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사회제도의 가장 큰 원인은 그릇된 신앙이다. 인간의 삶의 의미는 자기 속의 불합리한 것을 합리적인 것으로 이끌어가는 데 있다. 그것을 위해서는 다음의 두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 생활의 불합리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그것을 외면하지 말 것. 둘째, 다가올 미래 사회의 합리성에 대해 지극히 순수한 이념을 가질 것. 사회제도는 불합리와 거기서 생길 수밖에 없는 비참함을 생각할 때, 그것에 대한 혐오감을 느끼는 반면, 합리적인 생활의 가능성을 뚜렷이 의식할 때는, 자연히 그것을 향해 정진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따라서 불합리에서 생기는 병폐를 숨기지 말고 합리적인 생활의 행복을 사람들에게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모든 인류의 스승이 해야 할 임무이다. 우리는 현대 사회의 여러 가지 현상에 대해 신중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항상 낡은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것을 받아들임으로써 자신의 의견을 바꿀 수 있는 마음 자세를 가져야 한다. 또 선입견을 버리고 완전히 백지상태에서 사물을 판단해야 한다. 바람의 방향도 살피지 않고 언제나 똑같이 돛을 올리는 사공은 절대로 목적한 항구에 다다르지 못할 것이다. (헨리 조지) 사람들이 지금의 모습을 바꾸지 않는 한, 어
남을 대신하여, 그들의 신과 우주에 대한 관계를 결정할 권리를 넘보는 사람들이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한 권리를 남에게 양보하고 그들이 말하는 것을 그대로 맹신하는 사람들이 있다. 양쪽 다 잘못에 빠져 있는 것이다. 모든 종교상의 문제가 이미 해결되어 교리가 확립되어 있다고 믿고, 이내 그 같은 문제의 해결과 교리의 확립을, 뒤를 잇는 사람들의 손에 모두 일임하는 사람들이 있다. 남이 자기의 전매특허로 생각하고 있는 일에 대해 무슨 고민을 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 사람들은 밤낮으로 즐겁게 지내며 취생몽사하는 일생을 보내면 되는 것이다. 그 같은 어리석은 자기만족의 결과가 수많은 사람들이 남의 말을 무조건 받아들이고 있다. 맹목적인 신앙에 의해 만들어진 무쇠 멍에의 흔적이 노예의 증거로서 오래오래 우리의 목에 남게 되지 않을지 나는 두렵다. (밀턴) 사람이 자기의 도덕적 자주성을 포기한 그때부터, 자기의 의무를 내면의 목소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일정한 계급 또는 당파의 견해에 좇아 결정하기 시작한 그때부터, 자신이 몇천만 명 가운데 단 한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핑계로, 자기 의무를 돌아보지 않게 된 그 순간부터, 그는 자신의 도덕적 힘을 잃고 신만이
겸허함이 없는 자기완성은 불가능하다. “내가 이렇게 훌륭한데 더이상 무엇이 완성되어야 한다는 건가.” 높아질수록 더욱 겸손하라. 많은 사람들이 높은 지위와 명예 속에 있지만 인생의 수수께끼는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에게만 계시된다. 너무 어려운 것, 자신의 역량 이상의 것을 구해서는 안 된다.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을 진지하게 고찰하라. 자기에게 필요하지 않는 것에 호기심을 가지지 말라. 지금도 그대 앞에는 그대가 이해할 수 있는 이상의 것이 펼쳐져 있다. 많은 사람들이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의견으로 스스로를 속이고 있다. 그러므로 있지 않은 지식을 자랑하지 마라. (전도서) 예수께서는 그들을 가까이 불러 놓고 “너희도 알다시피 세상에서는 통치자들이 백성을 강제로 지배하고 높은 사람들이 백성을 권력으로 내리누른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사이에서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종이 되어야 한다. 사실은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온 것이다.” 하셨다. 모욕을 당하고도 보복하지 않고 평온하게 그것을 참아 넘길 수
교육의 기초는 만유의 본원에 대한 관계를 수립하고, 그 관계에서 생기는 행동의 규범을 수립하는 일이다. 아동 교육에서 잊어서는 안 될 것은, 아동은 그저 인류의 현재 상태에 맞춰 교육받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더 나은 상태, 즉 지금까지와는 다른 더 나은 생활조건에 맞춰 교육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흔히 부모들은 현재의 세상에만 맞춰 아이들을 교육하고 있다. 그러나 아동을 미래의 더 나은 세상에 맞춰 교육함으로써, 비로소 우리는 인류의 미래사회에 공헌할 수 있다. (칸트) 아이들에게 자기 내부의 신성을 자각시키는 일이야말로 그 부모와 교육자들의 가장 큰 의무라고 나는 생각한다. (채닝) 진정한 교육의 목적은 사람들에게 선한 일을 하게 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 속에서 기쁨을 찾아내게 하는 것이다. 결백하고 정직할 뿐만 아니라, 결백과 정직을 사랑하게 하는 것이다. 정의에 어긋남이 없을 뿐만 아닐, 정의를 갈망하게 하는 것이다. (존 러스킨) 종교는 교육의 기초이다. 그런데도 현대 기독교에서는 아무도 믿지 않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어린이는 예리하기 때문에 그것을 꿰뚫어 보고, 그것들을 믿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가르치는 사람들까지 신용하지 않는다. 마음이 갈
