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일하는 사람들의 나라를 세우려고 몸부림이다 일해도 몸으로 손발로 일하는 사람들의 나라를 일으키는 것이 우리의 꿈이다 놀고 먹는 사람들이 지배하는 나라 몸으로 일하는 사람들을 천대하고 짓밟고 밀어내는 나라는 저주를 받아라 그러나 우리는 이 나라가 저주받기를 원치 않는다 이 나라가 아무리 손발 놀려 땀 흘리는 사람들 천대하는 나라라고 해도 이것은 우리의 조국이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는 꿈을 버리지 못한다 이 나라가 몸으로 일하는 사람들의 나라가 되는 꿈을 이 나라가 저주를 받는 것이 아니라 하늘과 땅의 축복으로 해와 달과 별의 축복으로 비와 눈과 바람과 이슬의 축복으로 아니 몸으로 노동하는 이들의 온몸에서 흐르는 땀의 축복으로 자유와 평등 정의와 평화를 누리는 나라 노래와 춤의 나라 모든 담장 무너지고 모두들 이웃사촌으로 허물어지는 나라가 되는 꿈을 우리는 버리지 못한다 최고의 가치가 물방울 다이아몬드가 아니라 노동인 나라의 꿈 종교도 도덕도 철학도 무슨 무슨 주의도 과학도 정치도 예술도 모두 노동의 깃발 아래 모여 하나인 나라의 꿈 겨레 사랑을 말로 하지 않고 얼싸안고 비비대는 몸으로 하는 온몸으로 노래하는 나라 앞산 뒷산의 바위굴과 함께 우직하게 풀이파
인생은 그것이 의무의 수행이며 봉사라는 걸 깨달을 때 비로소 합리적인 의미를 지닌다. 우리는 죽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히 알고 있다 '사람의 인생은 방안에 날아들었다가 다시 날아가 버리는 제비와 같다' 우리는 어디선지 모르게 이 세상에 왔다가 어디론지 모르게 떠나간다. 뒤에는 보이지 않은 어둠이 있고 앞에는 짙은 암흑이 있다. 마침내 우리의 때가 왔을 때, 우리가 맛있는 것을 먹었는가? 먹지 않았는가? 부드러운 옷을 입었는가? 입지 않았는가? 막대한 재산을 남겼는가? 아무것도 남기지 못했는가, 빛나는 명예 속에 살았는가, 멸시를 받으며 살았는가, 학자로 인정받았는가, 무식한 사람으로 여겨졌는가 하는 것이, 우리가 신으로부터 잠시 빌린 재능을 어떻게 활용했는가에 대해 얼마만한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헨리조지) 이 세상의 아주 사소한 일 속에서도 신의 힘이 번뜩임을 인식하는 사람은 지극히 높은 이해력과 지극히 높은 이상을 가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람은 자기 자신도 타인도 존중하며, 사소한 것도 가볍게 보지 않고, 그러한 것들도 모두 하느님의 힘이 나타난 것으로 본다. (페르시아의 루미) 선행이란 사람이 자기 자신에게 해야 하는 봉
과거는 이미 존재하지 않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존재하는 것은 오직 현재뿐이다. 현재에 있어서만 인간 영혼의 신적이고 자유로운 본성이 나타난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빛이 너희와 같이 있는 것도 잠시뿐이니 빛이 있는 동안에 걸어가라. 그리하면 어둠이 너희를 덮치지 못할 것이다. 어둠 속을 걸어가는 사람은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요한복음 12장 35절) 모든 습관이 반복적인 연습에 의해 강화된다는 것은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정신적 능력도 마찬가지이다. 네가 화낼 때 너는 단지 그것만의 악을 행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와 동시에 자신의 내부에서 화내는 습관을 기르고 있다는 것, 말하자면 불 속에 장작을 던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육체적 유혹에 빠졌을 때 단지 그것만의 죄를 지었을 뿐, 그 이상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나쁜 생각과 소망은 바로 그렇게 해서 내 안에서 강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므로 만약 화내는 습관을 가지고 싶지 않거든 분노를 최대한 억제하여, 그 습관이 더 이상 자라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러면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자신의 나쁜 생각과 싸울 힘을 얻을 것인가
