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누구나, 특히 그리스도교는 더더욱, 직접적인 행동을 통해서든 재물을 통해서든 언론을 통해서든, 전쟁과 그 준비에 참여해서는 안 된다. 전쟁과 그리스도교는 양립할 수 없다. 왜냐하면 전쟁이란 내가 살기 위해 너를 죽이는 것이고, 그리스도교는 내가 진정 살기 위해서는 내가 죽어야 하기 때문이다. (조헌정) 무장된 국가와 전쟁, 이 두 가지가 언젠가는 없어진다 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통치자들이나 이 세상의 권력자들에 의해서는 아닐 것이다. 전쟁은 그들에게 너무나 큰 이익을 주기 때문이다. 전쟁은, 전쟁으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입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운명은 자신들에게 달려 있음을 깨닫고, 자신들을 전쟁터로 내모는 자, 자신들을 병사로 만들려고 하는 자의 명령에 복종하기를 그만 둘 때, 비로소 사라질 것이다. (하르두엔) 만약 세계의 모든 민족들이 서로 손을 잡고 평화를 지킨다면 우리는 권력자들에게 그들의 병사들이 가져다주는 이익보다 훨씬 많은 이익들을 가져다줄 것이다. 이에 더하여 사람들이 온갖 번뇌로부터의 벗어나기 위한 사색과 수련까지 배운다면 우리는 진정으로 인류의 복지를 위해 일하게 된다. 우리는 권력자의 행복을 위해 누구보다 치열하게 싸우고 있다.
사람은 스스로 자신의 몸을 들어 올릴 수 없듯 스스로 칭찬함으로써 평판을 높일 수는 없다. 오히려 스스로 자신을 칭찬하면 칭찬할수록 사람들의 평가는 내려가는 법이다. 남들한테서 좋은 말을 듣고 싶거든 스스로 자신의 좋은 점을 늘어놓지 말라. (파스칼) 사상과 그 표현, 즉 언어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하기 위해 사상과 언어를 가지고 노는 것은 좋지 않다. 속된 사람에게는 그들의 생각이 드러나도록, 현명한 사람에게는 그들의 생각이 가려지도록, 언어는 그렇게 주어진 것이다. (로버트 사우디) 자신에 관해 남이 하는 얘기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결코 마음이 평화로울 때가 없다. 페르시아 사람 사디는 언젠가 아버지 옆에서, 집안 식구들이 깊이 잠들어 있는 동안 밤새도록 자지 않고 코란을 읽었을 때의 일을 이야기한 적이 있다. “한밤중이 되어, 나는 코란에서 눈을 떼고 아버지에게 말했다. ‘기도를 드리고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고 코란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도 없습니다. 모두 죽은 것처럼 깊이 잠들어 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가 말했다. ‘너도 어서 가서 자도록 해라. 남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할 바에는.’” 아첨을 하는 것은, 말하는 자신을 낫
노동, 즉 자신의 힘을 사용하는 것은 인생의 필수조건이다. 인간은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남을 시켜 하게 할 수는 있지만, 노동에 대한 육체적인 욕구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그러므로 만일 자신에게 필요한 훌륭한 일을 하지 않는다면, 대신 불필요하고 어리석은 일을 하게 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남을 시켜 일하게 하며, 정작 자신은 시간을 때우기 위한 어리석은 일을 궁리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반면 어떤 사람들은 필요 이상의 노동을 강요당하며 억지로 일을 하는 경우도 있다. 이는 모두에게 좋지 않다. 왜냐하면 무위도식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영혼을 파멸시킨다는 점에서 불행하고 후자는 가혹한 노동에 의해 육체를 소모시킨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나 뭐니 뭐니해도 역시 일하는 사람이 일하지 않는 사람보도 낫다. 영혼은 육체보다 존엄하기 때문이다. 만일 노동 그 자체가 너희에게 있어 일차적인 것이고, 그 대가는 이차적인 것이라면 노동과 그 창조자인 신이 너희에게 주인이 될 것이다. 그러나 만약 노동이 이차적인 것이고 그 대가가 일차적인 것이라면, 너희는 대가와 그 창조자인 악마의 노예가 될 것이다. (존 러스킨) 모든 육체노동은 인간을 고결하게 한다. 어린이에게 일하는
