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은 어느 시대에나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변화는 신앙(신념)의 변화이다. 벼랑 끝에 서 있는 주정꾼이, 위험하다고 소리치는 사람들을 향해 비웃으면서 횡설수설하는 것처럼, 온갖 물질욕망에 사로잡힌 현대인들은 비참한 운명에서 자신을 구하고자 하는 선각자들을 비웃고 있다. (류시 말로리) 과거 예언자들은 외쳤다. “너희는 신을 잊고 신의 뜻을 실천하는 일에서 벗어났다. 그렇지 않았다면 불행이 너희를 덮치지 않았을 것이다. 너희는 신의 뜻을 따르지 않았고 허위와 기만의 세속에 빠져 진리를 외면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자연의 인내력도 한계에 다다랐다.” 이는 아직 세상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은 사람들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말이다. 그러나 요즘 자연을 수천 년 전에 발명된 태엽시계 비슷한 고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 시계는 지금도 여전히 째깍거리면서 가지만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떠한 충고와 비난도 무용지물이다. 그러나 다행히 모든 사람이 다 그런 것은 아니어서, 만약 인간의 삶이 불행하다면 그 죄는 오직 인간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도 있다. (칼라일) 인류는 영원
“어떻게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까?” 하고 묻자 현자는 대답했다. “해를 보는데 과연 등불이 필요할까?” (아라비아 잠언) 신을 알고 있는 사람에는 두 종류가 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과 진정으로 현명한 사람들이다. 오만한 사람과 어설프게 현명한 사람들만이 신을 모른다. (파스칼) 아무리 신을 믿고 있어도, 가끔 그 존재를 의심하는 순간에 부딪히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의심의 순간은 나쁜 것이 아니며, 오히려 우리를 신에 대한 한층 더 높은 차원의 이해로 이끌어준다.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신은 완전히 진부해져버려서, 이젠 신을 믿고 있다고 말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우리가 진정으로 신을 믿는 것은 신이 우리에게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날 때뿐이며, 신은 우리가 온 마음으로 구하면 그 새로운 모습을 우리에게 계시한다. 그리고 그 모습은 무한하다. 어떤 사물이든 가까이 가보면 잘 알 수 있듯, 신을 아는 것도 신에게 가까이 갔을 때뿐이다. 신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것은 오직 선행에 의해서만, 즉 신의 뜻을 실천하는 것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신을 잘 알면 알수록 우리는 더욱 더 기꺼이 신의 뜻을 실천한다. 그리고 신의 뜻을
땅은 공기나 태양과 마찬가지로 만인의 소유이며 결코 개인의 사유물이 될 수 없다. 땅을 사유화하는 것은 타인의 자연 상속권을 빼앗는 범죄행위이다. (토마스 페인) 우리는 모두 이 세상의 나그네이다. 동서남북 어디로 가든 발길 닿는 곳마다 반드시 “이곳은 내 땅이다”라고 말하며 너를 내쫓는 사람을 만날 것이다. 결국 우리는 이 세상 모든 곳을 돌아다닌 끝에, 세상 어디에도 우리의 아내가 자식을 낳을 수 있는 한 조각의 땅과 우리가 걸음을 멈추고 경작할 수 있는 한 뙈기의 땅과 우리의 아이들이 우리의 뼈를 묻을 수 있는 한 뼘의 땅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돌아오게 될 것이다. (라프네) 오늘날 누군가에게 이제부터 너는 자유로운 인간이다. 마음껏 일하여 스스로 번 것을 마음대로 사용해도 좋다고 말하는 것은 그 사람을 대서양 한가운데 내던지고 너는 마음대로 헤엄쳐서 해안으로 갈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악랄한 짓이다. 영국에는 현재의 인구보다 열 배나 많은 사람들을 먹여 살릴 수 있는 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형제인 동포들에게 구걸을 하거나 가혹한 날품팔이는 강요당하면서 도둑질을 하지 않으면 굶어 죽거나 지상에서 살 가치가 없는 인간으
