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는 변수로 따지면 일종의 돌발 변수다. 예상치 못한 작품이고, 예상치 못한 내용인 데다, 예상치 못한 반응들이다. 흥행 역시 예상하기가 쉽지 않다. 이 영화는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을 만들어 혜성처럼 등장해 각광을 받았고, 그 다음 작품 ‘은밀하게 위대하게’로 700만 관객까지 모으며 상업적으로 성공했던 장철수 감독이 만들었다. ‘김복남’과 ‘은밀하게’는 서울 강북과 강남만큼 큰 차이가 난다. 보폭이 워낙 크게 벌어진 작품이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장철수 본인도 대체적으로 돌발 변수적인 측면이 큰 감독이다. 그 역시 어디로 튈지 예상하기가 쉽지가 않다는 얘기다. 이미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새 영화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는 개봉 전, 일부 평론가와, (별로 거론하고 싶지 않지만) 일부 네티즌, 유튜버들 사이에서 ‘싸구려 포르노’란 소리를 들었다. 동의하지 않는다. ‘포르노’란 단어는 아무 데나 막 갖다 붙이는 것이 아니다. 그건 완전히 다른 세계의 얘기다. 영화의 표현 수위가 높은 것은 맞다. 섹스 신, 베드 신, 애정 신으로 극 전편이 이어진다. 근데 섹스는 이 영화의 소재를 넘어 주제이다. 주제가 섹스이기 때문에 섹스 장면
워낙 유명했던 작품을 다시 만드는 것은, 게다가 그게 세계적 명작 수준의 원작소설을 가지고 만든 것이라면 더욱 더, 두 가지 길 밖에 없다. ‘어떻게 바꿀까’, ‘무엇을 바꿀까’다. 첫 번째는 결국 만드는 자의 차별성, 곧 자신만의 정체성 문제 같은 것이다. 마치 화가의 낙관(落款)같은 것을 자신의 영화엔 어떤 문양으로 찍을 것인가와 같은 문제인데 이건 결국 시대정신과 관련이 있다. 지금의 시의성을 어떻게 보여주고, 대중들이 원하는 것뿐만 아니라 대중들이 올바로 원하게 하는 것을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의 문제다. 두 번째, 무엇을 바꿀 것인가의 문제는 트렌드와 유행, 그 모던함을 어떻게 살려 낼 것인 가이다. 영화가 올드 패셔너블한가, 모던한가의 반응은 여기서 갈린다. 영국 셰익스피어 연극전문배우 출신의(그만큼 전통과 정통의 연기파라는 얘기를 듣는) 케네스 브래너는 아가사 크리스티 원작의 ‘나일 강의 죽음’을 두고 똑같은 고민에 빠졌을 것이다. 무엇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피터 유스티노프, 베티 데이비스, 미아 패로, 제인 버킷, 올리비아 핫세 등이 나왔던 1978년 영화는 원작을 그대로 따라간 작품이었다. 너무 바꾸면 원작이 갖는 무게감, 그 의미를 실어내
마이클 돕스가 쓰고 출판사 모던 아카이브의 박수민 대표가 번역한 다소 장황하지만 매우 의미심장한, 그래서 이른바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미국 작가 조너던 사프런 포어의 소설 제목이자 영국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영화 제목이기도 하다. 톰 행크스와 산드라 블록이 주연을 맡았다.)’ 느낌을 주는 책 『1962–세기의 핵 담판과 쿠바 미사일 위기의 13일』은 논픽션 르포르타쥬이다. 그런데 실로 내용이 너무나 다이나믹하고 풍부해서 한편의 밀리터리 첩보액션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미국의 저널리스트들은 다큐를 이런 식으로 쓴다. 한 권의 대하소설처럼 쓴다. 그래서 한번 읽기 시작하면 쉽게 손을 놓지 못하게 만든다. 이 책 『1962』는 그런 면에서도 귀감이 된다. 제대로 글을 쓰는 저널리스트나 역사학자가 있는 사회와 그렇지 못한 사회의 등급 차이 같은 것을 느끼게 한다. 『1962』는 1962년의 급박했던 미국-쿠바 미사일 위기 사태를 다룬다. 당시 소련의 서기장 흐루시초프는 비엔나에서의 미-소 정상회담 때 했던 약속을 뒤집고 쿠바에 핵 미사일 기지를 비밀리에 조성한다. 그리고 핵 탄두를 반입하기 시작한다. 뒤늦게 이를 안 존 F. 케네디 정부
