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보리가 일렁이는 1970년 5월, 목포에서 출발한 여객선을 타고 네 시간 만에 보길도에 내렸다. 안개비를 맞으며 첫 부임지인 보길초등학교에 도착했을 때, 옅은 막걸리 냄새가 섞인 교장 선생님의 환영사에 정을 느꼈다. 완도군에서 가장 빼어난 자연환경의 학교라며 축하해주던 곳이 멀고 깊은 섬이라니. 고산 윤선도가 제주도로 은신하러 가는 중에 풍랑을 만나 들렸다가 13년을 지낸 보길도는 그분의 자취가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첫발을 디딘 곳을 ‘등문’이라 하고, 잠시 고향에 가기 위해 배를 탄 곳을 ‘청별’이라 한 지명이 어찌 그리 예쁘던가. 고산이 머문 집터의 주춧돌이나, 이집 저집 안방에 붙어 있는 먹물 묻은 벽지에 숨어 있는 이야기는 값진 보물이었다. 고산이 정성을 쏟아 조성하고 아낀 운동장 옆의 새연정은 아이들의 미술실이고, 냇물을 타고 온 수달이 밤에 비단잉어를 사냥하고 머리만 남겨 놓은 새연지 안의 바위는 생태계의 학습장이 아니던가. 밤새 뚝뚝 떨어지는 동백꽃과 돛대 끝에서 떨고 있는 칼바람 하며, 제비와 동박새가 멱살잡이로 차지하려는 둥지와, 허기진 주민의 삶도 가공하지 않은 글 소재였다. 어느 교수가 고산 연구차 왔을 때 고산 집이 있던 부용동의 주민
수원시의 전 농촌진흥청부지에 국립농업박물관이 건설 중이다. 건물과 접한 작은 산에는 산림자원과 철새의 산란지를 보호하기 위해 철조망으로 둘러싸여 있다. 자물쇠가 잠겨있어서 관계자 외에는 들어갈 수 없다. 이곳에는 우리나라에 큰 공헌을 한 육종학자 우장춘 박사의 묘가 숲속에 외롭게 있다. 현재 우리나라 곡류 자족률은 40%도 안 되어 수입으로 대처한다. 최근 농촌진흥청과 농림 식품기술기획평가원에 따르면 양파는 80%가 일본산 종자로 이중 만생종 양파는 90%가 일본 종자라 했다. 마늘은 80%가 중국과 스페인산 종자다. 고구마는 연간 국내에서 생산되는 40t 중 95%가 일본산 종자다. 파프리카와 단호박도 네덜란드와 일본에서 종자를 들여온다. 모두 권리에 대한 대가를 지급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장춘 박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우장춘은 우범선과 일본인 사카이 사이에서 1898년 4월 9일 일본 도쿄에서 태어났다. 성장하여 동경제국대 농학부를 졸업하고 일본 농림성 농사시험장에서 근무했다. 일본 여인 고하루와 결혼하여 2남 4녀를 두었다. 꾸준한 연구로 유채와 배추과 작물의 게놈(Genome)을 분석하고, 세계 최초로 자연종을 합성하여 새로운 종을 만들
시간은 나의 생을 자꾸 갉아먹는다. 잠자리에 들어서 하루의 일이 정리되지 않아 뒤챌 적에 뜨악 뜨악 소리를 내는 벽시계는 어둠 속으로 수명을 자꾸만 끌고 간다. 시계가 없으면 시간관념이 덜할 터인데 금전을 들여 사다 놓고 생이 짧아지는 소리를 태연히 듣고 있으니 아직은 나이에 대한 의미를 따질 때가 안 되었나 보다. 생명도 없는 시곗바늘의 방향에 따라 분주히 움직이는 나의 생활이 실속을 차릴 때도 있지만, 대개는 안갯속을 허우적거리다가 빈손만 쥐고 만다. 어느 회화전 초대에 기꺼이 응했다. 그림에 문외한이라서 걸려있는 작품이 어마어마한 가치가 부여되었으리라 여기면서도 나와는 동떨어진 세계로 느껴진다. 