칸트) 육체노동은 지적인 활동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적 활동의 질을 향상시키고 이를 자극하고 촉진시킨다. 지적인 활동과 상상력의 활동은 둘 다 특수한 활동으로, 그 천직이 주어진 자에게만 의무이고 행복이다. 그것이 그 사람의 천직인지 아닌지는 학자이든 예술가이든 거기에 몸을 바치기 위해 자신의 평화와 안녕을 얼마나 희생하는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영원한 게으름은 지옥의 고통으로 생각해야 하거늘, 사람들은 반대로 천국의 기쁨으로 생각하고 있다. (몽테뉴) 가장 평범한 노동에 있어서도, 인간의 영혼은 그가 일을 시작하자마자 차분히 가라앉는다. 의혹, 비애, 상심, 분노, 절망...... 가난한 자도 남들처럼 이런 모든 악령에 시달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