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을 사전에서는 ‘맨 처음으로 느끼거나 맺은 사랑’으로 맺은 것뿐만 아니라 느낌도 첫 사랑으로 정의하고 있다. 유태인의 규범이 돼 있는 탈무드에서 사랑을 ‘세상에는 열두 가지의 강(强)한 것이 있는데, 첫째는 돌이 강하지만 돌은 쇠에 의해 깎이고 쇠는 불에 녹아 버린다. 불은 물에 의해 꺼지고 물은 구름 속으로 흡수돼 버린다. 구름은 바람이 불면 날려 가지만, 인간을 날려 버리지는 못한다. 그 인간도 공포에 의해 비참하게 일그러진다. 공포는 술에 의해 제거 되지만, 술은 잠을 자고 나면 깨게 된다. 그 수면도 죽음만큼은 강하지는 않다. 그러나 그 죽음조차도 사랑을 이기지는 못한다’라고 정의했다. 사춘기가 시작될 무렵 이성에 눈을 뜨는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그 이후 어느 날인가 사랑을 만나게 된다. 서로는 아직 사랑이라는 진정한 의미를 모른 채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것이 평소 주위 사람들에게 따뜻한 사랑과 정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이성의 사랑에 더욱 빠지게 된다. 서로는 꾸밈이나 가식은 결코 없으며, 아니 그럴 필요도 느끼지 않게 된다. 서로는 실제 미래에 살지 않으면서 미래 속에 있다. 서로에게 지난 과거는 결코 중요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관심도 없으
급제(及第)의 사전적 의미는 역사적으로 ‘과거시험에 합격됨’인데 오늘날에 적용하면 시험에 합격하거나 통과 의례를 거쳐 사회적 지위를 얻게 되는 것으로, 자신의 목표가 성취되어 성공이나 출세하는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학교의 우등생이 사회의 낙제생이며, 학교의 낙제생이 오히려 사회의 우등생이라는 말을 한다. 이는 공부하기 싫어하는 젊은이들이 갖는 한갓 자연의 변이라고 하겠지만 그 나름대로의 진리가 담겨 있는 것 같다. 희랍의 어느 철인이 천문학에 열중하여 하늘의 별만 보고 걷다가 개울에 빠졌을 때에 지나가가던 노파가 ‘이 사람아! 자기 발밑도 못 보는 주제에 수억만리 떨어진 별의 세계를 어떻게 알겠다고...’라고 놀렸다는 얘기가 있다. 우등생이란 어쩌면 이렇게 먼 앞날만을 바라보고 별을 쫓는 격으로 인생을 살아가다가 바로 눈앞에 있는 개울을 못 보는 경우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인간은 누구나 한번밖에 없는 죽음을 아끼고자 하는 욕망이 있으며, 그 죽음을 얼마나 값지게 맞이할 것인가를 바라보며 공부도하고 돈도 벌려고 한다. 옆도, 뒤도 돌아보지 않는 우등생이 때로는 사회에서는 여름밤의 부나방과 같은 낙제생이 될 수도 있지만, 눈앞에 닥친 시험을 두고도 괘념
성경에서 ‘체벌을 두려워하는 자는 자식을 망치게 한다.’라는 구절이 있는데, 잠언에서 우리의 자녀교육에 대한 많은 가르침이 있으니 그리스도인이 아닐지라도 익힐 가치가 크다. 요즈음 세분·분업·전문화된 산업사회의 발달로 말미암아 자녀와의 대화시간이 적어지거나 없어졌다고 한다. 어쩌다 대화시간이 마련되면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부모들은 자녀들 앞에서 자신의 이야기로 열을 올리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자녀와의 대화는 아닌 것이다. 진정한 자녀와의 대화는 자신의 마음을 비우고 자녀들이 허심탄회하게 자신의 뜻을 부모에게 토로하고 상의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리고 문제점을 찾아 적절한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문제가정에 문제아는 생기게 마련인 법이다. ‘부모가 반 팔자’라는 말이 있다. 또한 ‘부모가 온 효자 되어야 자식이 반 효자’라는 말이 있다. 사람은 어떤 부모를 만났는가 하는 것이 자기 운명의 절반을 결정한다는 뜻으로, 사람의 운명이 부모에 의해서 크게 영향 받게 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며, 그리고 부모가 잘해야 그 자식이 효자 노릇을 하게 된다는 의미다. 상황에 따른 자녀와의 대화법을 살펴보기로 하자. 공부에 관해서는 왜 공부를 잘 해야 하는지 이유
