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속은 고요했다. 적막했다. 풀 내음을 안은 바람이 부드럽게 불어왔다. 어디선가 산새가 울었다. 가느다란 소리였지만 힘이 있는 울음소리였다. 그것은 고요 속에 적막을 찌르는 듯한 짧은 음악소리였다. 묘지는 그런 가운데서 안온했다. 평화로웠다. 평소에 어머니 곁에 있을 때 느꼈던 따뜻한 온기를 묘지는 뿜어내고 있었다. 하늘을 쳐다보니 하얀 뭉게구름이 역시 미소를 지으며 지나가는 듯 했다. 먼 서녘 하늘 아래에/ 어머니 씨앗은/ 슬픈 자의 얼굴이 되고/ 밥이 되었습니다.(박병두 첫시집, ‘오늘은 당신의 생일입니다’ 중에서) 묘지의 뒤쪽 둔덕에 잔디가 더러 없어서 흠집처럼 보기가 좋지 않았다. 가져온 잔디를 뒤쪽으로 옮겼다. 그리고 흠집 난데에 잔디를 덮기 시작했다. 한 뭉치를 덮고 모종삽으로 다지고, 또 한 덩이를 다른 곳에다 덮었다. 생전의 어머니가 간절하게 그리웠다.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나는 태권도 대회에 나간 선수였다. 시합 직전에 어머니는 살아있는 낙지를 주전자에서 꺼내 내 앞에다 내놓았다. 라면봉지 위에서 살아 꿈틀거리는 게 보기에도 징그러웠다. 그것을 내 입에다 집어넣으려고 했다. 나는 싫다고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막무가내였다. 살
“그렇게 될 줄 몰랐던 거지요. 민심을 전혀 읽지를 못 했어요.” 그는 아들 얘기로 시작해서 자기 사업 얘기, 그리고 결국은 선거 얘기로 접어들었다. “알다가 모를 게 민심인 것 같아요.” 나는 소주잔을 비우면서, 지나가는 말처럼 건성으로 지껄였다. “모르는 게 잘못이지요. 그걸 몰랐으니까 쪽박이 난거지” 그도 홀짝 소주잔을 입에다 털어놨다. 내가 그의 빈 잔에다 술을 채웠고, 그는 병을 빼앗듯이 받아 또 내 잔에다 소주를 부었다. 그리고 돼지 불고기 한 점을 입에다 넣고 씹었다. 나도 그가 하듯이 고기 한 점을 입에 넣었고, 잘게 썬 파를 곁들여 넣고 씹었다. 그리고 우리는 말이 없었다. 나는 정치 얘기엔 흥미가 없었고, 그는 땡감을 씹은 듯이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기분이 잡친다는 얼굴이었다. 나는 화제를 그의 아들에게 다시 돌렸다. “영남이가 내년, 군대에 갈 때까지 만이라도 마음 편하게 지내야 할 텐데요” “그게 말이 아니야. 내 사업이 부도가 나니 애들까지 속을 썩여. 그놈의 담배는 왜 끊지 못하는지” “젊은 나이에 어디 그게 쉬운가요. 나이 든 사람처럼 건강에 신경을 쓸 겨를도 아니고” 우리는 다시 입을 다물고 술잔을 기울였다. 시간이 많이 지나갔던
로사는 영세명이다. 그러니까 로사선생님은 천주교회 신자인 것이다. 거기다 대학에서 사회복지학과를 전공하고 국가고시를 치루고 사회복지사가 되었다. 그리고 얻은 직장이 장애인 복지관의 선생님이다. 어린애일 때 영세를 받으며 받은 이름이므로 역시 천주교회 신자인 부모님들이 영세명을 아예 고유의 이름으로 삼고 그대로 호적에다 올렸다. 그래서 다른 신자들과는 달리 영세명 따로 본명 따로가 아니었다. 성은 박(朴)가였으니까 학창시절에 출석을 부를 때에는, 박로사였다. 한국 사람의 이름으로는 생소한 것이어서 중고등학교 시절엔 학생들이 웃고 놀리기 일쑤였다. 