그림 중에 새장 밖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는 새는 눈동자가 죽어있어서 날아갈 곳을 찾지 못하는 모습으로 보이고, 반원의 철제 위에서 꼬챙이에 꽂혀있는 생선 뼈의 조각은 주제인 「슬픈 잠」이 아닌 고철 그 자체로만 보인다. 꾀나 심각한 표정으로 감상하는 무리 속에서 나는 공간 속에 떠 있는 이방인이 되었다. 그림을 볼 줄 모르는 부끄러움보다는 현대에서 소외되는 지독한 외로움이다. 외로움을 감추며 휘적휘적 걷는데 붉게 타는 화폭 앞에 걸음이 멈추어졌다. 온통 붉은 바탕
광주광역시 무등산 자락 망월동 공원묘지 입구 한쪽에 쇠로 긁어서 아무렇게나 쓴 ‘전두환 전 대통령 내외 민박기념 표지석’이라는 조그마한 대리석이 흙과 수평으로 누워있었다. 사람들은 굳은 표정으로 사연을 알 수 없는 표지석을 밟고 들어갔다. 생겨서는 안 될 신군부의 선두에서 민주화를 부르짖는 광주시민들을 무참히 살해하도록 지시한 무소불위의 전두환. 1980년 5월, 광주 민주 항쟁을 진압하기 위해 군 헬리콥터에서 전일빌딩에 사격한 목격담을 당시 고 조비오 신부가 증언했다. 그러나 전두환은 그의 회고록에서 헬기 사격 목격이 거짓이라 주장하여 조 신부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4월 27일 광주지방법원에 들어서던 그도 늙어 초라한 모습이었다. 당일 검찰 측은 재판과정에서 나온 헬리콥터 사격 목격자의 증언과 헬리콥터 사격에 의한 전일빌딩의 과학적인 탄흔을 위시한 2018년 국방부 헬리콥터 사격 조사위원회의 보고서를 제시하였음에도 그는 부인했다. 나는 광주시에서 살다 80년도 말에 경기도로 직장을 옮겼다. 당시 경기지역민은 광주 민주 항쟁의 진실을 왜곡하고 있었다. 지식인인 직장 상사마저 일게 지역의 불만을 표출한 폭동이라며 역정을 냈다. 외국에서 방영되었던 그때의 참상
세계에는 3대 국제기구가 있다. 1961년에 경제발전과 세계 무역의 촉진을 위해 유럽경제협력기구(OEEC)를 설립하였는데 1964년에 아시아와 다른 지역에 문호를 개방하여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로 변경했다. 우리나라는 1996년에 29번째 정회원국이 되었다. G7(group of 7)은 1975년에 프랑스에서 세계정세에 대한 기본 인식을 같이하고, 선진공업국 간의 경제정책 조정과 협력을 위해 모인 단체다. 참가국은 프랑스, 미국, 영국, 독일, 일본, 이탈리아, 캐나다 외에 유럽연합 의장국이다. G7은 1인당 국민소득이 높고, 인간 개발지수가 높으며, 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에서 인정하는 선진 경제국에 들어야 한다. 또 개발원조 위원회와 파리클럽 멤버에도 들어야 한다. 여러 면에서 스스로 앞선다는 나라끼리 만든 단체이기에 국민소득이 높아도 그에 들지 못한 나라는 소외되어 자존심이 상하지만, 감수할 수밖에 없다. 그 후 1999년에 G7국가에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신흥국 12개국과 유럽 연합이 포함된 모임이 G20이다. 국가 간에 경제와 금융에 관한 정책 동향과 현안에 대한 정보교류를 하며, 세계경제 성장과 안정을 위해 지속적인 협력을 하는데 목적이 있다. 사