사람들에 대한 선의는 인간의 의무이다. 만일 우리가 선의로써 사람을 대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인간의 가장 중요한 의무를 수행하지 않는 것이 된다. 아무리 비참하고 우스꽝스러운 사람일지라도, 우리는 그를 존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어떤 사람의 내부에도, 우리들 속에 살고 있는 것과 똑같은 영혼이 살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어떤 사람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혐오감을 불러일으킬 때도, '그래, 세상에는 온갖 사람이 다 있게 마련이니까 참아야지' 하고 생각하라. 만일 우리가 그런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드러낸다면, 첫째로 우리는 옳게 행동하는 것이 아니며, 둘째로 그들을 결사적인 싸움으로 유인하게 된다. 그가 어떤 사람일지라도 자기 자신을 바꿀 수는 없다. 그렇다면 불구대천의 원수로서 서로 싸울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런데도 우리는 그가 현재와 같은 인간이 아니라면 좀 더 잘해 줄 수 있을 텐데 하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에게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사람이라도 선의로 대하며, 그에게 다른 사람이 될 것을 요구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쇼펜하우어) 악의 유혹에 빠진 사람을 잔인하게 대해서는 안 된다. 자신도 남에게 위로받은 적이 있는
착한 일을 하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하지만, 악을 행하지 않기 위해서는 그 이상의 노력이 필요하다. 올바른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자제심이 중요하다. 그 자제심은 되도력이면 일찍부터 습관을 다지지 않으면 안 된다. 어릴 때부터 그것이 몸에 배여 있으면 우리의 덕행은 견고한 것이 될 것이다. (노자) 언어에 의한 해독은 명백하다. 우리가 우리의 언어에 의해 괴로워하는 사람들을 눈앞에서 보지 않는다 해도 그 해독이 큰 것은 마찬가지이다. 총에 맞은 상처는 나을 수 있지만, 언어에 의한 상처는 결코 아물지 않는다. (페르시아 격언) 사람들이 그처럼 매혹되어 있는 모든 것, 그리고 그것을 얻기 위해서 그처럼 골몰하고 있는 것, 그러한 것은 그들에게 아무런 행복도 가져다주지 않는다. 사람들은 골몰하고 있는 동안에는 그 갈망하는 것 속에 자신들의 행복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손에 들어오자마자 그들은 다시 안절부절못하고 아직 손에 넣지 못한 것을 바라며 남들이 갖고 있는 것을 부러워한다. 마음의 평화는 헛된 욕망의 충족에 의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 같은 욕망을 버림으로써 얻어지는 것이다. 그것이 진실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다면, 그러한 헛된 욕망을 만족시키
모든 사람은 저마다 무거운 짐을 지고 있고, 저마다 결점을 가지고 있다. 남의 도움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를 위로하고 대화하고 돕지 않으면 안 된다. (성현의 사상) 이 세상은 천 사람이 함께 일하면 같은 천 사람이 따로따로 일할 때보다 훨씬 많은 것을 생산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그렇다고 구백구십구명의 사람이 한 사람의 노예가 되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남의 괴로움에 냉담한 자는 인간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자격이 없다. (사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생활은 인류 전체의 생활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영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모든 피조물은 조화와 합일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연계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정신계에 있어서도 모든 생명 현상은 서로 긴밀한 관계로 맺어져 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천지창조 이후의 인류 역사는 인류의 합일을 향한 끊임없는 전진의 역사이다. 이 합일은 수많은 다양한 방법으로 달성되는 것이며, 그 합일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것에 저항하는 사람들까지 거기에 봉사하고 있는 것이다. 항거할 줄 알면 사람이요, 억눌려도 반항할 줄 모르면 사람 아니다. 그리고 혼자서
