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0 (토)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강남여우] [16] 윤심덕 in 나폴리

[안휘의 장편연재소설] ③ 인동초처럼

  • 안휘
  • 등록 2020.10.30 06:00:00
  • 16면

 

 

 

…윤희에게 달려들어 마구 앞섶을 풀어헤쳤다. 소리를 치며 있는 힘껏 떠밀었다. 뒤로 나자빠졌다가 일어나는 남자의 얼굴이 갑자기 백두 단장으로 바뀌었다. 기겁을 하고 소리치다가 잠이 깼다.…

 

 

“나 좀 서울 갔다가 올 테니까, 연습 잘 하고 있어.”

외출복으로 갈아입은 이민지가 윤희에게 말하고는 서둘러 구두를 신었다. 표정이 심각했다. 무슨 일이 있는지 왜 그러는지 묻고 싶었지만, 윤희는 차마 입을 떼지 못하고 엉거주춤 대문 밖까지 따라나서서 이민지를 배웅했다. 그녀는 대문 앞 공터에 세워 둔 승용차에 올라 시동을 걸고 빠른 속도로 골목을 빠져나갔다. 김미리가 사고를 친 모양이야…김도숙 기자와 대화를 나누고 들어온 한상석이 이민지에게 던진 말이 뇌리에 감돌았다. 한상석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배우들을 리드하며 오후 연습을 시켰다. 그러나 그의 표정에도 어두운 그림자가 사라지지 않았다.

*

“국내 유명 극단 카프카 소속의 한 여배우가 소속 극단 단장으로부터 수년 동안 성폭행을 당했다며 자살을 암시하는 메시지를 남기고 잠적해 경찰이 긴급 수배에 나섰습니다. …”

식탁에 모여앉아 저녁밥을 먹으며 텔레비전 뉴스를 보던 단원들이 모두 숟가락을 떨어뜨렸다. 김미리가 쳤다는 사고가 이거였구나. 윤희는 뛰는 가슴을 눌렀다. 삼켰던 밥이 식도를 타고 자꾸만 거꾸로 치솟아 올랐다.

“…카프카 극단 단원인 스물세 살 김미리 씨는 대표를 맡고 있는 연출가 백두 단장으로부터 수년 동안 성폭행을 당해왔다는 주장이 담긴 휴대폰 문자를 일부 연예담당 기자들에게 보낸 뒤 행방을 감췄습니다. 김 씨는 기자들에게 보낸 메시지에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는 극단적 선택까지 암시하는 문자를 남겨 신고를 받은 경찰이 긴급히 행방을 찾고 있으나, 아직 김 씨의 위치를 확인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김 씨의 휴대전화는 전원이 꺼져 있고 성폭행범으로 지목된 백두 단장 역시 전화가 연결되지 않는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

조연출 한상석의 표정에는 드디어 올 것이 오고 말았다는 듯한 야릇한 표정이 비쳤다. 그는 누군가와 귓속말로 한동안 통화를 한 뒤 옷을 갈아입고 숙소를 나섰다.

“다녀올 테니까 걱정들 하지 말고 개인 연습하면서 기다리세요.”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밥상을 물리고 맥이 빠져 앉아있던 배우들에게 그렇게 말한 뒤 한상석은 수련장을 떠났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열네 명의 단원들은 그저 멍하니 앉아있는 게 고작이었다. 더러 휴대전화 통화를 위해 집 밖으로 나갔다 들어오는 이도 있었지만, 비교적 덤덤한 표정들이었다. 윤희는 어쩌면 단원들이 뭔가 짐작을 했거나, 일부는 김미리가 폭로한 일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았다. 텔레비전에 나온 뉴스를 막 들었을 때의 충격에 비하면 비교적 차분한 배우들의 반응이 이상스럽게 여겨졌다.

설거지를 끝낸 윤희는 연습실 창고에 혼자 멍하니 앉아있었다. 이제 어떻게 되는 건가. 카프카는 어디로 가는가. 나는 또 어떻게 되나.

*

‘윤희야. 많이 놀랐지? 별일 아니야. 나중에 다 설명해줄 테니까 그냥 거기 두물머리에 가만히 있어. 일이 정리되는 대로 내가 거기로 갈게. 흔들리지 말고… 알았지?’

이민지로부터 문자가 온 것은 자정이 다 된 시각이었다.

‘예. 알았어요, 언니. 제 걱정은 마세요.’

답장을 보내고 나니 새삼 밤공기가 시렸다. 윤희는 담요를 어깨에 두르고 앉아서 불안한 시간을 견디고 있었다. 그 사이에 여배우 둘이 들어와서 한쪽 구석 마룻바닥 위에 잠자리를 펴고 눕더니 한동안 속닥거리다가 이내 코를 골았다.

