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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넘어선 근·현대 인문학의 보고... ‘망우리역사문화공원’ (1)

가까운 과거에 구리시 돌다리가 종점인 버스를 타고 서울 명동에서 구리로 넘어올 때 "청량리 중랑교 망우리가요" 하는 버스 안내양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차라리 죽으러 망우리가요"로 들렸다. 어둡고 칙칙한 분위기의 상징이었던 망우리공동묘지가 최근 근·현대 인문학의 보고서를 다시 쓰게 하고 있다.

 

한용운·오세창·박희도 3.1만세운동 민족 대표와 유관순 열사의 유해가 묻힌 이태원합장묘, 민족지도자 안창호 선생의 묘터, 머무르거나 머물렀던 수십 명의 애국지사, 김상용·박인환 시인, 김말봉·계용묵·김이석 소설가, 이광래·함세덕 극작가 그리고 이인성·이중섭·권진규 미술가 등 60명 안팎의 근현대 선각자들이 잠들어 있기 때문이다.

 

공동묘지에서 역사공원으로 탈바꿈한 무덤군에서 찾은 '죽음을 넘어선 근·현대사의 인물'을 통해 파란만장했던 우리의 역사를 되돌아 본다. 

 

 

◇망우리고개는 대한제국 황실 가족의 상여 길이다

 

이 고갯길이 신작로가 된 시기는 1900년으로 올라간다. 국모였던 민비가 일본의 낭인들에게 비참히 시해를 당한 을미사변(乙未事變. 1895)이 터지자 고종은 동구릉 숭릉(崇陵) 앞에 민비의 첫 무덤인 숙릉(肅陵)을 조성하다가 이런저런 이유를 대고 중단한다. 그리고는 러시아 공관으로 망명(파천. 1896)을 단행한다. 망명 중 근친 2명에게 중국 북경으로 가 황제릉 연구를 하고 오라고 명한다. 고종은 파천을 마치고 대한제국을 선포(1897)하고 민비를 명성황후로 책봉한 뒤 청량리 홍릉에서 국장을 치른다. 홍릉은 왕릉과 황릉의 중간 형태로 독특하게 조성했다.

 

또한, 고종은 대한제국 선포 2년 뒤 자신이 묻힐 수릉(壽陵. 능터)을 남양주시 금곡에 정한다. 그리고는 1900년 이 고개를 넓힌다. 고종태황제와 명성태황후(1919), 순종효황제(1926), 순종효황후(1966), 의친왕(1955), 영친왕(1968), 덕혜옹주(1989), 이방자여사(1989), 회은황세손 이구(2005) 등 대한제국 황실 가족의 많은 사연을 담은 상여가 이 고개를 넘었다.

 

일제의 조선총독부는 1925년 이 고갯길을 2차선 규모로 확장했고, 1970년대 초중반 지금의 모습으로 바뀐다.

 

◇망우리고개는 동구릉 능행(陵幸) 길이다

 

조선시대의 망우리고개는 경상도와 강원도에 서울로 넘나들던 관동대로(평해길)의 문턱이다. 사실 조선시대 망우리고개는 지금의 이 고개가 아니다. 영조 연간에 발간된 '망우동지'에 소개된 망우리고개는 옛 중앙선 망우리 터널 위의 산이다.

 

이 고개는 조선조 왕이 건원릉을 포함한 동구릉으로 제사 지내러 다니던 능행 길이었다. 일반적인 코스는 왕이 궁궐에서 나와 '동대문 - 동묘(신설동) - 보제원(안암동) - 종암동 입구 - 안락현 또는 봉화산 뒷길(화랑로) - 신내동·망우동 박수고개 - 양원리 - 망우령(중앙선 망우리 터널) - 동구릉'으로 이어졌다.

 

망우리는 조선초 망올리(亡兀里) 혹은 망올리(網兀里)로 중기 이후부터 망우리로 불렀다.

 

 

◇태조와 남재 망우리 설화를 만들다

 

망우리의 지명은 조선을 개국한 태조와 관련이 있다. 태조가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한성에 세우고 종묘사직을 다 이루었으나, 사후의 명당을 찾지 못했다. 왕좌에서 물러나 죽어서 묻힐 능터를 개국공신 남재와 함께 찾았다.

