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대가 모인 가족 조찬에서 할머니인 릴리(수잔 서랜든)와 손자인 조나단(앤슨 분)의 대화가 흥미롭다. 손자가 묻는다. “할머니는 내게 줄 유산이 많아요?” 릴리의 대답이 걸작이다. “내가 주는 돈을 매춘부와 마약 사는데 쓴다고 약속하면 네게 주마.” 가족들 모두 왁자하고 웃음을 터뜨린다. 할머니는 우드스탁 세대, 곧 히피 세대다. 손자는 래퍼들의 세대이고. 그 세대간 간격을 ‘불경한(?)’ 농담으로 해소한다. 할머니 릴리는 자신과 같은 세대이자 오랜 친구이고 남편의 사실상 연인이기도 한 리즈(린제이 던컨)와 해변을 거닐며 이런 대화를 나눈다. “집안에 레즈비언 한 명 정도는 있어야 좋지. 안그래?” 릴리의 둘째 딸 안나(미아 와시코우스카)는 게이다. 그녀는 이번 주말 자신의 파트너인 크리스(벡스 테일러 크라우스)와 함께 엄마 집을 찾았다. 가족 간의 대화가 이 정도로 자유스러우면 좋을 것이다. 적어도 영화적 상상력만으로라도 이런 대화를 받아들일 수 있으면 좋을 것이다. 유머와 풍자를 잃고 비뚤어진 종교적 신념과 위선적인 순결주의, 기계적인 양성 평등주의와 역사적 순혈주의만을 강조하느라 경화(硬化)된 사회는 사람들에게 행복감을 주지 못한다. 지금의 한국사회가
팬데믹 시대에 왕가위의 2000년작 ‘화양연화’가 관객 10만 명을 모으며 흥행에 성공하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다. 역설이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지금의 세상에 일정한 환멸을 느끼고 있으며 왕가위 식 탐미주의에의 탐닉을 탐욕스럽게 갈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다이즘도 1차 대전 끝의 황량함을 극복하는 방편으로 나왔다. 지난 4년 간 극우 반동의 광기에 지친 사람들이 이제 쉴 곳이 필요하다고 소리치고 있는 셈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 첸 여사(장만옥)와 차오(양조위)의 이어질 듯 말 듯하는 불륜의 일탈처럼, 지금의 사람들은 거대담론에서 벗어나 개인의 삶을 관조하고 즐길 수 있는 시간을 달라고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귀 기울여야 할 대목이다. 그러나 알고 보면 이 영화 ‘화양연화’처럼 정치적인 기호로 가득한 작품도 드물다. 이 영화는 스러져 가는 홍콩의 영화(榮華)에 대한, 그렇게 배신의 땅에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한 왕가위 식의 애처로운 송가(頌歌)이다. 홍콩의, 홍콩에서의, 홍콩을 위한 세상과 삶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거라는, 그 같은 사랑과 애정은 더 이상 실현되지 않을 거라는 좌절이 담겨져 있다. 그런 정서의 기조(基調)는 왕가위의 또 다른 작품들인 ‘타
역사는 일상 속에서 반복된다. 2011년 어느 초여름쯤 서울 한남동에서 술을 마시다가 술상을 엎고 자리를 박차고 나온 적이 있다. 10년이 된 얘기지만 40대 후반의 나이였을 때니 아무리 화가 나도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기억하기로는 그 자리에 꽤나 스노비시(snobbish)한 인간들이 모였었는데 건축가 변호사 방송인 패셔니스타 시인 등등이 있었을 것이다. 장소도 한남동 유엔빌리지 근처였다. 비교적 여유가 넘쳐나던 분위기였던 건 불문(不問)이 가지(可知)다. 자연스럽게 당시 서울시장이었던 오세훈이, 무상급식을 놓고 벌인 정치 도박에 대한 얘기가 화제가 됐다. 그중 여자 시인의 말이 화근이 됐다. 그녀가 말했다. “왜 내가 낸 세금으로 강남 집 애들까지도 공짜로 밥을 먹여야 해? 미친 거 아냐?” 술에 취해 제 정신이 없었던 탓에 말을 더듬었고 그런 나 자신에게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걸 만회한다며 한 짓이 상을 뒤엎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자리를 뛰쳐 나오고 말았다. 부끄러운 자화상이다. 이랬어야 옳았다. 제 정신으로 차분하게. “그럼 한줌도 안되는 강남집 애들 공짜로 밥 먹이는 게 겁이 나서, 대다수 없는 애들, 가뜩이나 못먹는 애들까지 다 굶겨?! 꼭 그
철학자들은 세상을 여러가지 방식으로 해석해 왔다. 중요한 것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칼 마르크스의 이 말을 정치비평에 적용하면 이렇다. 정치평론가들은 숱하게 정치판을 분석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정치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문제는 눈꼽만큼도 그러지 못한다는 데에 있다. 종편과 유튜버 등 온갖 미디어에서 난무하는 정치비평이 요즘엔 약보다 독이다. 대다수가 윤석렬이 해임에 버금가는 징계를 받을 것이라고 내다 봤다. 틀렸다. 추미애는 사퇴하지 않을 것이며 혹은 대통령이 사의를 받아 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것도 틀렸다. 죄 틀린다. 그때마다 대중들이 갖게 되는 실망과 좌절감이 얼마 만한 것인지 그들이 상상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국내 대중들은 한때 개돼지 취급을 받은 적이 있어, 상당히 똑똑해졌다. 그런 만큼 꽤나 흔들리기도 잘한다. 대중들은 더 이상의 분석보다는 행동의 지침을 요구한다. 행동하는 자들이 필요한 것이다. 문학이 종종 고전을 찾듯이 정치도 마찬가지다. 예전엔 어땠는지를 보면 된다.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는 지금의 사회 개혁이 행동주의적 측면에서 당시의 사회주의 혁명의 단초를 모방할 필요가 있음을 보여준다. 현대 자본주의는 더 이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