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가을햇살이/예순 두해 전, 일들을 기억하는 그 햇살이/그때 핏덩이 던 할아비의 주름진 앞이마와/죽은 자의 등에 업혀 목숨건진/수수깡 같은 노파의 잔등위로 무진장 쏟아지네/거북이 등짝 같은 눈을 가진 무리들을 바라보네/성산포 “앞바르 터진목”/바다물살 파랗게 질려/아직도 파들파들 떨고 있는데/숨비기 나무줄기 끝에/철지난 꽃잎 몇 조각/핏빛 태양 속으로 목숨 걸듯 숨어드는지/섬의 우수들 뿔처럼 번지는데/성산포 4·3희생자 위령제단 위로/뉘 집 혼백인양 바다갈매기 하얗게 사라지네, 제주도 강중훈 시인의 ‘섬의 우수’다. 공직에 재직하면서 보증을 서 급여압류까지 당했던 시인은 시인의 의지와 무관한 ‘해 뜨는 집’에 정착하는 계기였다. 제주도 성산읍 성산포일출봉 중심으로 우도와 옥녀봉이 있는 4·3영령들과 사는 시인은 진혹곡 같은 아픔, 분노, 증오, 미움, 저주로 4·3영혼들과 살아간다. 섬 소년으로 아픔을 안고 성장한 시인은 4·3에서 아버지를 잃었다. 아버지는 이발을 하러 가신다고 외출을 한 후,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고 계신다. 사랑하는 아버지를 기다리는 시인은 대문을 열어두고 잠을 잔다. ‘해 뜨는 집’에는 장편소설 ‘황금물고기’저자인 노벨문
조천포구 방파제 여름은 따뜻했다. 시나리오 작업으로 제주도를 찾았다. 제주도에는 현길언, 현기영 소설가를 비롯한, 나기철 시인 등 문인들이 있다. 마을들을 서성이다가 만두가게에 팜플렛이 눈에 들어왔다. 조천읍은 2만 명 정도가 산다. 민족자존의 고향으로 불리는 3.1운동 만세로는 이곳 주민들의 자긍심과 우리역사의 숨결로 남아있기 충분하고, 이곳 용천수는 바다 물로 짠물이지만 단물로 관광지로 손꼽힌다. 노을음악회가 열리는 방파제에 자리했다. 바람은 불고 비가내릴 듯 공연이 불안했지만 주민들이 준비한 음악회는 흥에 겨웠다. 행사를 기획한 김형진 한마음 회장은 음악을 통해 한밤의 선율을 만끽하자며 내가 사는 이웃과 가족, 조천리 아름다움을 밤하늘에 감미로운 감동으로 우정을 나누자고 인사를 했다. 육지에 살다가 섬으로 들어온 외지인, 그리고 제주시내에 살다가 이주한 시민, 본토마을을 지키는 주민들이 지혜를 모아 공동체정신과 갈등을 해소하는 화합의 장을 마련한 것이다. 색소폰, 합창, 오라통기타, 제주브라스 퀸탯 연주로 제주에서 살며 동아리음악가족들이 하나의 선율을 내는 장기자랑이었다. 40대 후반에서 60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들의 얼굴에 노을빛이 더 선명했다.