예술은 사람들을 합일시키는 수단 가운데 하나이다. 모든 예술도, 모든 사람들을 합일시키는 보편적인 도덕 이념이 없다면, 하나의 유흥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이럴 경우 많은 사람들은 더욱더 자신을 무익한 존재로 여기게 되고 그로 인해 끊임없는 불만으로 괴로워하게 된다. (칸트) 예술이 사라진다는 것은 상상할 수 있는 일이지만, 부를 숭배하고 가난을 우롱하면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모리스) 예술은 사람들의 마음을 고취하기 위한 가장 강력한 수단이다. 그러나 좋은 일을 고취할 수도 있고, 나쁜 일을 고취할 수도 있기에(후자가 훨씬 쉽다), 예술이라는 수단에 대해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미(美)는 요사스러운 할망구이다. 그 마력에 걸리면 신념이 녹아 피가 된다. (세익스피어) 부자들에게 즐거움을 제공하는 것이 목적인 현대 예술은 창녀와 같다. 진리가 현인을 위해 존재한다면 미는 따뜻한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 (실러) 예술에 있어서 작가는 아무것도 창작하지 않는다. 다만 능력에 따라 자연을 통역하고 있을 뿐이다. (로댕) 문학은 부끄러움을 가르치는 거울이다.(토니 모리스) 시인은 어둠에서 빛을 캐내는 존재이다.(다르위시) 사랑과 고독은
우리는 자신이 무엇 때문에 살고 있고, 인류를 위해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지만, 만약 우리가 우리를 보내신 하늘의 뜻을 실천한다면, 우리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는 것이며, 그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좋은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달구지를 끄는 말은 자신이 어디로 무엇 때문에, 무엇을 싣고 가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말이 얌전하고 온순하게 짐을 끌고 간다면 그 말은 자기가 주인을 위해서 일을 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자기를 위해서도 좋은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라고 예수는 말했다. 만약 우리가 신이 우리에게 바라는 것만 행한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가벼운 것이고 또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의지를 자신의 의지처럼 실천하라. 그러면 하느님은 너의 의지를 자신의 의지처럼 이루어줄 것이다. 하느님이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자신이 원하는 것을 희생하라. 그러면 하느님은 다른 사람들이 네가 원하는 것을 이루게 하기 위해, 자신이 원하는 것을 희생하도록 만들어 줄 것이다. (탈무드) 위의 문장을 간단히 줄이면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가 된다.
길을 걸어갈 때는 자기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알아야 하듯이 나의 활동과 사회의 활동들이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인생은 단순히 즐기라고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인생은 투쟁이며 전진이다. 악에 대한 선의 투쟁, 부정 불의에 대한 정의의 투쟁, 압제에 대한 자유의 투쟁, 사리사욕에 대한 박애의 투쟁이다. 인생은 우리의 머리와 가슴에 여명의 빛을 던지는 이상의 실현을 향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전진이다.(주세페 마치니) 이념(理念)은 우리의 마음속에 있고, 이념의 실현을 방해하는 여러 가지 요인도 우리의 마음속에 있다. 우리가 지금 처해 있는 상황은 그것을 통해 우리가 이념을 실현해야 하는 재료에 지나지 않는다. (칼라일) 장애물과 디딤돌의 차이는 시각(視覺)의 차이이다. (조헌정) 완전성은 신의 본성이며, 완전성을 바라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괴테) 완전성이란 이상의 실현을 향해 줄기차게 나아갈 때만 참으로 그 이름에 보답한다. 우리가 의식하는 선은 우리의 내면에서도 또 세상 속에서도 반드시 실현될 것임을 기대하고 또 믿어야 하며, 이것이 바로 실현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다. 운명이란 피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피할 수 있는 것을
진리를 전달하는 유일한 방법은 사랑으로 얘기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말만이 사람들의 귀에 들리게 마련이다. (소로) 진리를 말하는 것은 바느질을 잘하고 능숙하게 풀을 베고 글씨를 아름답게 쓰는 것과 그 이치는 똑같다. 그것은 바느질을 많이 하고 풀을 많이 배고 글씨를 많이 써본 사람에게만 가능하다. 아무리 애써도, 수없이 해보지 않은 일은 잘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진실을 말하고 싶으면 그 일에 익숙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 일에 익숙해지려면 아무리 사소한 일에 대해서라도 오로지 진실만을 말하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남들 앞에서 자기 자신을 위장하는 것이 완전히 습관이 되어버려서, 종종 자기 자신에게조차 자신을 위장하기 쉽다. (라 로슈푸코) 실질적으로는 자신의 내부에 뿌리내린 사상에만 진리와 생명이 있고,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것뿐이다. 