슬하(膝下)라는 말은 사전적 의미로 ‘무릎의 아래’라는 뜻으로 ‘거느리는 곁이나 품안, 주로 부모의 보호영역’을 이를 때 쓰는 말이다. 정중하거나 조심스러운 표현으로 상대의 자식 숫자를 물을 때 우리는 보통 ‘슬하에 자녀를 몇이나 두셨나요?’ 라고 묻는다. 문자 그대로 자식은 부모의 보호영역에서 거느려야 하는 대상이다. 유태인의 자식교육법에서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할 수 있는 몇 가지를 들어보자. 유태인들은 ‘남보다 뛰어나라.’가 아닌 ‘남과 다르게 되라. 싫으면 그만 두어라보다는 최선을 다하라.’ 라고 가르친다. ‘자녀를 오른손으로 벌을 주고 왼손으로 껴안아 준다. 아버지는 유산을 남기지 않겠다고 미리 말한다. 자기의 노동으로 돈을 버는 것을 가르친다. 가족끼리 함께 하는 시간은 좋은 교육기회라는 것을 인식시킨다.’ 그래서 유태인들은 저녁시간 가족들 모두 한자리에 모여 탈무드를 읽었던 것이다. 바로 그 자녀들이 자라, 비록 소수 민족이지만 각계각층에 인재들이 많아 거대 미국을 이끌어 나가는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한 국가의 번영과 안정은 가정의 자녀교육이 초석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녀교육은 가족의 기본적인 기능으로 자녀를 낳아 길
※어제(20일자) 1편에 이어 계속됩니다. 성공을 위해서는 먼저 목표를 설정해야 한다. 그리고 문제가 생겼을 때 그 문제가 아무리 어렵고 힘들더라도 절대로 중단하지 말아야 한다. 인생의 가장 큰 영광은 결코 넘어지지 않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넘어질 때마다 일어서는 데 있는 것이다. 끊임없는 노력만이 성공의 보상(1954년 노벨상을 수상한 미국의 소설가 헤밍웨이는 ‘나는 어쩌다 성공한 것이 아니라 인고의 힘든 과정을 통해 성공에 이르렀다.’고 말했다.)이라는 각오 아래 성실히 노력하며, 자기불신은 실패의 가장 큰 원인이라 생각하고 매사에 자신감을 갖고 생활해야 한다. 또한, 결코 남의 것을 욕심내지 아니하며, 부모나 동기간에게 의타심을 갖지 아니하며, 남을 무너뜨리고 일어서려는 마음보다는 스스로 일어서는 인격을 갖추어야 한다(헤밍웨이는 ‘성공에서 중요하고 없어서는 안 될 것이 인격, 즉 품성이다.’라고 말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속에는 열정을, 행동에는 용기를, 어려울 때는 끈기를, 그리고 자존심이 꺾일 때는 때론 오기도 가져야만 한다. 자신이 고생해서 삶을 이룩한 사람이라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훨씬 더 삶의 가치를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본래 사람
자수성가(自手成家)와 입신양명(立身揚名)의 사전적 의미는 무엇일까? 자수성가는 물려받은 재산이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어엿하게 한 살림을 이룩하는 일이며, 입신양명은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고 높이 되는, 다시 말해 사회적으로 기반을 닦고 출세하여 이름을 세상에 드날린다는 말이다. 둘 중 더 성공적 의미는 입신양명이지만 한사람 일생의 가치 면에서는 타고난 두뇌나 자질보다는 자신의 힘만으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노력형 인간의 자수성가일 것이다. 자수성가란 꼭 재정적 부자가 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또한 노력하는 모든 사람이 다 자수성가할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부모가 물려준 물질적인 유산은 없어도 강인한 정신력, 강건한 체력, 근검 절약정신이 있고 역경을 이겨낸 경험을 들려준 이야기나 인내심을 길러주고, 신용을 잘 지키도록 가르쳐준 간접적인 부모교육의 효과가 필요하기도 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본인 스스로 삶에서 느끼고, 다짐하고, 행동하며 살아가는 삶의 자세가 더 필요하다 하겠다. 성공은 노력과 운이 따라야 하지만, 노력하고 있는 사람에게만 운은 따르는 법이다. 1986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나이지리아 소잉카에게 수상계기를 물었더니 대
형제의 사전적 의미는 무엇일까? 형제는 같은 부모를 가진 남성들을 아울러 일컫는 말로 부모 양쪽 모두가 같거나 부모 한쪽이 같은 경우 모두를 포함하며, 동기란 형제와 자매, 남매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우리 인간은 오복(?)을 타고나야 이승에서 남부러울 것이 없는 행복한 삶을 누렸다고 자신할 수 있을 것 같다. 오복에 해당하는 것은 부모 복, 형제 복, 배우자 복, 자식 복, 주변사람 복이라 할 수 있는데, 농구 황제라고 불리는 ‘조던’에게는 ‘래리’라는 형이 있었다. 어릴 때부터 운동에 한 수 위였던 형 래리는 동생 조던에게 농구를 가르쳐 주었는데, 이후 키가 자라지 않은 형은 미국 프로농구 마이너리그에서 뛰었고, 반면에 키가 훌쩍 컸던 조던은 NBA 황제로 불리며 스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이렇게 조던이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때론 경쟁자요, 때론 조용한 후원자였던 형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부모와 형제는 천륜의 관계이다. 