영화 ‘리코리쉬 피자’에는 리코리쉬 피자가 나오지 않는다. 무슨 뜻인지를 암시하는 대사조차 나오지 않는다. 리코리쉬 피자는 1970년대 미국 캘리포니아를 중심으로 판매망이 구축된 체인점 레코드 숍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아무런 뜻이 없는 척 미국인들, 특히 70년대에 캘리포니아에서 청소년기를 보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영화 ‘리코리쉬 피자’가 과거의 얘기를 하는 작품이란 걸 알게 만든다. 우리 식으로 얘기하면 영화 제목이 ‘난다랑’인 셈이다. 난다랑은1980년대 초중반 서울 여기저기서 성업했던 카페 이름이다. 지금은 없어졌다. ‘리코리쉬 피자’는 할리우드 유명 제작자 개리 고츠만의 실제 성장담을 극화한 것으로 알려졌다. 고츠만은 ‘나의 그리스식 웨딩’, ‘맘마미아’, ‘폴라엑스’, ‘더 파크랜드’ 등을 제작한 인물이다. 개리 고츠만과 이 영화를 만든 폴 토마스 앤더슨은 가까운 사이다. 고츠만은 1952년생, 앤더슨은 1970년생이다. ‘리코리쉬 피자’의 주인공 이름은 개리이며 그의 15살 때부터 얘기가 시작된다. 아마도 개리 고츠만은 폴 토마스 앤더슨에게 평소 ‘라떼에는(‘나 때에는’을 우습게 표현한 말)’ 방식으로 수다를 떨곤 했었을 것이다. 그걸 평소
정치하는 것과 연애하는 것은 사실, 그리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너무 사랑해서 미워하고 또 너무 미워해서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신파는 정치의 영역에서나 연애의 과정에서 똑같이 벌어진다. 이런 식의 대사는, 그것만 잘라서 들으면 도대체 이 둘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 정치인지 연애인지 구별할 수가 없다. “당신이 여기까지 오는 데 오로지 당신 자신 혼자 힘으로 그렇게 된 줄 알아? 내가 당신을 위해 어떤 일을 했는지 알아? 그런데 당신이 이럴 수 있어? 나한테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 자 이건 여자가 남자에게 하는 얘기일까. 남자가 여자에게 하는 얘기일까. 아니면 남자가 남자에게 하는 얘기일까. ‘불한당 : 나쁜 놈들의 세상’부터 ‘노골적으로’ 자신의 성정체성을 담아내고 있는 변성현 감독은 신작 ‘킹메이커’에서도 정치판 두 남자의 얘기를 역시 ‘브로맨스(남자 간의 특별한 감성. 우정을 넘어서는 무엇)’의 빛깔로 그려낸다. 유독 이번 영화에는 의도적으로 게이 감성을 곳곳에 심어 놓는다. 특히 중앙정보부장 역의 조우진은 완벽한 여성적 캐릭터이다. 조우진은 이후락을 연기하고 있으며 실제 역사에서의 이후락 중정부장과는 다른 모습이다. ‘킹메이커’는 1960~70년대
술을 마셔 본 사람은 안다. 사람들은 외로워서 술을 마신다는 걸. 술을 마시면 마실수록 사실은 더욱 더 고독해진다는 걸. 그런데 그 단절감의 원인은 결국 인간 존재의 근원과 같은 것이라는 걸. 때문에 술을 마시면 마실수록 혼자라는 고립감에 더욱 더 빠져들 수밖에 없다는 걸. 그런데 바로 그 사실을 영화는 진작 알아 왔던 셈이다. 알코올이란 게 워낙 중독 가능성이 높고 또 그게 매우 위험하다는 걸 영화는 경고 ‘따위’보다는 그 드라마틱한 요소에 집중하는 쪽이었다. 영국 마이크 피기스가 만든 1996년작 ‘리빙 라스베가스’의 벤(니콜라스 케이지)은 술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그래서 결국 고독감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차라리 그 안으로 더 깊숙이 들어갈 것을 선택한다. 1962년작 ‘술과 장미의 나날’의 조(잭 레먼)와 크리스틴(리 레믹)도 마찬가지다. 외롭지 않으려고 술을 시작해서, 결국 상대방이 지닌 고독의 심연을 더욱 목격하게 된다. 그렇다고 지금 얘기하려는 덴마크 토마스 빈터베르그의 신작 ‘어나더 라운드’가 그렇게나 우울한, 잿빛의 영화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영화는 그 반대다. 아니 사실은 반대인 척 한다. 하지만 진면목은 꽤나 슬픈 이야기이다. 그런
이런 식이라면 누가 대통령이 된다 한들 우리사회의 남녀 사이가 회복될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 나라의 남녀간, 특히 젊은 남녀간의 사이가 현재, 너무 안 좋다. 사랑 따위는 언감생심이고 서로를 적대하고 증오하기까지 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들은 서로를 멀리하고, 만나지 않으며. 연애도 별로이고, 결혼은 거의 계획이 없어서, 출산까지는 아예 생각하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이런 식이라면 국가의 미래가 없다. 국가의 생산력은 급속하게 떨어질 것이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은 잘못된 정보, 잘못된 세계관에 의해 현혹되고 길들여진 20대 남자들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 그들은 여성가족부, 비동의 간음죄나 비동의 강간죄 등이 남성역차별을 가져온다는 소아병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20대 여성들도 군대를 갔다 와야 하거나 그에 준하는 공적 업무를 의무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걸 위해서는 지금의 정권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후보가 문제가 많고 아내와 그녀의 가족에 온갖 비리가 점철돼 있어도 남녀 역차별만 해결된다면 그건 그리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당연히 우편향돼있고 일베화 된 지 오랜데 신문기자들 중 상당수가 2030 남자들이라는 점도 주목해서 봐야