가을은 사색의 계절이라 하지만 세상이 어수선하다. 10월의 마지막 밤이라도 좋다. 휴먼 인문학도시 수원에서 ‘제4회 세계인문학포럼’이 10월27~29일까지 3일간 아주대학교, 경기도문화의전당, 수원SK아트리움에서 성황리에 열렸다. 수원시가 교육부, 유네스코, 경기도와 공동 주최하는 이번 포럼은 세계적인 인문학 석학들의 강연은 물론 ‘인문학도시 수원’에 걸맞은 의미깊은 행사였다. 수원이 인문학도시임을 세계에 알리는 측면도 있지만 사람이 반가운 휴먼도시의 위상은 평소 염태영 수원시장의 철학에 맞게 많은 시민들에게 아름다운 기억으로 자리매김하기에 충분했다. 개회식에는 수원시장을 비롯한 이영 교육부차관, 조무제 한국연구재단 이사장 등이 참석했고, 철학자이자 작가로 칼럼니스트로 길을 걸어온 로제 폴 드루와와 그의 아내인 저널리스트 모니크 아트랑을 비롯해 83명의 석학들이 자리해 ‘희망, 사람됨의 새로운 길’을 주제로 기조강연이 시작됐다. 일본 나라대학에서 정신분석학자인 가즈시게 신구는 ‘희망이라는 이름의 가장 먼 과거’ 등을 인문학에서 찾았고, 이밖에도 다양한 세션들로 마련돼 시민들의 열기를 뜨겁게 달구었다. 28일에는 독일 뷔르츠 부르크대학 칼 메르텐스 교수의 사회
작가나 시인을 기념하는 문학관은 문화의 산물이다. 문학청소년, 소녀기를 거치면서 문학에 대해 많은 애정을 가지게 된다. 그 애정은 날이 지나면서 하나의 추억으로 기억되게 된다. 황순원의 ‘소나기’는 중학교의 교과서에 나오는 단편소설로 어린학생들을 많이 감동시켰었다. 중년층에겐 아련한 추억처럼 기억이 된다. 김동리나 이효석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김동리의 ‘등신불’이나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은 고등학교 교재에 나오는 단편소설이다. 모두가 낭만이 깃든 소설이다. 나이가 좀 들면, 추억의 기억을 더듬어서 그 작가의 문학관, 또는 문학 기념관을 찾게 된다. 고장이 불국사가 있는 경주이거나, 소설의 배경이 된 메밀밭이 있는 봉평이거나, 독자들에게는 역시 추억이 되는 곳이다. 그곳이 문학도로서 그립지가 않을 수가 없다. 전국에 문학관이 84개가 건립되어 있는데, 문학관 협회에 가입한 곳이 61개라고 한다. 그동안 이 땅에서 시와 소설을 쓰다가 가신 분이 이 숫자보다는 훨씬 많을 진대, 앞으로 더 많은 문학관이 건립되어야 한다. 작고하신 문인 이름만으로 만 문학관을 지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생존해 계신 이름으로도 문학관은 건립될 수도 있다. 동리문학관이 있는 경주
인동초(忍冬草)는 혹한(酷寒)을 견뎌낸 풀을 말한다. 혹한이라 하면 눈, 얼음, 그리고 매서운 칼바람을 지칭한다. 언제부터인가 인동초는 김대중을 상징하고 있다. 그만치 김대중의 삶은 눈, 얼음, 또한 매서운 칼바람 속에서 영위되어왔다. 그것은 유신(維新)시대의 사형선고, 가족들에게 가해진 모진 형벌, 그리고 일본에서의 납치로 배 밑창에 깔려 전신에 붕대를 감고 몸에 무거운 쇳덩이를 달아매는 마지막 순간을 겪는 일. 금세 그런 상태로 바다에 던져지려는 순간 구조되는 운명은 가히 혹한으로 비유돼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이상의 사건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그에 대해 아는 일도 많다. 그러나 일반인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사건도 많다. 그것을 다룬 것이 이 실화소설이다. 두 가지만 담아보자. 전투기가 폭격을 하고 날아가는 순간에 김대중은 처남에게 손짓을 하며 다리 위를 달리기 시작했다. 다리 위에 있는 피난민들은 전투기가 쏟아낸 폭탄 소리에 놀라서 다리 위에 웅크리고 있었다. 김대중이 뛰기 시작하니 몇몇이 같이 따라 뛰었다. 폭격을 하고 날아간 전투기가 선회하면서 다시 돌아오기 시작했다. 김대중은 온 힘을 다해서 다리 위를 달렸다. 햇볕을 가려주는, 얻어 쓴 밀짚