형제는 끊을 수 없는 관계이고 형은 아우를 사랑하며 아우는 형을 존경해야 한다. 형제는 열 손가락과 같은 것이며 형제는 차례가 있는 법이다. 형제는 물질보다 귀중한 것으로, 물질은 감정이 없지만 형제는 동정이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언어, 영어를 배우는 것은 새로운 세계에 대한 접근방식을 암시하고, 또한 지적인 경험의 확장을 의미한다. 들었을 때 그것을 이해하고, 말하고 쓸 수 있을 정도로 새로운 언어를 잘 구사하려면, 우리를 강하게 몰아붙이는 확실하고 뚜렷한 충동이 필요하다.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것이 독창적이거나 비판적인 능력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지만, 강한 지적 호기심과 인간의 사상이 표현될 수 있는 무한한 방식에 대한 지속적이고 활기 넘치는 관심이 필요하다. 무엇보다도 재빠른 관찰력, 적절한 흉내와 모방능력, 좋은 연상과 일반화 능력, 오래 유지되는 기억력 등이 요구된다. 그것은 우리의 정신능력을 향상시키고, 주의집중력을 활성화시키며, 조심성의 증대와 감수성을 강화시킨다. 또한 정치적, 문화적, 과학적, 학문적으로 자신의 분야에서 많은 기회를 부여받게 되어 성공으로 가는 지름길이 될 수도 있다. 오늘날 국제화시대에서 영어는 단지 시험을 통과하기 위한 요구조건은 아니다. 영어는 이미 자신을 표현하고 상대를 설득하는 국제적 사고이며 문화이다. 또한 영어는 공적인 시험의 욕구충족 이외에도 해외여행에서의 더 큰 편리함과 즐거움을 느낄 수 있고, 사업가들은 직·간접적으로 영어 서신
대학교육은 장차 자기실현을 할 수 있는 인간을 길러내는 데 그 최종적인 목표를 설정하고 있다. 대학교육 4년 또는 6년의 과정을 거쳐 사회에 나서는 한 인간이 그 사회와 민족 내지는 국가, 인류사회의 발전을 위해서 자기실현을 할 수 있는 유능한 인간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대학교육의 목적이요, 그 목표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대학교육은 이 목적 내지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방편으로써 두개의 채널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전공교육이고 다른 하나는 교양교육이다. 이 두 채널 중 어느 쪽에 더 비중을 두어야 할 것인가? 그것은 스위스 사상가이자 교육자인 페스탈로치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직업인이 되기 전에 인간이 되도록 교육하라.’는 것이 대학교육의 목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교양이란 무엇인가? 교양 있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인격에 품위가 있어야 하고, 언어가 고상하고 행동에 예절이 있어야 한다. 대학은 지성적 교양인의 집단이며 문화인의 요람을 말하는데 좀 특정한 지식이나 기술을 습득하여 취업을 도모하게 하는 직업학교와는 달리, 대학생활의 전 과정을 통해 이상적 가치관과 인생의 목표를 눈앞에 바라보면서 함께 토론하고 함께 추구하는 가운데 스스로 고매한 인격을 형성해
그리스의 철인 아리스토텔레스가 내렸던 행복의 정의를 보자. ‘사람들은 자기가 바라는 것을 얻게 될 때 행복하다고 느낀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바람을 1차적 바람과 2차적 바람으로 분류했다. ‘1차적 바람은 돈·명예·좋은 음식 등의 본능적인 욕구가 해당되며, 2차적 바람은 그 바람이 사회적으로 바람직하며 정말 좋은 것인가를 확인하는 일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1차적 바람과 2차적 바람이 모두 충족되는 것이라야 진정한 행복이라고 정의했다. 이는 본능적 욕구와 사회적 욕구가 합치되기를 바라는 행복론으로 결국은 사람 사는 사회에 참다운 행복은 없다는 말로 들릴 수도 있다. 인간의 행복은 자신의 처한 위치에서 성실과 노력으로 그 노력의 대가를 보상받을 수 있으며, 적으나마 자신이 목표로 내세운 것을 성취할 수 있고, 가정의 화합을 이뤄나가며 미래를 설계해 나가면서, 베푸는 삶을 살아가는 안분지족한 생활을 할 뿐만 아니라 미국의 사회사업가이자 작가인 헬렌켈러의 말처럼 ‘자신이 가진 것의 가치를 인정’하는데 있다 하겠다. 한마디로 공기의 20%는 산소, 숲속의 50%는 나무, 지구의 70%는 바다, 사랑의 90%는 희생, 행복의 100%는 만족하는데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