살기 힘들다 해서 죽기를 바라서는 안 된다. 도덕적인 사람은 자신에게 지워진 무거운 짐을 벗기 위해 자신의 사명을 오로지 실천한다. 자신의 사명을 다했을 때 비로소 그 짐에서 해방될 수 있다. (에머슨) 현재의 삶만이 진정한 삶이다. 과거는 이미 없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현재의 순간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러므로 현재의 이 순간을 잘 사는 것, 오직 그것에만 온 정신을 쏟아 노력하라. 내세를 위해 현세를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사람이 있어도 믿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삶, 실제로 살고 있는 삶은 현재의 이 삶뿐이다. 따라서 이 삶을, 이 삶의 한 순간 한 순간을 가능한 한 잘 사는 것에 온 힘을 기울여야 한다. 인생은 고뇌도 아니고 쾌락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끝까지 성실하게 수행해야 할 사명이다. (토크빌) 너는 아무리 노력해도 마음먹은 대로 잘 되지 않아, 뭔가 다른 생활이라면 더 쉽게 할 수 있을 텐데 하며 괴로워한다. 그러나 그 생활 속에서, 네가 현재 놓여 있는 조건 속에서, 너는 언제나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다는 진리를 알아야 한다. (칼라일) 사람들 속에서 세속적인 목적을 위해 사는 자에게도, 혼자서 정신적인 목적을 위
남에 대한 평가는 언제나 정확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내부에서 일어난, 그리고 일어나고 있는 일은 아무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주 남을 평가하며, 어떤 사람은 착한 사람이라 하고 어떤 사람은 나쁜 사람이라고 하며, 또 어떤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 어떤 사람은 현명한 사람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사실을 그렇게 불러서는 안 된다. 인간은 강물처럼 흘러가고 있다. 내일의 그는 이미 오늘의 그가 아니다. 어리석었던 사람이 현명해지고, 나쁜 사람이 착한 사람이 되며, 또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그러므로 인간을 심판할 수는 없다. 심판하는 순간 그 사람은 이미 변해있을 테니까. 만약 네가 자신의 단점을 알고 그것을 고치려고 노력한다면, 남을 비난한다든가 하는 생각은 전혀 머리에 떠오르지 않을 것이고 또 그럴 겨를도 없을 것이다. 상대의 가죽 신발을 신고 보름을 걸어보지 않고서는 그에 대해 얘기하지 말라. (아메리카 인디언 속담) 남의 잘못은 용서하고 자신에게는 아무것도 용서하지 말라. (푸블리우스 시루스) 나는 악을 행하는 것을 원하지 않지만, 만약 행하는 경우에는 그것을 도저히 자제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다른 사람들도 역시 자제
인류 사회의 진보와 향상을 위한 진지한 첫걸음마다, 거기에는 반드시 그 주된 원인으로서 신앙의 역할이 있었다. 그러므로 신앙에 기초하지 않은 모든 가르침은 사회의 개선에 언제나 무력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 가르침이 훌륭한 방식을 만들어내는 것은 가능할지 모르지만, 그러한 방식에는 프로메테우스가 하늘에서 훔친 불꽃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마치니)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자연스럽고 건강한 사회 기구를 위한 첫걸음은 언제나, 땅에 대한 당연하고 평등하며 빼앗을 수 없는 모든 사람들의 권리를 보장하는 데 있다. 물론 그것이 전부라는 얘기는 아니지만, 그럼으로써 그 밖의 모든 것이 한결 수월해진다. 그 보장이 없는 한 다른 모든 것은 아무런 이익도 가져다주지 않을 것이다. (헨리 조지) 사회는 공통의 신앙과 공통의 목적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사회적인 활동은 종교에 의해서 성립된 원칙을 실생활에 적용하는 것이다. (마치니) 사람들이 그리스도교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책임이다. 어쩌면 “옛 성인들에게서 배우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
현대과학의 가장 큰 해악은, 어차피 ‘모든 것’을 연구하지는 못하고 종교의 도움 없이는 ‘무엇을 연구해야 할지’도 모르는 채 올바르지 않은 생활을 보내고 있는 과학자가, 자신에게 ‘좋고 필요한 것’만 연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에게 가장 ‘좋은’ 것은 공허한 지식욕의 만족이고,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그들에게 유리한 현재의 체제이다. 많은 것을 아는 것이 예지는 아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다 알 수는 없다. 예지는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것을 아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것이 가장 필요한 지식이고 어떠한 것이 덜 중요한 지식임을 아는 것이다.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지식은 어떻게 해야 잘 살 수 있는가, 즉 어떻게 해야 악을 적게 행하고 선을 많이 행하며 살 수 있는가에 관한 지식이다. 현대인들은 필요 없는 온갖 학문은 연구하면서, 정작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배우려 하지 않는다. 인간으로서 무엇이 가장 큰 불손일까? 우리 인간이 모르는 것은 신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깔뱅) 지식이 적은 사람은 말이 많다. 지식이 풍부한 사람은 대개 침묵하고 있다. 그것은 흔히 지식이 적은 사람은 자기가 아는 것을 모두 중요하게 생각하여 그것을 모든 사람들에
