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중에는 전투경찰대 제2연대장으로 근무하며 조선 공산당 총사령관 이현상 등을 토벌했다… 그는 귀순을 유도해 많은 빨치산의 목숨을 살렸으며 이현상을 화장해 장례를 치러줬다. 6월은 ‘호국 보훈의 달’이다. ‘호국(護國)’은 ‘나를 지키고 보호하자’는 말이고, ‘보훈(報勳)’은 ‘보훈에 보답한다’는 말이다. 즉, ‘호국 보훈의 달’은 ‘나라를 지키고 보호하며, 나라를 지킨 사람들의 은혜에 보답하는 달’이다. 최근 우리의 안보 의식이 점점 사라져 가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해마다 6월 6일 가정에 걸린 태극기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크고 작은 대북 안보 문제가 불거져도 무관심을 보이는 이들도 많다. 우리는 긴 역사를 간직한 만큼 비극적인 일들도 많이 벌어졌다. 고조선과 고구려·백제·신라 삼국, 고려와 조선, 그리고 대한민국이 들어선 이후에도 크고 작은 외침에 시달려야 했다. 다행히 지금 우리는 평화롭게 지내고 있는데, 그럴 수 있게 된 것은 모두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킨 이들의 희생 덕분이다. 호국 보훈의 달이 되면 생각나는 인물이 하나 있다. 그는 유관순, 안중근, 안창호처럼 널리 알려진 인물은 아니다. 국방부 전쟁기념관에서 선정한 경찰의 호국 인물인
김윤식 교수는 우리나라 국문학자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이다. 1962년 《현대문학》에 평론이 추천돼 등단한 그는 1973년 현대문학상 신인상을 수상했다. 이후 그는 《한국근대문예 비평사 연구》, 《근대 한국문학연구》, 《임화연구》, 《최재서론》, 《한국문예비평의 특성》 등 수많은 저작을 남겼다. 어느 날 김윤식 교수가 감기에 걸려 누워 있을 때 친구가 문병을 갔다. 자리에 누워 있던 김 교수는 친구에게 “바쁜데 여기까지 와 줘서 고맙다네”라고 말했다. 그리고 두 사람이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던 중 갑자기 김윤식 교수가 “지금 몇 시냐”고 물었다. 친구가 지금이 6시라고 말해 주자, 김 교수는 아픈 몸을 이끌고 책상 앞에 단정한 자세로 앉았다. 그리고 곧 원고지 한 장을 펼쳐 두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친구는 김 교수의 그런 모습을 보고 걱정했지만 그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매일 아침마다 원고를 정리하는 것이 그의 오래된 습관이었기 때문이었다. 교수가 된 뒤, 김윤식 교수는 무슨 일이 있어도 하루에 원고지 20장씩은 집필하자고 자신과 약속했다. ‘자기 자신과 한 약속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면 무슨 일을 제대로 할 수 있겠는가’라고 생각한 그는 항상 초심을 잃지 않으
경기경찰청장의 치안현장방문지 오원춘사건¶/박병두 작가·경기경찰청 정훈관¶¶조선 중기의 문신 유성룡(柳成龍)은 임진왜란 동안에 경험한 사실을 기록한 책 ‘징비록(懲毖錄)’을 남겼다. ‘징비’란 ‘시경’ 소비편(小毖篇)의 “내가 징계해서 후환을 경계한다(予其懲而毖後患).”라는 구절에서 딴 말이다. 이 책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의 일들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는 임진왜란 이전의 대일 관계에 있어서 교린사정(交隣事情)도 일부 기록했는데, 그것은 임진왜란의 단초를 소상하게 밝히기 위해서였다. 유성룡은 ‘징비록’의 서문에 “매번 지난 난중(亂中)의 일을 생각하면 아닌 게 아니라 황송스러움과 부끄러움에 몸 둘 곳을 알지 못해 왔다. 그래서 한가로운 가운데 듣고 본 바를 대략 서술했으니”라고 밝혔다. 임진왜란이 왜 일어났는지를 밝히고, 이 같은 비극이 또다시 일어나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 이 책은 쓴 것이다. 유성룡의 이러한 태도, 문제가 생긴 뒤에 그 문제의 원인을 밝히고 후일의 반면교사로 삼으려는 태도는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도 본받을 만하다. 얼마 전에 신임 경기지방경찰청장으로 취임한 강경량 경기청장은 지난 5월 22일 오전에 수원중부경찰서 치안현장을 방문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