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딸에게 신경 쓰는 것은 딱 하나 인성이다. 교육의 힘인지, 타고난 성품인지 딸아이는 주위 사람들이 인정하는 천사 같은 아이, 그리고 난 이런 착한 딸이 자랑스럽다. 그러나 니체의 ‘권력에의 의지’를 읽다보면 착한 딸이 마냥 자랑스럽지만은 않게 된다. 니체는 착한 사람은 모두 거짓말쟁이고 악하단다. 나쁜 사람이 될 수 있을 만큼 강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착한 사람인 것이고 나쁜 짓을 하지 않는 것은 그것이 나쁘기 때문이 아니라 사회로부터 거절당하고 싶지 않아서 즉 악행을 저지를 만한 용기가 없어서 라는 것이다. 또 착한 사람은 타인에게 반감을 일으키는 말을 하지 않기 위해 필연적으로 거짓말을 하는데 이유는 자신이 안전하기 위해서란다. 그야말로 우리가 생각하는 착함에 대한 니체식 도발이다. 심리학에서도 이러한 심리적 역동을 반동형성(reaction formation)이라는 기제로 설명한다. 억압된 감정이나 욕구가 나타나지 않게 정반대 행동을 하는 것으로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는 속담이 이에 해당한다. 미운 사람을 밉다할 용기는 없고 마음이 불편할 때 반대로 착한 행동을 함으로써 불안을 해소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착한 사람은 도덕적인 사람으로 비춰
9월이 시작됐다. 뜨거운 여름을 보낸 장소에는 수많은 추억이 새겨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기억이 추억되지는 않는다. 더군다나 그 모든 순간이 다 행복했다고 기억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의미 있는 시간은 인생의 어느 순간을 반추하게 만든다. 왜 그럴까? 필자는 장소가 추억이 되고 아름다운 기억으로 인출되는 것은 바로 사람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지난 시간 속 시드니의 새해맞이 불꽃놀이는 황홀했다. 그러나 황홀한 만큼 고생했던 기억이 크다. 그날 나는 불꽃놀이 인파에 밀려 길을 1시간동안이나 헤맸다. 군중 속에 갇혀본 사람은 안다. 군중 속에서는 내가 어디로 갈 것인지가 무의미하다. 그저 군중이 움직이는 방향에서 내가 중심을 잘 잡고 있어야 그나마 내가 가려고 하는 곳을 잊지 않을 수 있다. 그러기에 그날 인파속에 섞여 길을 찾는 과정은 시간이 흐를수록 두려웠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시드니를 떠올리면 기분이 좋다. 그 이유는 화려했던 불꽃놀이도 멋진 오페라하우스도 시드니의 화창한 날씨도 아니다. 사람 때문이다. 같은 시간과 공간에서 두 손 꼭 잡고 힘듬을 함께 나눴던 사람 때문이다. 내가 의지 할 사람이라고는 그 사람뿐이었으며 불안감을 나눌
고등학교 때 일이다. 한문 선생님이 어찌나 고리타분했던지 수업시간에 졸지 않았던 학생은 거의 없었다. 아니 딱 한 명 있었다. 바로 나다. 여기까지 읽으면 내가 뭐 대단한 모범생처럼 들린다. 하지만 나는 다른 이유로 졸지 않았다. 지루하기 짝이 없는데다가, 선생님은 유머도 눈곱만큼도 없었다. 고사성어에 얽힌 이야기라도 좀 해주셨으면 모두 다 반항하듯 잠을 자지는 않았을 거다. 그럼에도 무거운 눈꺼풀을 지탱하기 위해 사투를 벌이며 참았던 이유는 언제까지 선생님이 일관된 모습을 유지하는지 끝까지 볼 참이었기 때문이다. 사람인데 저렇게 기계처럼 한결같을까 하는 마음과 ‘혹시나’하는 마음도 있었다. 그런데 이 선생님, 간혹 하는 말도 가관이었다. 여자애들은 가르쳐봤자 소용없다거나 졸업 후 찾아오는 법은 없다거나 여학교는 기부금이 없어 가난하다거나 심지어 여자는 예쁜 게 가장 큰 경쟁력이라 했다. 소심한 나는 속으로만 반항했다. ‘아니라구요!’ 대학을 다니면서도 직장을 다닐 때도 나는 선생님이 했던 말을 기억했다. 존경하는 선생님께 매년 찾아가 인사드린다든가, 의기양양하게 학교에 기부금을 내기도 했고, 장학금 모금에 동참도 했다. 훌륭한 일은 아니어도 선배로, 제자로