24년째 되는 홍재백일장을 개최하며 시민들과 함께 소통하며 대화를 나누는 뜻 깊은 시간을 가졌다. 언어는 심성이 내는 소리이고 시대의 그림자를 밟아가는 것이다. 연무대에서 부는 바람은 그렇게 깊어갔다. 수원화성을 품은 전통문화 시민으로서 자긍심을 고취한 이번 백일장은 격조 높은 문학 세상을 열어갔다. 아름다운 전통문화 도시에서 펼쳐진 문학의 향연은 모두에게 큰 행복을 안겨주었다. 참여한 시민과 학생들도 성황을 이뤘다. 이 푸르른 날 남다른 기쁨과 보람을 가슴속 깊이 시민과 학생들에게 남겨주었을 것으로 믿는다. 24년째 이어져오는 이번 행사를 위해 특히 애써주신 김기서 수원교육장과 수원인문학도시를 위해 애써주신 염태영 시장께도 감사드린다. 따가운 햇빛을 피할 수 있는 행사장을 마련한 연무초교 권월자 교장 선생님(시인)께도 감사했다. 제24회 홍재백일장 글제는 초등부는 가족, 친구, 자전거, 꿈, 희망, 무지개이며 중·고등부는 감사, 은혜, 봄날, 인연, 정조대왕이었다. 그리고 대학. 일반부는 연무대에서 부는 바람, 인동초, 우리 수원, 청춘, 반려동물, 봄꽃이었다. 각 부문별 수상자에게는 수원시장상, 수원시의회 의장상, 수원교육장상, 경기남부보훈지청장상, 수원
흡연실은 장례식장 바로 건너편에 있었다. 환자들은 그 흡연실에 모여 담배를 빨아댔다. 담배를 피우느라, 또 서로 간밤에 누구와 누구가 만나서 소주 몇 병을 마셨느니, 경비원한테 들켜 강제 퇴원을 당할 뻔하였느니, 쓸데없는 이야기들을 하느라 장례식장에서 벌어지는 일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러나 늦은 밤이나 새벽녘에는 달랐다. 늦은 밤에는 흡연실 앞마당에 검정 옷을 입은 방문객들로 성시를 이뤄 시끌시끌했다. 더러는 소주로 얼얼해진 혀로 소리를 높여 말을 했고, 여기서 한 무더기 저기서 한 팀이 어울려 시끄러웠다. 마치 장마당을 방불케 했다. 예전에는 사람이 죽은 초상집은 울음소리가 나거나 슬픔에 찬 말소리가 들렸으나 요즘은 그런 소리보다 방문객끼리 서로 나누다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가 더 크게 나는 지경이었다. 사람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참가하는데 그 의의를 두고 있어 끼리끼리 모여 낄낄거리는 게 눈에 띄는 장례식장 풍경이었다. 11시에 담당 경비원이 흡연실 출입문을 잠글 때까지 사실은 환자보다 장례식장에 오는 방문객들이 자리를 많이 차지하므로 해서 주인 격인 환자들은 밀려나 대문 밖에서 죽치는 수가 많았다. 그래도 군소리 한 마디 하지 않았다
지동 여울아파트에서 일이었다. 현관의 벨이 울렸다. 한번, 두 번, 세 번…. 연이어 벨은 울렸다. 그리고 계속해서 미친 듯이 울렸다. 우리는 얼떨떨해서 서로 마주 바라봤다. 마치 불이라도 난 듯, 벼락이라도 떨어진 듯, 벨은 제 정신 없이 울렸다. “?” 반사적으로 엉거주춤 몸을 고쳐 앉은 후배를 보고, 현관 쪽을 보며 어안이 벙벙해 했다. “뭐예요?” 후배가 일어서면서 물었다. “가만 있어봐” 나는 움직이려는 후배를 손으로 막았다. 우리 집이므로 손님이 나설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전 10시경이니까 아침 시간이다. 