그러나 사회복지사가 되면서 장애인들을 지도하고 가르치면서부터는 아예 성은 쏙 빼고 그냥 ‘로사선생님’이라고 불렸다. ‘로사’는 로사리오(rosario)의 줄임 말로, 천주교회 신자가 기도할 때 사용하는 묵주를 지칭하거나, 묵주를 세면서 드리는 성모마리아에 대한 기도를 의미하기도 한다고 했다. 천주교 측에서 볼 때에는 아주 성스러운 이름일 것이었다. 반(班)의 학생수는 모두 8명이었다. 연령대는 20·30대로, 원래는 10명인데 1명은 다른 고장으로 이사를 갔고 다른 1명은 ‘가정사정상’이란 애매모호한 이유로 자퇴를 했
그는 이제 나이 52세로 노련한 간병인이다. 간병의 세계는 거개가 여성들로 짜여져 있는데 그는 어쩌다가 이 세계에 뛰어들어 10여년의 세월을 보내게 되었다. 처음에는 개인병원에서 친척 할머니를 간병하다가 일을 배우기 시작했고, 그 할머니가 퇴원을 하고 옆 침대에 있던 다른 환자가족이 그를 매우 좋게 보고 정식으로 간병인으로 채용하여, 간병인으로 갖춰야할 이런저런 요건을 지니게 된 셈이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이 생활에 끼어든 지도 세월이 만만치가 않은 것이다. 작은 체구에 눈치와 동작이 빠른데다 환자의 짜증이나 투정을 얼굴 하나 찌푸리지 않고 잘 받아주고 비위 역시 잘 맞추어 주는 기술이 뛰어나 환자나 그 가족들에게 깊은 신뢰와 호감을 받게 되었다. 거기다 팔 힘이 좋아 웬만한 환자는 가볍게 들고 옮기는 재주가 있었고, 환자의 가족들도 눈살을 찌푸리며 싫어하는 대소변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받아내고 뒤처리까지 말끔히 해주니 환영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개인병원에서 어깨 너머로 배우는 간병인이었지만 차츰 기술이 몸에 붙으면서 같은 동료였던 간병인들이 먼저 그를 찾게 되었다. 그 역시 일정한 직업이 없이 경비원이나 노가다판이나 닥치는
“내가 언제 이렇게 나이를 먹었는지 모르겠어. 난 전혀 내가 이렇게 나이를 먹지 않을 줄 알았는데” 한숨에다 시선마저 천정에다 주며 말하는 그는 아주 이상하다는 표정까지 지었다. 어처구니가 없다는 투였다. 그러면서 답답하다는 듯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었다. 그러면서 천정을 바라보며 껌벅거리는 그의 눈이 좀 이상했다. 흰자위에 팥알만 한 크기의 붉은 점들이 여러 개가 박혀서 옆에서 보기에도 불편해 보였고, 심지어는 흉측하게도 느껴졌다. “눈이 왜 그러십니까? 좀 이상합니다.” 내가 궁금해서 물었다. 나와는 먼 친척으로 아저씨벌이 되었으므로 머뭇거리다가 공손하게 말을 건넸다. “아 이거? 몇 년 전에 백내장 수술을 하고부터 이래” “뭐가 잘못된 것 같습니다. 안과에 가보셔야 되겠습니다” “안과가 어디 있어. 여긴 안과가 없어” 그러고 보니 사는 곳이 시골동네에다, 거기서 산을 한 개쯤 넘은 지역이라는 생각을 했다. 나는 그곳을 지나는 길이 있어 소문으로만 듣던 그를 오랜만에 보고 싶었던 것이다. 막상 찾아보니 진귀한 풍경 속에서 그는 살고 있었다. 뒤는 그리 높지 않은 야산으로 숲이 울창했고, 앞으로는 시퍼런 색채를 띤 개울이 소리 없이 흘렀다. 그야 말로 배산임