한 번 몸에 밴 습관에서 벗어나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자기완성을 향한 첫걸음은 언제나 그러한 벗어남에서 시작된다. 너희는 남들의 생각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생각에 의해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원칙은 실생활에 있어서는 정신생활에 있어서나 똑같이 필요 불가결한 것이다. 이 법칙을 지키는 일은 대단히 어렵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자신들이 너희 이상으로 너희의 의무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세상 속에서는 세상의 의견에 따라 사는 것이 쉽지만, 고독 속에서는 자기 자신의 의견에 따르는 것이 쉽다. 다만 군중 속에 있으면서, 자신이 고독할 때의 독립자존을 지키는 자가 참으로 위대한 사람이다. (에머슨) 본질적으로 너희와 아무 관계도 없는 인습에 영합하는 것이, 너희의 정력을 소비하고 너희의 시간을 빼앗으며, 너희의 원래의 소질을 망쳐버린다. 그런 것에 얽매여 있으면 그 쓸데없는 일에 너희의 가장 뛰어난 능력이 허비되는 건 물론이고, 원래 너희 자신이 대체 어떠한 존재인지 인식하는 것조차 참으로 어려워진다. 그러한 생활은 영혼도 육체도 멸망시킨다. (에머슨) 세상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처럼 생각하고 우리처럼
누구나 다 자신은 누군가에 의해 이 세상에 부름을 받은 존재라고 믿고 있다. 죽음은 자신의 생명을 끝낼 수는 있지만, 자신의 존재를 끝내는 일은 절대로 할 수 없다는 믿음도 거기서 온 것이다. (쇼펜하우어) 영혼은 육체 속에서 자기 집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 잠시 머무는 것이다. (인도의 쿠랄) 무한한 과거와 무한한 공간에서의 영원한 침묵은 나를 공포에 빠뜨린다. 무한한 과거와 무한한 미래 사이에 있는 인생의 무상함을 생각하고, 내가 차지하고 있는 공간, 나아가서는 내 눈에 들어오는 공간, 내가 모르는, 그리고 또 나를 모르는, 한량없이 넓은 모든 공간에 비해 거대한 바다의 밤톨만 한 그 보잘것없는 공간을 생각하면, 나는 정신이 아득해지면서 내가 지금 왜 이곳에 있고 다른 곳에 있지 않은 건지 의아해진다. 왜냐하면 내가 지금 바로 이 순간 저곳이 아니라 이곳에 있어야만 하는 아무런 근거도 없기 때문이다. 도대체 누가 나를 이곳에 있게 했을까? 도대체 누구의 지시, 누구의 명령으로 바로 지금 바로 이곳에 있게 되었을까? 아마도 인생이란 손님이 되어 지낸 덧없는 하루의 추억과 같은 것이리라. (파스칼) 죽어야 하는 자여! 우리에게 주어진 생명은 그리 길지 않다.
전쟁의 모든 참화에 대해서는 잠시 접어두고, 그것의 가장 큰 악의 하나는 인간의 마음을 비뚤어지게 하는 것이다. 군대가 존재하고 군사비가 지출되는 것을 어떻게든 설명해야 하는데, 합리적인 설명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결국 이성이 비뚤어지게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강 건너편에 살고 있고, 그의 황제가 내 황제와 싸우고 있다는 이유로 그와 나 사이에 무슨 나쁜 감정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에게 나를 죽일 권리가 있다고 하는 것보다 더 불합리한 얘기가 또 있을까? (파스칼) 사람들이 전쟁의 어리석음을 깨닫게 되는 날은 반드시 올 것이다. 4세기 전에 피사와 루카의 주민들은 서로 맹렬하게 미워했는데, 마치 그것이 영원히 지속될 것처럼 피사의 짐꾼까지도 신분이 높은 루카 시민에게 뭔가 신세를 지는 것을 피사에 대한 수치스러운 배신이라고 여겼다. 지금 그 적개심의 흔적이 어디엔가 남아 있을까? 마찬가지로 현재의 프러시아인의 프랑스에 대한 적개심에는 장차 무엇이 남을까? 그러한 감정이 장차 우리의 자손에게, 마치 아테네인의 스파르타인에 대한 증오심이나 피사의 주민의 루카 주민에 대한 증오심과 마찬가지로 보일 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명백하다. 사람들은 이윽고 자신들에게는 서
신은 기도를 드리고 아첨을 떨어야 하는 우상이 아니라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실현해야 하는 이상(理想)이다. (류시 말로리) (* 한자어 理想은 ‘생각을 분별하고 다스린다’는 의미이다. 옮긴이) 지금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은, 신이 있기 때문에, 그리고 내가 신을 알기 때문에 아는 것이다. 오직 이 사실 위에서만 모든 사람들에 대한, 또 자신에 대한, 나아가서는 초지상적, 초시간적인 생명에 대한 관계가 확립된다. 나는 그것을 신비주의로 생각하지 않을뿐더러, 그것과 반대되는 사고방식이야말로 신비주의이며, 그 사고방식 자체는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고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유일하고 엄연한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신이란 무엇인가? 하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겠다. 신이란 내가 자신을 그 일부로 의식하는 무한한 존재이며, 전체라고. 신은 나에게는 정진의 목표이고, 그것을 향해 정진하는 것이 바로 나의 삶 그 자체이며,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 존재하는 것이지만, 그래도 도저히 그것을 이해하거나 이름을 부르거나 할 수는 없는 지고한 존재이다. 만약 내가 신을 이해했다면 나는 이미 신에게 도달했을 것이고, 그러면 정진의 목표도 없어지므로 내 삶도 사라질 것이다.