우리에게 뚜렷한 계절이 있다는 것은 대단한 행운이다. 더운 여름에는 눈이 펑펑 오는 겨울을 그리워하고, 겨울에는 꽃이 만발하는 봄을 기다리는 희망이 있다. 그런 봄이 어김없이 찾아왔다. 바람조차 졸고 있는 호수에서 아지랑이가 하늘거린다. 호수 길 따라 산책하는 삽살개가 주인을 앞섰다 되돌아오기를 반복하며 신이 났다. 원앙새 떼도 활기차다. 수컷 원앙의 머리 위로 펼쳐진 청록색 깃털에 윤기가 자르르하다. 지난해 수명을 다해 누운 물풀 사이로 어미 잉어가 천천히 배회하는데 곁에서 어린 물고기는 무리를 지어 노닌다. 저 멀리 물닭은 자맥질이 한창이고. 봄은 사람을 들뜨게 한다. 베란다에 앉아 진한 커피 향에 취했을 때 새눈 돋는 나뭇가지에 훈풍이 스치면 마음은 앞서서 날개를 단다. 그리하여 수취인도 없는 엽서를 산 넘고 강 건너 실체 없는 임에게 띄우는 허황한 꿈을 꾸게 한다. 봄에는 친구가 곁에 없어도 무방하다. 발길 따라 걷다 보면 마주치는 것마다 친구고 말동무다. 그중에서도 흙을 뚫고 머리를 치켜든 새싹은 반가움의 극치다. 새싹 앞에 앉으면 대지에서 울리는 봄의 소리가 쿵쾅쿵쾅 들린다. 그 소리는 희망의 울림이요, 환희의 경적이다. 돌돌돌 시냇물 따라 능수버
의학이 발달되지 않고 위생관념이 적었던 과거에 전염병이 돌면 수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다. 우리나라 전염병 역사를 보면 백제 온조왕 4년에 역병이 돌았다는 최초의 기록이 있다. 이후 신라와 통일신라 말까지 모두 31회의 역병 유행이 삼국사기에 있다. 고려시대에는 이질과 학질, 임질, 소아 완두창, 광견병, 급성 편도선염, 디프테리아 등의 역병이 20여 회 발생했다. 조선시대인 15세기의 대표적인 전염병 유행은 황해도에서 주기적으로 유행한 뇌척수막염이 있었다. 18세기에는 천연두를 포함하여 홍역이 크게 유행했는데, 정조대에 홍역이 천연두보다 더 심각한 피해를 주었다. 19세기 초에는 처음으로 콜레라가 중국으로부터 의주를 거쳐 전국에 유행하였다. 특별한 치료법이 없었던 콜레라는 공포의 역병이었다. 근래의 노무현 정부 때 사스는 확진자 3명에 사망자가 없었고, 이명박 정부 당시 신종 플루 확진자는 74만835명에 사망자가 263명이었으며, 박근혜 정부 때 메르스 확진자는 186명에 사망자가 39명이었다.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사례는 흑사병과 독감이다. 흑사병은 14세기부터 유행해 유라시아 대륙을 쓸고 갔다. 영국에서는 흑사병 전염 한 번으로 인구의 30~50%가 사망
1월 1일은 누구나 새로운 마음가짐과 설렘으로 해를 맞이한다. 해가 바뀌었으니 지난해보다 더 나은 삶을 위한 각오와 기대가 가득하다. 그러나 이날을 설이라 하지는 않는다. 우리 조상은 음력 1월 1일을 새해 첫 날로 정해 설이라 하여 가장 큰 명절로 여겼다. 오는 25일이 설이기에 4일간의 연휴기간 동안 고향과 부모를 찾아 즐긴다. 삼국사기에 백제는 261년에 설맞이 행사를 하였고, 신라는 651년 정월 초하룻날에 왕이 조원 전에 나와 백관들의 새해 축하를 받았는데 이때부터 왕에게 새해를 축하하는 의례가 시작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일제 강점기에 들어 양력을 기준으로 하면서 양력 1월 1일을 설이라 하고, 음력설은 강제로 쇠지 못하게 하였으나, 오랜 전통에 의해 실효가 없었다. 