우리 삶은 여러 가지 감정으로 채색돼 있다. 그런데 감정에 대한 세간의 평가도 여러 가지다. 감정은 믿을 것이 못하다고 하여 감정을 저차원의 정신으로 간주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감정은 우리 인생을 풍요롭게 만드는 것이라 하며 감정을 이성보다 못한 위치에 두는 것을 공정치 못하다고 생각 하는 사람도 있다. 우리 정신 문화사를 살펴볼 때도 감정과 이성을 이분법으로 나누었던 때가 있었다. 이것처럼 오늘날의 세상은 거의 모든 일에 승패를 가르고 승자에 열광한다. 대표적인 예가 스포츠와 선거다. 스포츠와 선거는 승패가 있는 것이기는 하다. 그런데 우리 인생이 어디 승패가 분명한 일만 있는 것인가? 우리 정신을 어디 감정과 이성으로 분명히 나눌 수 있는 것인가? 행복감에 대한 정도가 있을 뿐, 반대로 불행에도 정도가 있을 뿐 완전한 행복과 완전한 불행을 정의하기도, 느끼기도 어렵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기고 지는 일에 목숨을 건다. 이기면 순도 백퍼센트의 행복이 찾아올 것처럼 말이다. 승패로 치자면 정치권이 빠질 리가 없다. 총선이 이듬해로 다가오니 이기고 지는 일에 극성스러움이 더해가고 있다. 사회적 문제에 정의로움과 공정함의 원칙 대신 진영의 논리가 자리 잡아 무
영화 ‘기생충’이 제72회 칸 국제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K-POP은 물론 문화 예술의 세계적인 활약이 눈부셨던 우리나라에 이 상은 확실한 문화강국임을 세계에 보여준 사건이다. 그간 봉준호감독이 만든 작품들은 제목만 봐도 범상하지 않다. 괴물에서 이젠 기생충까지.. 물론 우리 생활을 담은 영화이기에 괴물, 기생충 같은 영화 제목은 은유다. 사물을 직접적으로 밝히지 않고 다른 사물 혹은 현상에 빗대어 원래 말하고자 하는 사물을 이야기 하는 것이 은유이거늘, 은유의 실제적 중요성은 은유하는 대상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 우리 삶에서 새로운 이해를 가능하게 해 주는 데에 있다. 그렇다면 기생충이 우리에게 주는 새로운 이해와 해석은 무엇일까? 기생충은 사전적의미가 자기의 삶을 위해 다른 동물체에 붙어서 양분을 빨아먹고 사는 벌레다. 은유는 실제 사물과 은유하려는 것과의 겹침이 꼭 있어야 한다. 즉 사물과 실제 세계의 실재를 범주화하는 관점에서 중요한 것이 유사성이다. 영화를 보지 않아 영화의 실제적인 기생충의미는 파악할 수가 없다. 다만 제목만으로 봐서는 우리 사회의 기생충을 떠올려 보지 않을 수 없다. 기생충은 우리가 징그러워하고 골치아파하고 없애보려고 하고
몸에 가시가 대략 5천개 정도 있다고 하는 고슴도치를 보면 가슴이 아리다. 대체 얘네는 가시가 많아서 어떻게 사랑을 하고 또 어떻게 슬픔을 나누는 걸까? 겨울잠을 자는 동물이라고 하지만 겨울이 가까워오면 이들도 생존을 위해 서로의 온기를 나누려 할텐데 어찌할것인가. 고슴도치들이 추위를 견디지 못해 서로 몸을 기대 온기를 나누려 가까워지면 질수록 서로의 가시에 찔리고, 그렇다고 떨어지면 추위를 막을 수 없게 되는 딜레마를 ‘고슴도치 딜레마’라고 한다. 철학자 쇼펜하우어로부터 유래되었다고 하는 이 고슴도치 딜레마의 핵심은 가까이 다가갈 수도 그렇다고 떨어질 수도 없는 곤란한 상황, 어쩌면 두 고통사이에 어쩌지 못하는 상황에 대한 고민이다. 운이 좋게도 우리는 사랑을 나누기도, 온기를 나누기도, 그리고 슬플 땐 함께 부둥켜 안으며 슬퍼할 수 있도록 몸에 가시 같은 것은 없다. 참 다행이다. 그런데 부모를 살해하고, 친구를 폭행하며 화난다고 묻지마 범죄를 저지르는 사건 사고를 연일 접할 때면 우리 몸에 눈에 보이지 않은 가시들이 가득 찬 것만 같다. 고슴도치 딜레마는 철학적 논의에서 시작되었으나 이후 심리학에서 성격, 발달, 관계의 세 측면에서 문제 상황을 설명할
최근 가장 뜨거운 예술작가를 꼽으라면, 단연 뱅크시(Banksy)다. 영국의 그래피티작가, 일명 거리의 예술가지만 정작 그가 어떻게 생겼는지 아는 사람은 별로 없는 듯하다. 그는 만인에게 작품을 평등하게 보여주는 대신 자신은 꽁꽁 숨겼기 때문이다. 작년 10월 예술계는 엄청난 쇼크에 빠졌었다. 그의 그림 ‘소녀와 풍선’이 소더비 경매에 나왔는데 15억원에 팔렸다. 여기까지는 예술계든 화가에게든 훈훈한 풍경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림이 낙찰되는 순간 ‘소녀와 풍선’은 산산조각이 났다. 뱅크시가 작품을 만들 때 경매에 나올 것을 미리 대비해 액자에 파쇄기를 장착해 놓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이런 예술가는 없었다. 자기 작품을 자기 스스로 계획하여 공개적으로 파손시키다니! 그는 예술계에 도전했으며, 예술의 소유 그리고 자본을 비웃었다. 예술계의 이단아라 불릴 수 있을 정도로 그는 틀에 갇힌 관습과 사상 그리고 권위를 조롱한다. 그리고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그림을 선물한다. 그는 가난한 동네 골목에 벽화를 그려 그림의 공공성을 예술 감성의 평등적 향유를 그리고 고체화된 문화자본(Cultural capital)의 해체를 꿈꾼다. 문화자본은 문화적 취향을 의미하는
