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 잠재력을 가진 이천에서 기업 유치는 간절함이자 지역의 희망이다. 이천시는 수도권 최적의 입지와 교육, 환경, 의료, 복지, 문화, 교통 인프라 등 다양한 강점을 바탕으로 기업 유치에 도전하며, 새로운 미래를 향해 도약하고 있다. 물론, 중첩규제의 한계도 있지만, 이를 극복할 도전 정신과 비전이 있다. 기업 유치는 단순한 선택이 아닌, 지역 발전을 위한 필수 전략이다. 지금 이천시는 기업의 안정적인 성장과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해 최적의 환경을 조성하고 있다. 기업 확장 지원과 산업단지 조성 이천시는 지역 경제의 중심축인 기업을 유치하고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해, 지난 몇 년간 대대적인 투자와 노력을 기울여왔다. 산업단지 확장과 수도권 규제 사이에서 평행선을 달리던 이천시는 연접개발 적용 지침 개정이라는 변화의 첫발을 내디뎠다. 개별공장이 난립하던 지역에 체계적인 개발계획을 수립, 기존 6만 제곱미터 규모의 산업단지를 단계적으로 30만 제곱미터까지 확장 가능하고 대월2 일반산업단지 승인을 통해 새로운 산업단지 조성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천시는 기업 유치를 위한 체계적인 준비를 하고 있다. 기업 확장과 신규 증설을 꿈꾸는 모든 기업이 이천시의 문을 두
‘클래식의 산책’이란 강의를 듣고자 길을 나섰다. Y마트라는 식료품 판매장 앞을 지나가는데 그 마트에 납품할 식재료를 싣고 온 청년기사가 손수레를 끌고 가면서 휘파람을 불고 있다. ‘이 시국에 휘파람 불며 일한다!’ 갑자기 젊은이의 인상이 좋아 보였다. 계절은 봄이라지만, 대한민국 사람으로서 휘파람 불며 봄을 맞을 만한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나에게도 젊은이처럼 휘파람 불며 일할 때가 있었던가! 과거를 생각하는 길목에 들어서자 나도 모르게 어금니가 시리다. 그동안 긍정의 힘으로 나를 끌고 가고자 노력했다지만 휘파람 불며 신명 나게 일을 해본 기억이 별로다. 그런데 고향에서 부모님이 농사지을 때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점이 생각났다. 그때 버들피리를 꺾어 불었고 풀 뜯는 소 등을 타고 아버지를 보며 웃었던 기억이 가슴속을 환하게 했다. ‘아버지 쟁기질 하고/ 어머니는 밭둑을 오선지 삼아/ 음표 찢듯 씨앗을 묻고/ 형은 두엄 뿌리고/ 나는 고무래로 흙덮기 하던 땅‘ 이란 시도 그 시절 선물이다. 젊은이의 휘파람 소리를 듣고 가던 길 가는데, ‘휘파람을 불며 가자 언덕을 넘어/ 송아지가 엄마 찾는 고개를 넘어/ 아가씨 그네 뛰는 정자나무 지나서/ 휘파람을 불며가자 어
한 편의 시와 시조는 그 사람 정신적 부활의 상징이 될 수 있다. ‘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고 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되어 있어/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하리라’ 라는 시조는 만고의 충신 성삼문의 푸른 혼으로 지금도 내일도 서슬 퍼렇게 살아 있을 것이다. 1455년 세조가 단종을 내쫓고 왕위에 오르자 왕명을 맡아보던 예방승지 성삼문은 임금의 인장(印章)인 국새를 안고 통곡을 한다. 그 뒤 성삼문은 세조와 그 일당을 죽이고 단종을 복위시키려다 역모 죄로 한강 백사장에서 죽임을 당한다. 그때 성삼문은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절개를 낙락장송에 비긴 시조를 남기고 갔다. 이것이 인문학 정신이요 문학의 정의이다. 문학은 어떤 형태로 나타내든 결국은 자기 삶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인간이란 종(種)은 두 개의 발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르루아 쿠랑은 말했다. 그런데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사실을 잊어버리고 산다. 걷는다는 것은 다급한 일에 매달리기보다는 시간을 그윽하게 즐기는 경향을 보인다. 또한 인간은 걸으면서 자신의 실존에 대한 행복한 감정을 되찾기도 한다. 아침 산책길에서 본다. 길에 떨어져 있는 고목나무의 부러진 가지를. 나무는 지난밤 시간의 무게를
