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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여우] 엄마의 전쟁

[안휘의 장편 연재소설] 4. 예쁜 아이

 

 

“안녕하세요? 김윤희 학생 맞으시죠?”

 

다세대주택 골목 입구 계단에 앉아 있던 30대 초반 가량으로 보이는 남자가 벌떡 일어나 다가오며 말을 걸어왔다. 백육십 센티미터를 겨우 넘길까 말까 한 작은 키의 남자는 흰색 와이셔츠, 노타이에 짙은 잿빛 양복 차림이었다. 남자의 어깨엔 커다란 카메라가 걸려 있었다. 그의 얼굴을 쳐다보던 윤희의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검은 뿔테 안경……. 순간적으로 아프리카 박천수 사장이 떠올랐다. 윤희는 콩닥거리는 가슴을 누르며 뒤로 물러섰다.

 

“네. 그런데… 누구시죠?”

 

“저는 동천신문 백종원 기자라고 합니다.”

 

“무슨 일이신가요?”

 

“제보를 받고 취재를 하러 왔습니다. 곧바로 물어볼게요. 카페 아프리카에서 알바 일을 하셨지요?”

 

“…예?”

 

이를 어째야 하나, 판단이 곧바로 서지 않았다. 다리에 힘이 빠지고 온몸이 달달 떨리기 시작했다. 그가 다시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박천수 사장에게 당하신 것 맞나요?”

 

하늘이 노래지는 느낌이었다. 어떻게든 벗어나야 할 것 같은데 머릿속이 마구 헝클어지고 있었다. 백종원 기자라는 사람의 몸이 부풀어 오르더니 갑자기 커다란 코뿔소로 변했다. 그의 코에 걸린 커다란 검은 뿔테 안경이 무지막지한 공포를 몰고 왔다. 소름이 끼쳤다.

 

“누구시오? 누군데 우리 아이한테 이러는 거요?”

 

어머니였다. 언제 왔는지 시장 가방을 든 어머니가 분노가 철철 넘쳐흐르는 표정으로 곁에 서 있었다. 어머니의 서슬에 백 기자가 무춤해진 표정으로 대답했다. 씩씩하던 기운이 모두 사라진 힘 빠진 목청이었다.

 

“아, 예. 동천신문 사회부 백종원 기자라고 합니다. 전화 제보를 받고서 취재차 왔습니다.”

 

“무슨 제보를 누가 했다는 거요?”

 

“김영철 씨라고… 전화하신 분이 김윤희 양 아버님이라고 하시던데요?”

 

윤희의 머릿속이 아득해져 왔다. 아버지라고? 아버지가 신문사에 나의 일을 제보했다고?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가?

 

어머니가 윤희의 팔을 낚아채듯 잡고서 집 쪽으로 끌며 백 기자에게 말했다. 목소리에 울분이 가득했다.

 

“가세요! 우리 딸 아무 일도 없어요. 그 미친놈이 하는 이야기는 전혀 사실이 아니에요. 다시는 찾아오지 마세요!”

 

어머니는 윤희를 잡아끌다시피 하며 집으로 데리고 갔다. 힐끗 돌아보니 백 기자는 난감한 표정으로 나무처럼 서 있었다.

 

“윤희 아버지! 당신 왜 그래요? 도대체 어쩌자고 신문사에다가 전화를 걸었어요?”

 

늦은 밤 변함없이 술 냄새를 풍기며 들어온 아버지는 어머니의 닦달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큰 소리로 욕을 해대기 시작했다.

 

“박태호, 박천수 부자 두 놈이 여기저기 손을 써서 완전히 틀어막고 있는 게 분명해. 경찰 놈들도 수사하는 척만 하고, 언론도 한 줄 안 쓴다니까.”

 

“아니, 윤희 아버지! 세상 어떤 부모가 딸자식이 바깥에서 능욕당한 일을 떠벌여요? 이럴 땐 감추고 수습하는 게 정상 아니에요? 그래 어쩌자고 신문사에다가 전화해서 취재하라고 시켜요? 당신 정말로 미친 거 아녜요?”

 

아버지는 어머니의 말에 개의치 않고 딴청을 부리듯이 윤희를 향해 물었다.

 

“취재기자가 왔단 말이지? 그래 뭐라고 했니? 박천수란 놈이 너에게 한 짓을 기자에게 자세히 설명해줬어? 그 새끼 가만히 두면 안 돼.”

 

어머니가 더는 참지 못하겠다는 몸짓으로 아버지에게 대들었다.

 

“아버지라는 사람이 도무지 수습할 생각은 안 하고 대체 어쩌려는 거예요? 동천 시내 동네방네 골목마다 아예 광고하고 다니는 거 아녜요? 우리 윤희는 앞으로 어떻게 살라고 그러는 거야!”

 

어머니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높았다. 아니 윤희의 기억으로는 그렇게 정색을 하고 반발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아버지가 벽력같은 고함을 질렀다.

 

“이 여편네가 뭘 잘못 먹었나, 뭘 안다고 이렇게 큰소리로 대들어?”