시작부터 이상한 얘기지만 ‘하우스 오브 구찌’는 그렇게 잘 만든 영화가 아니다. 근데 그렇다고 아주 엉망인, 보기가 민망할 정도라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미리 자락을 깔고 리뷰를 시작하는 이유는 이 영화가 할리우드의 거장이자, 국내에도 영화적 팬덤을 깨나 자랑하는 리들리 스콧의 작품이라는 점 때문이다. 스콧 영화치고 그리 걸작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려는 것뿐이다. 그의 무수한 전작들, ‘블레이드 러너’로부터 시작해 ‘에일리언’과 ‘델마와 루이스’ 그리고 ‘프로메테우스’와 ‘에일리언: 커버넌트’ 등을 생각하면 이번 영화의 질감이 좀 떨어진다는 얘기다. 그는 영국 왕립예술아카데미 출신이며 기사 작위를 갖고 있을 정도다. 깨나 지식인이며 그의 영화는 대개가 늘 철학적이다. 실로 리들리 스콧 경(卿)이라 불릴 만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현재 85세이다. 고령이다. 신선하고 도발적인 영화보다는 비교적 ‘안전한’ 영화를 만들 때이긴 하다. 그런 점에서는 이번 작품이 ‘용서’가 되는 측면이 있다. 리들리 스콧의 ‘하우스 오브 구찌’를 통해 영화적 고관여층, 그러니까 마니아급 관객들은 구찌家의 비극이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 그 ‘진짜’ 연원을 알고 싶었고 또 보고
솔직히 ‘매트릭스’ 시리즈를 정확히 이해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그렇게 봐도 무방한 일이다. 그래서인지 ‘매트릭스: 리저렉션’이 나왔다한들 사람들을 흥분시키지 못했던 측면이 있다. 어려운 것이다. 게다가 이 시리즈가 처음 나온 것이 1999년이다. 20년이 넘었다. 시간까지 오래됐다. 정확한 내용을 기억하는 사람들마저 점차 없어지기 시작했다. 이번 4편이 인기를 얻지 못한 것, 더 나아가 나오느니만 못한 속편이었다는 둥의 비아냥을 받았던 것, 극장 안에서 몇 명 안되는 관객을 확인하는 건 마치 시리즈에 대한 부관참시를 하는 수준이라는 둥의 극악한 비난의 글까지 나왔던 것은 어쩌면 광범위한 의미로서의 무지 때문이다. ‘진실을 보지 못하면 저항이 없다’. 이번 ‘매트릭스4’에 나오는 대사 가운데 하나이다. 사람들은 ‘매트릭스’ 시리즈의 진실을 보지 못한다. 이 이야기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 그래서 ‘관객 폭발=저항(지금과 같은 OTT시대의 극장에서)’으로 연결시키지 못한다. 슬라보예 지젝 같은 유고슬라비아의 사회심리학자는 ‘매트릭스’ 시리즈를 철학자들에 대한 로르샤흐 검사라고 말한다. 로르샤흐 검사는 잉크 얼룩을 보여 주고 그것을 어떻게
클로이 모레츠 주연의 넷플릭스 영화 ‘마더/ 안드로이드’에는 ‘KOREA’가 두 번 언급된다. 안드로이드의 공격을 피해 살아 남기 위해 보스턴으로 가려는 주인공들은 궁극적으로는 ‘한국으로 가는 배를 타겠다’고 말한다. 덧붙이기를 ‘거기가 가장 안전하다고 들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극 후반에 이들은 실제로 한국으로 가는 기회를 얻는다. 아이를 낳은 여주인공 G(조지아, 클로이 모레츠)는 두 다리를 잃은 아이의 아빠 샘(알지 스미스)과 함께 한국에서 온 요원 셋을 만나 갓 낳은 아이를 눈물과 함께 한국으로 보낸다. 특히 뒷 장면은 6·25 전쟁 후 숱한 전쟁고아를 미국으로 입양 보냈던 시대를 생각하면 이상한 데자뷔를 준다. 이제는 미국인들이 전쟁보다 더한 전쟁을 겪으면서 아이를 거꾸로 한국으로 보내고 있는 셈이다. 영화 속 AI 인공지능 안드로이드의 반란은 어쩌면 지금의 코로나19 바이러스 팬데믹 상황을 은유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다만 이상한 것은 한국 쪽에서 나온 여성 두 명, 남성 한 명의 복장과 스타일인데 이들 모습이 남한보다는 북한 사람을 연상시킨다는 점에서 이 영화를 만든 제작진의 디테일이 조금 떨어진다는 감을 준다. 그들에게는 남과 북이, 남한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