 

지금의 남양주시 별내동의 남재 묘역은 남재가 태조의 능터로 잡았고, 동구릉 건원릉은 자신의 묏자리로 삼았다. 두 곳을 답사한 태조는 동구릉의 터가 별내동의 것보다 마음에 들었다. 이에 태조가 남재에게 서로 바꾸자고 하자 남재는 하늘이 노랬다. 왕의 묏자리를 탐한 불경죄를 범했으니 말이다.

 

이때 태조가 지필묵을 꺼내 불망기를 적어 남재에게 건넸다. 불망기는 지금의 맹약서로 태조와 남재의 묘터를 바꾼 사실에 대해 시비를 걸지 않겠다고 약조를 한 것이다. 그리고 환궁하는 길에 둘은 고개에 올라 건원릉 터를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빠진다.

 

태조는 “죽어 누울 자리를 찾았으니 오호라, 이제야 근심을 잊는구나!(於斯! 吾忘憂矣)”하고 능터를 흐뭇하게 바라봤다.

 

한편 남재는 이마의 땀을 닦으며, “왕의 능터에 누우려는 불경죄를 저질렀으나, 가문이 살길을 찾았으니, '오호라, 근심을 잊는구나!(於斯! 吾忘憂矣)'” 불망기를 되뇌며 망우(忘憂)했다.

 

동상이몽이다. 남재의 5대손 남이는 태종의 사위이자 세조 때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고 공신에 오르는 등 임금의 총애와 백성들이 그를 따르자, 유자광 등이 음모했다. 역모죄로 남이의 의령 남씨 가문이 몰살당할 위기에 처했으나, 이 불망기 때문에 당사자인 남이만 죽고 나머지 가족은 살았다고 한다.

 

남재와 태조의 이런 인연 때문인지 의령 남씨 가문은 태조가 망우리고개에서 건원릉을 바라보는 '태조망우령가행도'라는 그림을 남겼다.

 

 

◇일제 망우리공동묘지를 조성하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일제총독부는 도성 밖 동서남북에 공동묘지를 하나씩 개설했다. 동쪽에 광희문 밖 신당리, 서쪽에 서대문 밖 아현리, 남쪽에 남대문 밖 이태원, 북쪽에 고양군 수철리(지금의 금호동) 등이다. 1922년 이 네 곳의 면적은 51만여 평에 달했다. 가장 넓은 곳은 이태원으로 11만 9328평, 신당리가 11만 8823평이었다.

 

1922년 이태원과 신당리가 만장이 되자 새로운 장소를 물색했다. 대체지로 지금의 홍제동과 길음동(미아리)이 선정됐다. 홍제동은 일본인 전용 공동묘지로 길음동는 조선인 전용의 보통공동묘지로 신설하기로 했다.

 

국권 침탈 후 서울의 인구가 급증하자 무질서한 개발이 진행됐다. 총독부는 성곽까지 철거하면서 경성을 확장해 나갔다. 문제는 묘로 넘쳐나는 공동묘지였다. 경성부는 1931년 3월 이후 기존의 공동묘지에 매장을 금지했다.

 

그리고 여러모로 쓸모가 많아 보이던 이태원공동묘지에 대한 개발계획을 세우고 대체지로 망우리로 정했다. 경성부는 1933년 2월 경기도 구리면 망우리 일대 임야 75만 평을 매입하고, 52만 평을 묘역으로 조성할 계획을 잡았다. 

 

경성부묘지제장사용조례를 개정하고 1933년 6월 10일 드디어 ‘망우리공동묘지’ 시대를 열었다.

 

 

묘지는 보통묘지, 가족묘지, 단체묘지 3종 5등급으로 나누고, 1인당 최저 2평으로 제한했으며, 이용료는 종과 등급별로 10원에서 1원까지 15종류 구분했다. 무덤의 가격도 빈부격차가 심했으며, 등외로 친 자투리땅은 50전에 불과했다. 그리고 근현대의 선각자들이 이곳으로 몰려온다. 그리고 산 자와 죽은 자가 공존한다.

 

자료제공=한철수 구지옛생활연구소장

 

[ 경기신문 = 이화우·신소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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