 

뜻밖이었다. 평소 같으면 아버지가 그렇게 나오면 어머니는 더 이상 말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머니는 분기를 조금도 누그러뜨리지 않았다. 윤희의 기억에 또렷이 남은 꼭 두 번의 공포극이 있었다. 처음엔 윤희가 초등학교 5학년 때, 그리고 다음은 중학교 2학년 무렵이었을 것이다. 말다툼 도중 어머니가 아버지의 여자 문제를 따지고 들자, 아버지는 칼을 들고 나타나 손목을 그으며 자해소동을 벌였다. 어머니가 결국 무릎을 꿇음으로써 소동은 가까스로 마무리됐었다. 윤희는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무슨 큰 죄를 짓지 않고서야 그럴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니었다. 어머니가 딱딱한 얼굴을 조금도 풀지 않고 아버지를 빤히 노려보면서 말했다.

 

“내가 지금껏 우리 윤희 하나 잘 키워보자고 온갖 수모를 당해도 참고 살아왔는데, 이젠 안 되겠어요. 당신은 윤희가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지켜 줄 의사가 없는 사람인 게 분명해요. 도대체 왜 그러는 거예요?”

 

“아, 이 여편네가 왜 이래? 내가 다 생각이 있어서 하는 일인데 왜 자꾸 초를 치는 거야? 잔말 말고 구경이나 하라고!”

 

“내가 쟤 엄마예요. 어떻게 가만히 있으라는 거예요? 아이가 봉변당한 일을 온 동네 사람들이 다 알면 딸아이 가슴에 분홍글씨를 새기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저 아이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라고 그러는 거냐고요!”

 

“그래도 박천수 놈은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어. 오늘 밤은 내가 아예 그 집 앞에 잠복해서라도 반드시 놈을 잡아서 요절을 낼 거야!”

 

그쯤에서 어머니는 무슨 생각이 났는지 말을 잠시 멈추고 숨을 고르는 모습을 보였다. 어머니의 모습은 더욱 차가워져 가고 있었고, 낯빛은 하얗다 못해 푸릇한 광채마저 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어머니는 언성을 높이지는 않았다. 냉랭하면서도 착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알겠어요. 당신 드디어 우리 모녀를 버리고 샘 다방 최 마담한테 가려는 거로군요. 이렇게 행동하는 당신 속셈 이제야 알겠네요.”

 

어머니의 말을 듣던 아버지가 버럭 큰소리를 쳤다.

 

“또 최 마담 이야기야? 도대체 뭘 안다고 걸핏하면 그 여자 이야기를 꺼내는 거야? 어디에서 무슨 말을 들었건 그거 다 헛소문이라고!”

 

아버지의 고함질에 주눅이 들기는커녕 어머니는 오히려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머니의 얼굴에는 모든 것을 다 포기한 듯한 기미가 돌았다.

 

“이런 거, 함께 사는 여자는 다 알아요. 육감으로도 알고, 당신이 걸핏하면 묻혀오는 그 여자 향수 냄새로도 알지요. 도대체 몇 년이에요? 아무리 못돼도 2년은 더 된 일이잖아요? 이젠 거짓말 좀 그만하시고 솔직해지세요.”

 

아버지가 몸을 벌떡 일으키며 신경질적인 표정으로 소리 질렀다.

 

“아니, 이 여자가 완전히 돌았네. 뭘 잘못 먹었나, 왜 없는 얘기를 계속 지어내고 그래? 내가 최 마담하고 어디서 뭘 어쨌다고 이 난리를 치는 거야? 어디 증거 있어? 증거 있냐고?”

 

여차하면 아버지가 이성을 잃고 뭐든 난폭한 행동을 할 가망이 높아졌다. 아버지의 고함에도 어머니는 울지 않았다. 아버지를 계속 쏘아볼 뿐 말이 없었다. 백랍같이 차갑게 변한 어머니의 얼굴에는 절망의 빛이 역력했다. 두 사람의 말다툼을 바라보면서 묵묵히 견디던 윤희가 자리에서 발딱 일어나 아버지를 향해 돌아섰다.

 

“아버지. 죄송하지만 저도 여쭤볼 게 있어요.”

 

흔들리는 감정과 달리 목소리가 차분하게 나왔다. 폭발 직전에 있던 아버지는 뜨악한 눈으로 윤희를 바라보았다.

 

“대답해 주세요. 제가 아버지 딸인가요, 아닌가요?”

 

순간 어머니와 아버지 두 사람의 얼굴이 얼음처럼 굳어버렸다. 아무도 입을 떼지 못했다. 윤희는 한동안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윤희는 다시 다그치듯이 물었다.

 

“제 눈 피하지 마세요. 아버지가 제 생부 맞냐고요!”

 

▶▶드디어 아버지가 충격적인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습니다. 어머니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윤희네 가정은 과연 무사할까요? 다음 주 금요일 후편 ‘[5] 예쁜 아이 -⓸ 부서지는 둥지’에서 밝혀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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