책에서 읽은 남의 사상은, 이를 테면 남의 밥상 위의 먹다 남은 찌꺼기이며 이방인에게서 빌린 옷과 같다. (쇼펜하우어) 진리를 위해 진리를 사랑하는 현자들은 진리를 자신의 소유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어디서 진리와 만나더라도 감사하게 그것을 받아들이며, 그곳에 누군가의 이름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이다. 그런데 사회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는 왜 이성이 아니라 폭력을 사용하는 것일까? 대부분의 기업인들은 달콤한 유혹으로 노동자들이 서로 경쟁하도록 부축이고, 최대한의 노동력을 끌어모아 쓸모도 없는 물건을 생산하고는 이용가치가 사라지면 굶어 죽든 말든 마음대로 해고해도 되는, 그런 사회체제를 원하고 있다. 흙과 햇빛, 동식물계, 광석층을 비롯한 자연 안에는 무진장한 부(富)가 있어서, 모두의 물질적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다. 자연 속에는 빈곤을 초래할 원인이 없다. 불구자와 노동자가 가난에 빠질 이유도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본질적으로 사회적인 동물이므로 사람들이 만성적인 가난으로 짐승처럼 타락하지 않는 한, 가정적인 애정과 사회적 동정이 스스로 자신을 부양할 힘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을 조달할 것이기 때문이다. (헨리 조지) 사회생활의 개선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은, 사회의 특정 계층에 일부 사람뿐만 아니라 그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예지와 사랑이 그 일에 결집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 일을 정치가에게만 맡겨두어서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없다. 대중이 스스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실제로
신에 대해 어떤 말을 들어도, 또 신에 대해 어떤 말을 해도, 우리의 마음은 채워지지 않는다. 우리가 신에 대해 이해할 수는 있지만 표현할 수는 없다는 사실. 이것이 바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생각이며, 또 이런 생각이 모든 사람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다. (실레지우스) 진정한 길은 흔히 길이라고 불리고 있는 그런 길이 아니다. 진정한 이름은 흔히 그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 그런 이름이 아니다. (노자) 자신의 내부에 만물을 포용하는 것, 그것 없이는 하늘도 땅도 있을 수 없는 존재가 있다. 이 존재는 평안하고 형태를 갖추고 있지 않다. 그 작용을 가리켜 이성이라 부르고 사랑이라 부르지만, 그 존재 자체는 이름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은 가장 높고 먼 존재인 동시에 가장 가까운 존재이다. (노자) 신, 그것은 우리에게 정의를 요구하는 무한한 존재를 뜻한다. (매슈 아놀드) 신, 그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그 일부로서 의식하는 모든 것을 뜻한다. 신이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 것은 어리석다. 신은 삼라만상 속에, 모든 사람의 마음 속에 있다. 신앙은 수없이 많지만 신은 단 하나이다. 만일 사람으로서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한다면 어떻게 신을 알 수 있으랴 (인도 금언)
사람이 사람을 먹는 시대가 있었다. 이윽고 사람을 먹는 습관은 사라졌지만, 동물은 지금도 계속 먹고 있다. 그러나 이제 사람들이 이 무서운 육식의 습관도 멀리할 날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어린이 보호와 동물 애호를 주장하는 여러 단체들이, 육식이야 말로 대부분 그들이 형벌로서 방지하고 하는 잔악행위임에도 불구하고, 채식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는 것은 얼마나 해괴한 일인가. 사랑의 실천은 형법상의 책임에 대한 공포보다 훨씬 더 강력하게 잔학 행위를 방지할 수 있다. 분노에 사로잡혀 사람을 괴롭히고 죽이는 잔학성과 그 살코기를 먹으려는 목적으로 동물을 괴롭히고 죽이는 잔학성 사이에 도대체 어떤 차이가 있단 말인가? (류시 말로리) 흡연과 음주와 육식은 가장 저주받아야 할 세 가지 습관이다. 이 무서운 세 가지 습관에서 최대의 불행과 최대의 빈곤이 태어난다. 인간은 이 세 가지 습관에 빠짐과 동시에 동물에 가까워져서, 인간다운 모습과 인간으로서의 가장 큰 행복인 맑은 이성과 선한 마음을 잃게 된다. (힐스) 인간은 동물에 대해 아무런 의무가 없다는 생각 속에는 참으로 무서운 잔인성과 야만성이 도사리고 있다. (쇼펜하우어) 인간이 동물을 잡아먹는 것은, 동물은 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