을사년도 한 달이 가고 둘째 달 중순이 지나간다. 2월은 28일까지다 1월 말경에는 설 연휴 겸 공휴일로 쉬고 2월은 28일까지니까 새해 벽두부터 뭔가 헐렁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사는 게 뭐 그런 거지’ 싶었다. 그런데 명절에 다녀간 어느 회사 사장 말이 떠올랐다. 매일 꼬박꼬박 광고를 내보내야 하고 기사를 써 편집해 독자에게 전달되어야 하는 계약 사회에서는 하루하루가 경제적 단위 가치로 따져질 수밖에 없다던 그 말이. 나라 밖으로 눈을 주면 미국의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으로 경제와 안보에 따른 불안의식은 심각해졌다. 이민자들의 고통도 만만치 않게 되었다. 국내 사정은 지난해 12월 3일 현직 대통령이란 자의 친위 쿠데타 시도와 그 이후 대통령에 대한 체포 영장, 서울서부지방법원에 대한 지지자들의 난립과 난동, 그리고 그 후유증과 통치자의 비이성적인 재판과정의 태도 등 마음 편히 보낼 수가 없었다. 새해라고 맑은 기운으로 덕담을 나누기에도 어설프기만 했다. 매사 기본과 근본을 놓치면 개인의 삶도 나라도 혼란스럽고 불행한 것. 하루 속히 기본 질서가 잡혀 사람다운 삶을 고민해야 할 같다. 무거운 마음 달래고자 2022년 4월 20일 작고 한 한승헌 변호사의
겸손한 인품과 성실한 생활태도를 가치덕목으로 삼고 살던 시대는 나의 스승과 함께 가버린 것 같다. 오늘날은 바람의 오염과 세상의 소음이 이명(耳鳴) 증상 같이 두뇌를 울리고 있다. 하여 고하(古河) 선생의 '시조로 본 풍류 24경'을 꺼내어 보니 '청정한 소나무여, 솔바람 소리여'가 펼쳐진다. "산골짜기에 가까운 집 오는 사람 드물어/ 홀로 국화꽃 따 들고 돌밭에 앉아 있네." (幽居近壑人來少유거근학 인래소 ⭑ 獨採黃花坐石田독채황화 좌석전). 성수종(成守琮1495-1533)의 칠언절구를 만나게 된다. 그런가하면 ‘누워서 듣는 맑은 퉁소 같은 바람 소리 파도처럼 흩어지는 솔바람 소리 (臥聽晴賴散松濤 와청청뢰산송도)라고도 했다. 수필가 윤오영은 소나무를 들어 ‘공기를 청신하게 하고 폐를 깨끗하게 해주는 점에서 다른 나무들이 당할 수 없다,’고 했고, 솔바람 소리는 ‘청아한 냄새가 신선한 향기를 퍼뜨린다.’했다. 십여 년 전 남편을 잃은 친구 부인과 부인의 시댁 당숙뻘 되는 내 친구와 그의 자동차로 모악산이 멀지 않은 곳으로 갔다. 그곳에서 점심을 먹은 뒤, 친구 부인이 차를 대접하겠다고 하여 간 곳이 ‘대바람 소리’라는 찻집이었다. 부인의 시댁 당숙은 나이 차이
느긋이 잘 자고 일어났다. 어젯밤 외롭지 않도록 친구가 보내준 음악을 듣고 마음을 정리한 결과이다. 잘 자면 다음 날 아침 기상이 상쾌하고 마음의 결이 부드럽다. 세상 또한 잘 살면 죽음 또한 그럴 것이다. 옷을 갈아입고 오래도록 내 자리요 세상에서 사라질 때까지 머물고 싶은 책상 앞에 앉았다. 멀리서 사는 아이들과 내게 강의를 받는 회원에게 덕담 문자를 보내고 산길로 들어섰다. 걸으며 생각하며 때로는 산속 의자에 앉아 명상에 잠기기도 한다. 학교생활을 끝내고 서울로 가서 고생하던 때였다. 나 없는 줄 알면서도 시골집을 찾아가 어머니에게 명태를 선물로 드리며 손을 꼭 잡고 위로해 주고 돌아갔다는 배 업 선생이 떠오른다. 내 집 마련할 때 적금을 해약하여 자금을 빌려준 고향 친구도 생각난다. 속으로 이 친구를 만나서 그 말하며 식사라도 하리라고 마음먹고 메모를 한다. 그리고 내가 이 땅에 와 발붙이고 살겠다고 고민하며 힘들어 할 때 손을 내밀어준 분들을 생각하며 사람이 제 혼자 사는 것 아님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는 새 아침이다. 집으로 돌아와 올해의 독서 계획을 생각해 본다. '유머가 인생을 바꾼다'는 책을 읽고 있었다. 그 책 속에는 일찍이 세계적으로
어느 시인은 ‘외로우니까 사람이다’라는 시를 써서 유명해졌다. 모두가 외롭다는 것. 자연도, 하나님도 외롭다는 이 형벌 같은 외로움의 본질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생명으로서 피할 수 없는 존재론적 문제인 것일까? 외롭고 고독하다는 것은 시와 산문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언어요 문장일 것이다. 외로움에도 갈래가 있다. 각각 느낌과 고통스러운 우울감이 다르다. 꿈과 사랑을 잃은 젊은이,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희망이 꺾이어서 주저앉고 싶은 소상인과 농민들, 가족을 잃은 이들의 피맺힌 한 같은 그리움과 외로움- 어떻게 하면 새해에는 외로움이 덜 느껴지는 가운데 살맛 돋는 세상이 될 수 있을까. 지난해 12월 3일, 한밤중에는 윤석열이란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다음 날 04시 30분에는 계엄 해제를 선언했다. 따라서 12월 14일 오후에는 대통령 윤석열의 탄핵안이 비상계엄령 선포 11일 만에 국회에서 가결되었다. 이게 무슨 한밤중의 악몽이었던가. 아니면 국가적인 비상사태에 따른 군인들의 작전 연습이었던가. 이 순간 국가의 명예를 빛내고 문화예술인과 온 국민에게 희망을 안겨준 한강 작가는, 스웨덴의 밤을 빛낸 수상자로서 스톡홀름 노벨 만찬에서 ‘생명 파괴하는 모든