테세우스는 아테네 최고의 영웅이다. 그는 전장에서 아테네의 청년들을 구출하여 돌아온다. 그 때 테세우스가 타고 온 배를 기념으로 전시하였는데, 세월이 흘러서 이 배가 부식되기 시작하자 널빤지는 하나씩 하나씩 교체됐다. 그렇게 널빤지가 교체된 배는 테세우스의 배라 할 수 있는가? 일부 교체된 정도라면 테세우스 배와 동일성이 유지된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배의 모든 부속을 다 교체하게 되었다면, 이때도 여전히 테세우스의 배인가?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본질이라는 것이 있는가? 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다른 것과 다르게 그것을 그것답게 하는 것을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데 도대체 절대 변하거나 훼손되지 않는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런 질문을 한 사람은 영국의 철학자, 토마스 홉스이다. 간단한 사고 실험을 한 번 해 보자. 홉스가 테세우스 배의 목재를 교체할 때 헌 널빤지를 빠짐없이 다 모아서 다시 조립하여 배를 만들었다고 가정하자. 그럼 그 완성 조립된 배는 테세우스의 배인가, 홉스의 배인가?같은 의미로 원래의 테세우스의 배는 새로 다 교체되었기에 이 배는 새 테세우스 배 즉 전혀 다른 배라고 할 수 있는가? 정작 이 배는 원래의 테세우스의 배로서의 존재를 유지
화제를 몰고 온 드라마 ‘스카이 캐슬’이 우리사회에 제기한 부모의 ‘외눈박이 사랑’에 대해곱씹어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3대째 서울의대 집안이라는 찬사를 받기위해 오로지 공부만 외쳐대는 부모가 어디 드라마 속에만 일어나는 일이겠는가. 자식이 서울대에 합격만 하면 그들만의 캐슬이 더욱 공고해 지는 세상에서 아이들은 타인을 경쟁자이거나 내 성공을 방해하는 훼방꾼 정도로 인식한다. 정말로 우리는 어떻게 타인을 인지하는가? 타인을 나와 같은 인격체로 인지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은 것 같다. 만약 나와 꼭 같은 인격체로 인지한다면 갑질을 하거나 모멸감을 주거나 혹은 폭행을 일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비인격적인 언사는 어린이가 부모나 학교, 사회에서 문화적으로 체득한 것이기 때문에 이 사슬을 끊어내기 위해서라도 타인이 나와 같은 인격체임을 가르쳐야만 하겠다. 그런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필자는 타인에 대해 진심으로 관심을 기울이는 능력, 이 능력은 21세기형 인간이 갖추어야만 하는 역량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인간존재란 제 아무리 잘났다한들 그리고 독립적으로 완전하다고 주장 한들 인간을 둘러싼 외부적인 환경은 그리 호락호락하지가 않다. 미세먼지와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마치 동결 건조된 듯 우리 삶의 여러 가지 다양한 면을 포착하지 못한다. 사과만 하더라도 조그만 초록색의 풋사과였다가 점점 커지면서 붉은 기를 보이고 급기야는 빨간색 사과로 변한다. 내가 “빨간 사과”라고 말하지만 빨간 사과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시든 빨강이 되고, 겉 표면에 까만 점이 피기도 하고, 썩게 되면 빨간색이 팥죽색으로 변하기도 한다. 그러나 단어는 하나의 고정된 모습을 포착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사과하면 빨강을 연상한다. 여기에 언어와 실재와의 간극이 존재한다. 간극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우선 사물은 하나의 모습을 갖지 않고 변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인간의 눈 또한 객관을 포착할 만큼의 능력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늘 자기 관점만을 서술한다. 이에 반해 우리의 행위는 우리가 참이라고 믿는 것에 기반 한다. 참이라고 믿는 것, 즉 진리처럼 여겨지는 생각을 바탕으로 우리는 행동을 한다. 최근의 방송을 보면 여행과 맛집 프로그램이 대다수다. 여기에는 꼭 빠지지 않는 신조어,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 나온다. 소확행에는 우리 청춘들에게 꿈을 꿀 자유를 차단시켜버린 사회적 고통에 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