일찍이 이런 일은 없었다. 먼저 우리는 시(詩)얘기를 했었다. 후배가 써 가지고 온 시들에 대해 내가 품평(品評)을 해줬고, 서정시에 대해 이런 저런 얘기를 또 해줬다. 그리고 전날 TV로 중계해줬던 권투 얘기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매니 파퀴아오와 티모시 브래들리의 경기를 나도 재미있게 봤던 참이었다. “파퀴아오의 로드는 환상적이예요. 치고 빠지며 돌고, 또 완투 스트레이트에, 아 보기만 해도 기가 막혀요.” 후배는 감탄을 연발했다. 그는 권투선수였다. 여러 해를 부지런히 권투를 했으나 챔피언이 되질 못했다. 그러다 에라, 시나 써봐야겠다,
그는 65세가 되면서 30여 년을 경영하던 이발소의 문을 닫았다. 이를테면 스스로 정년퇴직을 결정한 것이다. 이발소의 문은 닫았지만 이발(理髮)은 계속하였다. 한 달에 한번 영세한 아파트 복지관에 가 노인들의 이발을 해주었고, 또 인근의 종합병원에 가서 환자들의 머리를 깎아주었다. 돈을 받지 않고 무료로 해주는 것이었다. 월급쟁이 생활까지 합치면 40여 년의 이발 경력이 있으니까 그 기술은 머리를 한 번 깎아 본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에게 머리를 맡기지 않고, 반드시 그를 찾았다. 그 정도의 출중한 기술이라서 복지관이나 병원에 그가 봉사(奉仕)를 나가면 그 아파트 외의 다른 아파트의 사람들도 모여 들었고, 병원에서는 환자들뿐 아니라 그곳의 직원들, 또 병원 밖의 사람들까지 모여들었다. 공짜라 그런 점도 있지만 그보다도 그의 탁월한 이발 기술에 연유한 까닭이 더 큰 이유였다. 이발소를 정년퇴직했지만 그는 이발소를 운영할 때보다 더 바빴다. 이발 봉사를 다니는 날을 제외하고는 한 주에 사흘은 장애아들을 수용하는 복지관에 가서 장애아들을 보살펴 주는 일을 했다. 물론 이발도 해주지만 목욕도 시켜주고 밥도 먹여준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오락도 하며 놀아주었다. 그는
이제 50세가 된다. 수원문학이 그렇게 연령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사람으로 치면 중년에 들어선 것이다. 황금기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이날, 우리 문학인들은 화성박물관 강당에서 기념식을 가졌고, 축하 놀이도 가졌다. 뜻 깊은 일은 수원문학의 발전을 위해 생전에 많은 애를 쓰셨던, 제12대 회장인 수필가 고(故) 이재영님에게 공로상을 드렸다. 이를 대신해 감사패를 받으신 미망인인 고령의 이재희 여사는 아주 감개무량함을 피력하였다. 이와 아울러 노작 홍사용시비건립을 하였고 제1회 경기문학상을 수여하였으며 수장자로 소설가 한천석님이 선정되어 영예로움을 안게 되었다. 수원시뿐 아니라 화성, 오산까지 아우르는 수원문학은 그 규모가 한층 넓어졌다. 초기에는 회원이 84명이었는데 180명으로 증가하였고, 현금에는 250명으로 확산된 것이다. 경하할 만한 회원 수가 된 것이다. 이날 기념식에는 귀한 분들이 대거 참석해 자리를 빛내 주셨는데, 최동호 한국시인협회장, 이광복한국문이협회 부이사장, 전애리 수원예총회장을 비롯해 역대 지부장, 고문, 및 회원 등100여 명이 참석하여 풍성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이밖에 정미경국회의원, 백혜련국회의원, 수원시의회의 한규흠 문화복지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