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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진의 언제나, 영화처럼] 집 안에 레즈비언 한 명 정도 있는 게 좋지 않겠어?

② 완벽한 가족 - 로저미첼 감독

 

3대가 모인 가족 조찬에서 할머니인 릴리(수잔 서랜든)와 손자인 조나단(앤슨 분)의 대화가 흥미롭다. 손자가 묻는다. “할머니는 내게 줄 유산이 많아요?” 릴리의 대답이 걸작이다. “내가 주는 돈을 매춘부와 마약 사는데 쓴다고 약속하면 네게 주마.” 가족들 모두 왁자하고 웃음을 터뜨린다.

 

할머니는 우드스탁 세대, 곧 히피 세대다. 손자는 래퍼들의 세대이고. 그 세대간 간격을 ‘불경한(?)’ 농담으로 해소한다. 할머니 릴리는 자신과 같은 세대이자 오랜 친구이고 남편의 사실상 연인이기도 한 리즈(린제이 던컨)와 해변을 거닐며 이런 대화를 나눈다.

 

“집안에 레즈비언 한 명 정도는 있어야 좋지. 안그래?” 릴리의 둘째 딸 안나(미아 와시코우스카)는 게이다. 그녀는 이번 주말 자신의 파트너인 크리스(벡스 테일러 크라우스)와 함께 엄마 집을 찾았다. 가족 간의 대화가 이 정도로 자유스러우면 좋을 것이다. 적어도 영화적 상상력만으로라도 이런 대화를 받아들일 수 있으면 좋을 것이다.

 

유머와 풍자를 잃고 비뚤어진 종교적 신념과 위선적인 순결주의, 기계적인 양성 평등주의와 역사적 순혈주의만을 강조하느라 경화(硬化)된 사회는 사람들에게 행복감을 주지 못한다. 지금의 한국사회가 그렇다. 상상력을 복원시켜야 한다. 정치적 상상력, 경제평등주의의 상상력, 사회주의적인 상상력 등등.

 

대중들에게는 ‘노팅 힐’로 유명세를 얻었지만 은근히 사회적 소재를 영화로 만들기를 즐기는 영국 로저 미첼 감독이 만든 ‘완벽한 가족, Blackbird’은 독특한 영화다.

 

이 영화 속 엄마이자 할머니인 릴리는 죽어 간다. 몸의 왼쪽은 오래 전 마비됐고, 서서히 오른 쪽도 말을 듣지 않는다. 남편 폴(샘 닐)이 건네 준 샤도네이 잔을 떨어뜨리기까지 한다. 생의 끝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의사인 남편과 진작부터 약속한 일을 실행하려 한다. 그래서 가족들을 모아 만찬을 준비한다.

 

하지만 예상했듯이 이 ‘거사’는 가족 간의 해묵은 갈등과 논쟁을 유발시킨다. 릴리의 선택은 과연 옳은 것인가. 무엇보다 합법적인 것인가. 그녀의 두 딸, 제니퍼(케이트 윈슬렛)와 안나는 이 일로 서로의 입장이 왔다 갔다 한다. 안나는 처음엔 반대하고 제니퍼는 나중에 반대한다.

 

둘은 엄마인 릴리가 강인하고 독립적으로 키웠다고 생각하지만 제니퍼는 지나치게 원칙적이어서 세상과 가족관계를 자기중심적으로 받아 들인다. 사실은 이기적이다. 안나는 약물중독에다 조울증에 시달린다. 뭘 하나 제대로 끝까지 해 본 적이 없다. 그녀는 사랑에 결핍돼 있다. 하여, 세상에는 완벽한 가족이 없다.

 

다들 단아하고 단란한, 그럼으로 해서 남들이 부러워할 만큼 완벽한 가족이 되는 걸 꿈꾸지만 그건 애초에 꿈일 뿐이다. 사실 그같은 욕망은 사회나 국가에도 적용된다. 완벽한 체제는 없다. 그걸 향해 나아갈 뿐이다.

 

다만 그 나아가는 방향과 방법이 지나치게 기계적이어서는 곤란하다. 무수한 장애에 부딪힐 때 그걸 극복하는 사람은 엄마인 릴리와 같은 자유로운 상상력의 소유자들이다. 사랑을 베풀고 베푼 만큼 받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사랑이 백해의 약이다. 자유로운 사랑의 관계가 만병통치 약인 것이다.

 

 

할머니 릴리 세대, 곧 68혁명 세대는 그 같은 기조의 신념을 이루려고 한때 열심히 싸웠던 인물들이다. 기성의 잘못된 질서를 혁파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일탈을 감행했던 사람들이다. 릴리는 친구인 리즈의 침실에 늦은 밤 찾아와 말하며 서로 낄낄댄다.

 

“우리가 그때 LSD같은 거 말고 머쉬룸=버섯환각제을 했었어야 했어.” 그리고 곧 축축한 눈망울을 주고 받는다. “애들을 부탁해.” 손자 아이에게 나이 든 사람은 현명한 것이 아니라 현명한 척을 할 뿐이라고 말하는 전전 세대. 청소년 아이에게 허물 없이 너 게이니? 너 트랜스젠더니? 라고 물을 수 있는 할머니 세대. 우리는 오랜 세대의, 오랜 꿈과 이상을 이미 다 상실하고, 망각하고, 무시하고 살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근데 그건 버려서는 안될 가치였을 것이다.

 

영화 ‘완벽한 가족’은 ‘잃어버린 세대(lost generation)’의 시대적 회한에 대해, 그 종말과 새로운 시작에 대해 얘기하려 한다. 로저 미첼 감독은 자신의 전작이자 2013년작인 ‘위크엔드 인 파리’를 통해 68혁명 시대의 복원에 대해 얘기한 바 있다. 68의 가치는 사회의 모든 지식은 공유되고 계층과 계급 간의 차별은 최소치로 해소돼야 하며 남녀가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게 되기를 꿈꾸는 것이다.

 

 

50년이 넘도록 그 이상은 실현되지 않았지만 당시 세대의 그 정신적 자존감은 이어져 가야 한다는 것을 로저 미첼은 자신의 영화를 통해 줄기차게 주장하고 있다. 영화의 원제가 ‘블랙버드’인 것은 비틀즈가 이 노래를 불렀던 60년대를 잊지 못하는, 그 시대적 격렬함을 추억하려는 감독의 의지가 담겨져 있다.

 

이 영화의 할머니 릴리와 손자 조너던처럼. 그녀가 손자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은 릴케의 시집이다. 둘째 딸의 게이 파트너인 크리스는 릴리에게 이런 말로 위로하려 한다. “하루는 너무 천천히 가고 한 해는 너무 빨리 지나가네.” 미국 밴드 마그네틱 필즈의 노래 가사다.

 

낡은 세대와 어린 세대는 그렇게 소통한다. 소통은 다분히 시적이어야 하는 것이 옳다. 시대의 변화는 꽤나 미학적이어야 성공할 수 있다. 영화를 다 보고 프랑스 부르고뉴산 피노누아인 쥬브레 샹베르망을 한 병 사서 사람들과 나누어 먹으면 좋을 것인 바, 지나치게 비싸 보이는 만큼 싸구려 술이라도 사서 가족들, 친구들과 나눠 마시면 좋을 것이다.

 

영화 전편에 흐르는 바흐의 ‘조곡 모음 6번 2악장 알르망드’를 유튜브에서 찾아 들으면 좋을 것이다. 연주는 미샤 마이스키 것이 좋다. 너무 한가한 얘기로 들리는 가. 혁명을 좀 예술적으로, 영화적으로 할 일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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