돌이켜보니 극단 사무실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김미리는 좀 이상했었다. 어딘가 불안정해 보였던 그녀는 윤희에게 공연히 쌀쌀맞게 굴었다. 윤희는 타고난 성품이려니 하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의 일상에 그런 엄청난 혼란이 있었다니 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도무지 상상이 안 되는 일은 백두 단장이 그녀에게 그런 못된 행동을 했다는 김미리의 폭로내용이었다. 윤희에게 백두는 무슨 종교단체의 거룩한 지도자이거나, 덕망 높은 프로 예술가의 이미지로 각인돼 있었다. 그런 존재가 젊은 여배우를 성적으로 농락했다는 얘기는, 좀처럼 믿을 수 없는 혼란이었다.

“아직 안 주무셨네요?”

손정우였다. 언제 들어왔는지 연습실 창고 안으로 들어온 그가 우두커니 앉아있는 윤희 곁으로 다가왔다.

“예. 잠이 안 와서요.”

“많이 놀라셨지요? 그러실 만도 해요.”

“어떻게 된 일인가요?”

“저도 구체적인 내용은 잘 모릅니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니까, 김미리 씨가 좀 이상했던 것 같기는 해요.”

“김미리 씨 얘기도 그렇지만, 다른 분도 아니고 백두 단장님이 그랬다는 건 좀처럼 믿기지 않아서요.”

손정우가 소리 없이 피식 웃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세상에는 이해가 안 가는 일들이 많지요. 저도 일단 상상이 안 되지만, 진실은 또 늘 따로 있는 거니까, 뭐라고 단정하기는 힘들어요.”

그는 알고 있는 것을 다 털어놓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더 물어볼 말이 없었다. 한숨이 났다.

모로 누운 채 잠시 잠이 들었는데, 몹쓸 악몽을 꾸었다. 꿈속에 동천시의 카페 아프리카의 박천수 사장이 나타났다. 윤희에게 달려들어 마구 앞섶을 풀어헤쳤다. 소리를 치며 있는 힘껏 떠밀었다. 뒤로 나자빠졌다가 일어나는 남자의 얼굴이 갑자기 백두 단장으로 바뀌었다. 기겁을 하고 소리치다가 잠에서 깨어났다. 온몸이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다.

새벽녘에 경찰차가 들이닥쳤다. 두 명의 경찰이 플래시를 켜 들고 숙소와 연습실 창고를 샅샅이 뒤졌다. 그리고는 혹여 김미리가 나타나면 지체 말고 연락해달라며 손정우에게 명함을 건넨 다음 돌아갔다. 모두 잠을 설쳤다.

*

아침 뉴스에서도 김미리가 집으로 돌아왔다거나 발견됐다는 뉴스는 없었다. 경찰의 수색결과 그녀는 숙소에도 없었고, 전라북도 김제에 있는 고향 집에도 가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고 했다.

조연출 한상석이 이민지와 함께 두물머리로 돌아온 것은 정오 무렵이었다. 한상석은 단원들을 연습실 창고로 불러모았다. 윤희를 포함하여 점심밥을 짓던 배우들도 모두 창고로 갔다. 한상석의 표정은 컁컁해 보였지만, 예상했던 것보다는 덜 어두웠다.

“단장님의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단장님께서는 여러분이 흔들리지 말고 계획대로 공연준비를 하기를 바란다고 하셨습니다. 모든 문제에 대한 책임은 온전히 자신의 몫이며, 때가 되면 알기 쉽게 정리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오후부터는 정상적으로 연습에 들어갑니다. 아셨지요?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서 신경이 전혀 안 쓰일 수는 없겠으나 연습에 지장이 없도록 각자 심신관리를 잘 하시기 바랍니다. 예정된 스케줄대로 막은 올라갑니다.”

축 늘어졌던 분위기가 조금은 살아 오른 것 같았다. 점심 식사시간이 지난 뒤 이민지가 윤희를 따로 불렀다. 윤희가 먼저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가요?”

이민지가 빙그레 웃었지만, 그녀의 표정에는 짙은 그늘이 느껴졌다.

“사연이 없는 인생이 어디에 있겠니? 세상은 네가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어지럽단다.”

“벌어지고 있는 일 자체를 저는 이해하기 힘들어요. 그리고 두려워요.”

이민지가 윤희를 안아 주었다.

“아이고, 우리 윤희. 많이 혼란스러울 거야. 하지만, 어른들의 일은 어른들의 몫이고, 너는 네 길을 가면 돼. 날아가는 새들은 왜 뒤를 돌아보지 않는지 아니?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길에 일어나는 제아무리 어려운 일들도 지나고 보면 아무것도 아니야. 뒤를 돌아본들 소용이 없기도 하지. 새는 그걸 아는 거야. 오직 무대만 생각해. 알았지?”

엄마에게서 느끼던 따뜻한 사랑이 가슴속에 일렁거렸다. 눈물이 났다.

 

=> 복잡한 상황에서도 윤희는 최선을 다해 무대를 준비합니다. 내주 금요일자 ‘[17] 윤심덕 in 나폴리-④ 스포트라이트’에서 다음 이야기를 만나보세요.









COVER 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