말은 달려보아야 그 힘을 알고 사람은 겪어봐야 진면목을 알 수 있다는 것은 고전의 교훈이요. 우리들 체험적 삶의 진실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견뎌내는 일이다. 한 문장으로 쉽게 표현한다면 ‘삶 = 인내’라는 등식이다. 지금껏 내 삶은 작은 물웅덩이 하나쯤 될 만한 눈물을 흘리는 길이었다. 그래서 인생은 제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데 동의하며 살아갈 이유가 되기도 했다. 또한 모든 것을 단념하고 산속으로 들어가 오두막살이를 할 결단도 버팀의 의지와 능력도 부족했다는 것도 사실이다. 사람은 제 각각의 인생을 살게 되어 있다. 성공과 실패는 세상의 가치로 판단하는 것. 내가 살아오면서 공부한 인문학과 철학을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진정한 철학은 인문학과 공존하게 된다. 인문학은 자유와 평등한 인간애를 생각하는 휴머니즘적 삶의 가치를 소중히 하는 학문이요 공부이다. 그런 가운데 인간으로서 도리를 생각하며 각자의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다. 어느 날, 나는 내 어머니와 외할머니 그리고 그 윗대 조상들은 어떻게 웃음과 친해질 수 있었으며 허허 허! 하는 마음가짐으로 삶의 무게를 지탱해 왔을까 하는 생각에 이르렀다. 또한 헛웃음이든 가짜 미소든 지성적인 유머와 해학이
나의 사회적 첫출발은 1996년 곡성군청 건설과다. 출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늦가을, 점심시간 뒤 의자에 앉아 햇볕사냥을 즐기고 있는데 군수실 이 양이 앞으로 지나가면서 ‘김 주사님 구두 멋있네요.’ 하는 것이었다. 순간, 나는 ‘사람은 안 보이고 구두만 멋있어 보이는가요?’하고 응대했다. 그 농담 같은 유머로 우리는 그날 퇴근 뒤 함께 영화까지 보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외롭지 않게 객지에서 공무원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어느 날 둘이서 시골에 있는 우리 집을 가기로 하고 가는데 산길을 넘어야 했다. 눈 쌓인 산길 북풍을 정면으로 맞서 돌진하며 힘겹게 걸었다. 동행하던 그녀는 지쳤는지 나에게 노래나 한 곡 불러달라고 했다. 나는 ‘맨발의 청춘’을 불렀고 둘이는 웃으며 산을 넘었다. 소설가 이청준의 『눈길』은 눈(眼) 길이 아닌 겨울에 내리는 『눈길』이다. 서울에서 자리 잡지 못하고 사는 젊은이가 남쪽 고향을 다니러 왔다 하룻밤만 자고 가는데 세상천지가 온통 눈이었다. 그런 산속의 눈길을 어머니와 아들 둘이 걷고 걸어서 차부(정류소)까지 가서 아들은 서울로 가는 차를 겨우 타고 어머니는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런데 사지가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온몸이 마
어느 작가가 여행길에서 인터뷰를 했다. 그런데 그는 11월인데도 벚꽃이 피고 토마토는 착과가 되지 않는다고 걱정하는 농부를 만났다고 했다. 기후재난이라는 새로운 도전에 맞설 기술은 과거의 관성을 누가 먼저 깨느냐에 달려 있다고 한다. 기후재난은 과학자들의 예측을 넘어서고 있는데, 권력자도 기업가도 과학자도 교육에서도 기후재난 앞에서는 누구 하나 용기 있게 얘기하는 사람이 없다. 연기처럼 희미하게 그 문제 자체가 잊어지는 게 우선 당장은 다행이라는 것인가. 11월도 중순이어서 일까. 그동안 추위 걱정 않고 지냈으니 이제 기후재난 속 겨울의 길목에서 추위에 따른 체험적 경험을 쌓으라는 듯 바람은 차갑고 드세다. 온기가 없는 곳에서는 생명이 자랄 수 없다. 인간은 에덴동산에서부터 혼자 살 수 없도록 창조된 것일까. 사랑하는 이를 잃고 가정이 삶의 근원이요 문명과 문화의 기초되는 곳이라는 인식을 체감한다. 그런 가운데 어느 날 문득 걱정의 늪 속에 빠져버린 느낌이다. ‘있을 때 잘해’라는 대중가요 가사가 실감 난다. 글쓴이로 살아오면서 저렇듯 딱 부러지게 공감할 수 있는 유행가 가사 하나 없구나! 하는 자책도 따랐다. 나에게 희망이 있다면 아파트 옆 동에 살고 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