자신의 생명이 자신의 영적 ‘자아’에 있음을 인식하는 사람에게는, 삶에 있어서나 죽음에 있어서나 악이 있을 수 없다. 설사 운명이 너를 어디로 내던지더라도, 네가 스스로 생존의 법칙에 충실한 한, 너의 본질, 너의 영혼, 너의 생명, 너의 자유와 힘의 중심은 언제 어디서나 너와 함께 따라다닐 것이다. 세상에는 자신과 자신의 영혼의 합일을 파괴하거나, 영혼과의 교류를 단절하고, 자기 자신과의 내면적 불화에 의해 영혼의 평화를 깨면서까지 추구해야 하는 외면적 행복이나 외면적 위대함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런 값비싼 희생을 치러서라도 손에 넣어야 할 무엇이 있다면 부디 나에게도 가르쳐주기 바란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육에서 나온 것은 육이며 영에서 나온 것은 영이다. 새로 나야 한다는 내 말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 바람은 제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듣고도 어디서 불어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모른다. 성령으로 난 사람은 누구든지 이와 마찬가지다. (예수) 많은 점에서 생각해 보건대 나에게는 선량한 사람들의 영혼은 신성을 갖추고, 영원 불멸성을 갖추고 있는 것 같지만, 특히 가장 선량하고 가장 총명한 사람들의 영혼은 모두 내세를 향하고 있
사랑한다는 것은 대상의 삶을 사는 것이다. 사랑은 그것을 경험한 자에게 정신적, 내적 기쁨을 줄뿐 아니라, 세상을 즐겁게 사는 데 중요한 조건이다. 진정한 사랑은 어떤 특정한 사람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자 하는 정신상태이다. 즉 우리가 그 안에 있어야 비로소 우리 영혼의 신적 본원을 의식하는 정신 상태이다. 사람들에 대한 너의 선의를 이웃에 대한 선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너는 그 선물을 너 자신에게 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사랑을 받으려고 억지로 애쓰지 말라. 사랑하라. 그러면 사랑을 받을 것이다. (성현의 사상) 인생의 고뇌를 유화(柔和)로, 배신을 은혜로, 굴욕을 용서로 바꾸는 것, 바로 그것이 숭고한 정신에서 나오는 성스러운 연금술이다. 그리고 그 변화는 극히 평범하고 극히 쉽게 이루어져서 사람들 눈에 참으로 자연스러워 보이고, 따라서 사람들로부터 격려를 받을 필요조차 없을 정도가 되어야 한다. (아미엘) 성인은 자신의 감정을 갖지 않고,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으로 한다. 선한 사람에게는 선으로 대하고, 선하지 않은 사람도 역시 선으로 대한다. 믿는 사람에게는 믿음으로 대하고 믿지 않는 사람도 역시 믿음으로 대한다.
병에 걸리는 것은 인간에게는 당연한 현상이므로, 우리는 그것을 사람들에게 당연한 조건의 하나, 인간과 떼어 놓을 수 없는 생활 조건의 하나로 생각해야 한다. 육체의 건강을 도외시하면 사람들에 대한 봉사를 할 수 없게 된다. 또 육체에 대해 너무 염려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 중용을 발견하는 방법은 단 한 가지,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것을 방해받지 않는 정도로, 또 사람들에 대한 봉사와 대립되지 않는 형태로, 육체를 배려하는 것이다. 환자가 생활을 완전히 중단하고 질병 치료에만 전념하는 것보다는, 불치병이든 나을 수 있는 병이든, 병 같은 것은 아예 무시하고 평소대로 생활하는 것이 낫다. 설사 그것 때문에 생명이 단축되는 한이 있더라도 끊임없이 자신의 육체를 두려워하고 걱정하면서 살아가기보다는 훨씬 나은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으로서 해야 할 일을 못하게 방해하는 병은 없다. 사람들에게 노동으로 봉사할 수 없다면, 사랑으로 가득한 인내의 모범을 보임으로써 봉사하라. 마음의 병은 육체의 병보다 위험하고, 또한 더 흔하게 볼 수 있다. (키케로) 치료의 근본적인 조건은 그 치료가 해를 주지 않도록 하는 것이라는 히포크라테스의 말은, 육체에 병이 있을 때도 자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