잡지사 기자이자 문인인 ‘나’는 신진여류 시인으로 행세하는 양공주 소니아를 알게 된다. 밑바닥 생활에 지친 ‘나’는 소니아를 찾게 되고 어두운 뒷골목의 진상을 목격하게 된다. 양공주인 소니아에게 미쳐서 가산을 탕진하는 중년노인의 슬픈 모습, 인신매매의 현장을, 또 이재민 아파트촌에서 밤도둑이 저지른 비극을 보게 된다. 소니아의 천진스러운 딸 미리의 모습, 하룻밤 사이에 이 모두를 목격하고 사회의 어두운 단면에서 도피하고자 하는 ‘나’는 소니아를 잊게 되기를 또한 바란다. 그러나 소니아는 길에서, 미군기관에서, 명랑하고 초월적일만큼 행복한 얼굴이다. 결국 양공주라고 돌팔매질을 받으면서 소니아는 군중 속으로 사라진다. 그러한 소니아를 ‘나’는 앉아서 바라보아야만 한다. 이상은, 1950년에 발표한 고 김광주선생의 단편소설 ‘악야(惡夜)’의 줄거리다. 우리는 대개 선생이 무협지 작가로만 알고 있지, 그가 ‘결혼도박’, ‘혼혈아’ 등 장편 ‘석방인’, ‘장미의 침실’ 등 수필집 ‘춘우송(春雨頌)’이 있으며, ‘뇌우(雷雨)’ 노신단편집 등을 번역한 일은 잘 모르고 있는 실정이다. 지난달 15일에 화성박물관 영상실에서 김광주(金光州)선생을 기리는 심포지엄을 가졌다. 수
올해는 ‘독서의 해’독서를 통해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을 이해하고 세상을 균형이게 바라보는 판단력을 길러 보자 하늘은 높고 햇살은 청명한 가을이 왔다. 가을은 우리를 겸허하고 차분하게 만드는 계절이다. 얼마 안 남은 한해를 생각하게 하며, 봄과 여름 동안 분주하게 지내왔던 우리를 뒤돌아보게 만드는 가을은, 정서 함양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축복의 계절이다. 흔히 가을을 ‘독서의 계절’이라고들 한다. 하지만 국내 성인의 독서율은 최근 7년 새 60%대까지 떨어졌다. 10명 중 4명은 일 년에 책을 한 권도 읽지 않는다는 얘기인데, 가을에도 책을 읽지 않는 현상이 지속되고 있다. 왜 그럴까? 가을은 야외활동을 하기에 좋은 계절이다. 선선해지기 시작하는 날씨는 야외활동을 하기에 좋고, 노랗고 붉게 물든 산은 우리에게 어서 오라고 손짓한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지만 역설적이게도 실내에서 책만 읽기에는 아쉬운 계절인 것이다. 그런데 올해가 ‘독서의 해’라는 것을 아는가? 올해는 문화체육관광부가 지정한 ‘국민 독서의 해’이다. 그러니 이번 가을에는, 한낮에는 야외활동을 하고 저녁에는 책을 읽으면 어떨까? 지난 봄과 여름 동안 우리 사회는 학교폭력 사건과 오원춘 사건, 성
DMZ국제영화제가 올해로 4회째를 맞는다. ‘평화, 생명, 소통의 공간’을 주제로 한 DMZ국제영화제는 2012년 9월 21일(금)부터 9월 27일(목)까지 7일간 경기도 파주 도라산역, 평화누리, 파주출판단지 등에서 열린다. 이번 영화제에는 전 세계 80여 개국에서 600여 편의 영화가 출품되었는데, 그중 30여 개국의 110여 편의 작품이 상영된다. DMZ국제영화제는 세계 유일의 분단지역인 비무장지대에서 경기도와 파주시가 공동 주최하고 민간행사를 지원하는 국제 다큐멘터리영화제이다. 이 영화제는 세계 유일의 분단국 비무장지대에서 영상을 통해 울리는 평화·생명·소통의 소리로 전 세계에 평화를 향한 인류의 염원을 나타낼 것이다. DMZ국제영화제에는 많은 내빈이 참석한다. 경기도지사, 문화체육관광부장관, 통일부장관, 주한미국대사를 비롯한, 각국대사들과 주한프랑스. 독일문화원장, UN군사령관, 조재현 위원장 외 영화계 주요인사로 김동호 위원장, 안성기 배우, 유지태 배우, 이광기 배우, 해외초청감독 등이 참석한다. 또한 4회 영화제 홍보대사로 한류 열풍의 주역인 인기 아이돌 그룹 2AM이 선정되었고, FT아일랜드와 카라, 제국의 아이들, 박완규, 이은미 등 인기가