광복 후에도 양력설에 3일을 공휴일로 하였다. 그러나 전두환 정권 시에 2중과세가 문제되고, 정권 반대 시위가 심해 민심을 달래기 위해서 1985년에 설을 ‘민속의 날’이라 하여 공휴일로 하였다가 귀향 인파가 늘어나면서 ‘설날’로 정착되어 현재에 이르렀다. 음력은 과학적이지 못하다는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더러 있다. 양력은 태양을 중심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날짜가 계절에 잘 맞는 것은 당
한 장 남은 달력에 국회의사당을 배경으로 가오리연이 하늘거린다. 대립과 싸움으로 얼룩진 역사를 떨쳐내고자 하는 열망인지 꼬리를 흔들어댄다. 되새기고 싶지 않은 한 해로 그 중심에 국회가 있다. 국회의원은 선거를 통해 선출되어 국민의 의견을 대표하기에 책임과 사명감을 가지고 헌법과 법률을 개정하고, 의결과 관련된 일을 하며, 정부 예산안을 심의 확정하는 업무를 담당한다. 국가나 국민에게 중대한 재정적 부담을 지우는 조약이나 입법사항에 관한 조약을 체결하고 비준에 대한 동의권을 행사한다. 정부의 예산안에 대한 심의와 수정을 통해 예산안을 확정하며, 국가의 수입과 지출에 대한 결산을 심사한다. 또한 국정감사와 조사를 통해 국정이 법에 따라 잘 운영되고 있는지를 감시하고 잘못된 부분을 적발하여 시정하도록 한다. 이 처럼 임무가 막중함에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상대편을 비방하고 공격하며 싸우느라 국회를 도외시하고 국민을 외면하며 한 해를 보냈다. 민생을 위한 절박한 법안조차 자기들이 원하는 조건을 관철시키기 위해 끼워 넣고 협상하는 그 행위는 차마 못 볼 일이다. 오죽하면 국회 무용론이라는 말이 나왔을까. 그들은 상류층으로 고등교육을 받았기에 예의와 교양을 겸비하고
단풍이 들기 시작하면 어김없이 병이 찾아온다. 몸에는 이렇다 할 증세가 없는데도 무력증에다가 어떤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심란해진다. 남들은 오히려 생기가 나서 팔팔 뛰며 청춘이 되살아난다는데 말이다. 늦 코스모스가 가느다란 줄기에 몇 송이 매달려 하늘거리는 모습에서 마음이 새록새록 저려 온다. 하물며 보도에 가득히 쌓인 은행잎을 밟기라도 하는 날이면 가는 목적도 시간관념도 잊은 채 정처 없이 방황하게 된다. 붉다 말고 엷어진 단풍나무 곁을 지나다 옷에 고운 색깔이 배면 황홀해서 가슴을 새록새록 앓는다. 가을에 오는 병의 원인은 많기도 하다. 공해에 찌든 하늘이라고는 하나 그래도 가을 하늘은 역시 높고 푸르다. 그런 하늘을 보고 있노라면 깊이 잠적하고픈 생각으로 병이 난다. 저녁노을은 가을이라야 제 빛깔이 난다. 연한 주홍색이 물결처럼 일렁이는 곳에 붉은색이 서너 줄 아로새겨진 노을이 줄줄이 내게 뻗쳐 왔어도 손으로 잡지 못해 안타깝다. 사계절 중 가을에 뜨는 보름달은 유난히 사색적이다. 미루나무 가지에 걸려 절구질을 멈춘 옥토끼 한 쌍이 폴짝 뛰어 내릴까봐 가슴은 콩당거리고. 고추잠자리가 마당에서 맴을 돌면 나는 벌써 수십 년 뒤로 돌아가는 병을 앓는다. 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