어떤 사람이 죽어서 그 영혼이 하늘나라에 이르자, 그 앞에 온몸이 고름투성이에 추악하고 더럽고 소름이 끼치는 여자가 나타났다. “너는 도대체 누군데 내 앞에 나타나 내 길을 막느냐?” “나는 너의 행실이다.” (페르시아 속담) 중요한 것은 선한 행실에 대한 탁상공론이 아니라 실천이다. (탈무드) 착한 일을 하고, 자비롭고, 온화하고 겸손하며, 좋은 말을 하고, 선한 일을 생각하고, 깨끗한 마음을 지니고, 항상 배우며, 항상 진실을 말하고, 분노를 억제하고, 만족을 알고 인내심이 강하며, 친절하고, 웃어른을 공경하고, 부모와 스승을 존경하는 사람, 이들은 모두 선인의 벗이요 악인들의 적이다. 거짓을 말하고, 훔치고, 음란하고, 속이고 욕하고, 악한 일을 생각하고, 오만하고 게으르며, 이웃을 중상하고, 인색하고 무례하며, 파렴치하고, 화를 잘 내고, 남의 것을 가로채며, 복수심이 강하고, 고집이 세고, 질투심이 강하며, 미신에 빠지는 사람, 이들은 모두 악인의 벗이요, 선인들의 적이다. (페르시아의 교리문답서)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미루지 말라. 왜냐하면 죽음은 네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다 마쳤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불쑥 찾아오기 때문이다. 네가 이 세상
인간은 생각한다. 생각하도록 만들어져 있다. 그런데 그 생각은 합리적이야 하는 것이 분명하다.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무엇보다 먼저 자신이 어떤 목적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를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의 영혼에 대해, 신에 대해 생각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한번 살펴보라. 그저 닥치는 대로 잡다한 생각을 하지만, 자신의 영혼과 신에 대한 생각만은 하려들지 않는다. 그들은 춤에 대해, 음악에 대해, 노래에 대해 생각하고, 건축에 대해, 부에 대해, 권력에 대해 생각한다. 그러면서 부자와 권력자들을 부러워한다. 그러나 대체 인간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파스칼) 인간의 중요한 의무 중의 하나는, 우리가 원래 하늘로부터 받은 이성의 빛을 최대한 빛나게 하는 데에 있다. (중국의 지혜) 진정한 인간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세상에 아부하는 태도를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진정한 삶을 살고 싶은 사람은 세상에서 말하는 가치에 이끌리지 말고, 진정한 가치란 무엇인가, 그것은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을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자율적인 정신적 탐구욕보다 존엄하고 생산적인 것은 없다. 무엇보다 먼저, 인생의 모든 일
생명이 있는 것은 모두 자신의 목숨을 소중히 하여 죽음을 두려워한다. 그들을 죽이거나 괴롭혀서 죽음에 이르게 하지 말라. 살아 있는 모든 것 속에 너 자신이 깃들어 살고 있음을 알라. (부처) 자연은 우리를 같은 재료로 같은 목적을 위해 이 세상에 내보냄으로써, 우리를 형제로 만들었다. 자연은 우리 속에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을 불어넣고, 우리를 친구로 만들었다. 또한 자연은 우리에게 정의를 실천하도록 만들었다. 자연은 남을 돕기 위해 우리의 손은 내밀어져 있도록 만들었다. 우리의 하나됨은 수많은 돌로 지은 돔과 같은 것이다. 만약 돌들이 서로에게 기대지 않는다면 돔은 이내 허물어지고 말 것이다. (세네카) 나는 인간과의 일체감을 똑똑히 의식하고 느낀다. 또 그러한 일체감은 비록 미약하기는 하지만 동물에게서도 느낀다. 곤춘이나 식물의 경우 그 일체감은 미약해지고, 미시적인 존재와 인간의 감각을 넘어선 초대형 존재에 이르러서는 그 일체감은 완전히 사라져 버린다. 그러나 나에게 그 일체감을 느끼는 감각기관이 없다고 해서, 그것이 일체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증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생명이 있는 모든 것과의 유대를 느끼는데 방해가 되는 모든 것을 너 자신으로부터 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