즐기는 사람을 이길 수는 없다. 축구선수 이영표는 “축구를 즐길 수 있는 곳은 어디든 좋다. 연봉을 많이 받고 적게 받는 것은 의미가 없다. 축구를 즐기면서 하는 것이 나의 첫 번째 목표이다. 따라서 최종 목표는 빅리거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최선을 다하고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말하며 세계적인 명문팀인 AS 로마로 이적할 기회를 얻게 되었지만 토트넘에 남았다. 내가 살고 있는 수원에는 정조의 숨결이 218년간 살아 숨 쉬는 화성의 역사가 있다. 화성은 과학적이고 근대적인 축성술로 조성된 국방의 요새이다. 이러한 점을 인정받아 수원 화성은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이렇게 훌륭한 수원 화성이 단기간인 33개월 만에 축성될 수 있었던 데에는 이유가 있다. 수원 화성은 당초에 10년을 목표로 쌓아올렸는데, 33개월 만에 축성해 냈다. 정조는 백성을 여기는 마음이 남달랐다. 그는 행차할 때마다 백성이 애써 일궈낸 곡식을 밟을까 봐 조심했고, 이러한 그의 마음을 백성은 알아주었다. 또한 정조는 여느 왕들과는 달리 수원 화성에 동원된 인부들에게 임금을 지급했다. 노동의 대가를 받게 된 인부들은 일을 즐기게 되었다. 일을 즐길 수 있으니, 33개월 만에 세계문화유
한 중학생은 “이렇게 마음 놓고 공부할 수 있는 것은 어려운 시기에 나라를 지키기 위해 희생한 분들이 있었기 때문” 이라며 “북한은 우리와 한 민족이지만평화적인 관계를 맺되 경계할 필요는 있다”고 말했다. 많은 이들이 잊고 지내지만 호국 보훈의 달이 지나갔다. 호국 보훈의 달인 6월은 그래서 더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행사들을 접하게 된다. 정부에서는 호국 보훈의 달에 걸맞게 다양한 국민 참여 행사들이 진행된다. 6월 25일 오전 10시에는 전쟁기념관 광장에서 국내 및 UN참전용사, 일반 시민, 학생 등 5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UN참전국 국기 및 한국군 참전 부대기 입장, 참전영웅 롤콜 등의 행사가 있었다. 또 제10주년을 맞이하게 된 제2연평해전 기념식은 국가보훈처 주관으로 6월 29일 오전 10시에 해군 제2함대사령부에서 유족 및 부상자, 선·후배장병, 학생, 시민 등 3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됐다. 특히 올해에는 처음으로 전쟁기념관과 서울광장을 잇는 호국 퍼레이드 및 나라사랑 콘서트, 제1회 6·25 상기 안보마라톤 대회 등이 열려 6·25 전쟁과 그 이후에 희생·헌신한 분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행사도 열렸다. 경기경찰청에서도 호국 보훈의 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