그리 중요하지 않은 평범한 것을 많이 알기보다는 참으로 좋고 필요한 것을 조금 아는 것이 더 낫다. 작은 서재에 굉장한 보배가 존재할 수 있다. 수천 년에 걸쳐 세계의 모든 문명국에서 추려낸 가장 지혜롭고 고귀한 인물들의 세계, 즉 그들의 연구와 지혜의 소산이 그 책들 속에 고스란히 살아 숨쉼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며 가까이하기 어려운 존재인 그들은, 우리가 자신들의 고독을 깨뜨리거나 자신들의 작업을 방해하는 것을 견디지 못할 것이고, 또는 사회적 조건들이 그들과의 교류 자체를 불가능하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책 속에는 그들의 최상의 벗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던 사상이, 세기를 건너뛰어 누구인지도 모르는 우리에게 명료한 언어로 펼쳐져 있다. 우리는 인생에서 가장 큰 정신적 은혜를 책 속에서 얻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원래 반추동물(反芻動物)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저 많은 책을 머리에 채워 넣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가 삼킨 것을 잘 새김질하여 소화시키지 않는다면 책은 우리에게 아무런 힘과 자양도 주지 않을 것이다. (로크) 무엇보다 먼저 좋은 책부터 읽어라. 그렇지 않으면 결국 평생 그 책을 읽을 기회를 놓치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고 그분의 사업을 성취하는 데 있다”고 예수는 말했다. 우리에게는 저마다 우리를 보내신 분의 일을 성취하기 위해 할 일이 있다. 우리는 신이 우리를 통해 이룩할 사업의 전모를 알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사업에 동참하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모를 수가 없다. 지혜의 법칙을 아는 자는 그것을 사랑하는 자보다 못하고, 그것을 사랑하는 자는 그것을 실천하는 자보다 못하다. (중국 잠언) 나는 괴롭다. 나는 신에게 도움을 청한다. 그러나 내가 신을 섬겨야 하는 것이지 신이 나를 섬겨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이를 깨닫는다면 괴로움은 절로 가벼워질 것이다. 이 지상과 천상 사이에 심연이 있는 것은 아니다. 신이 우리에게 준 주거가 영원히 악과 이기주의와 압박의 지배 아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신성 모독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지상은 단순한 속죄의 장소가 아니라 우리가 진리와 정의를 실천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곳이다. 그 진리와 정의에 대한 갈망은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내재되어 있다. (주세페 마치니) 인생의 목적을 단순히 일신상의 행복이라고 생각한다면, 인생은 견디기 어려운 허망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가장 야만적인 미신의 하나는, 현대의 대다수 학자들에게 만연되어 있는, ‘인간은 신앙이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는 미신이다. 언제 어느 시대를 불문하고 사람들은, 자신을 처음으로 이 세상에 보낸 이가 누구이고, 또 그 궁극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하며, 적어도 그것에 대해 자기 나름의 이해를 가지기를 열망해왔다. 그래서 이 같은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만인을 하나의 기원을 가진 형제로 결합시키고, 그들의 삶에 공통된 궁극의 목적을 천명하기 위해 종교가 등장한 것이다. (주세페 마치니) 진정한 종교는, 사람들이 자기를 에워싸고 있는 무한한 삶과의 사이에 수립하는 관계를 뜻한다. 그 관계가 그의 삶과 이 무한한 삶을 연결하여 그의 행위를 지도하는 것이다. 모든 종교의 본질은 나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 그리고 나를 둘러싼 무한한 세계와 나는 어떤 관계에 있는가 하는 물음에 대한 해답에 있다. 가장 고차원적인 종교에서 가장 야만적인 종교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종교가 그 밑바탕에, 이러한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와 ‘나’의 관계의 수립이라는 문제를 가지고 있다. 종교는 사람들에게 최고의 교육장이며 최대의 계몽주의자이지만, 반면에 외면적인 현상과 정체성의 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