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인은 자신의 현재의 처지를 굳이 바꾸려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신의 법칙, 즉 사랑의 법칙의 수행은 어떠한 상태에서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군자는 모든 것을 자신에게서 찾고 소인은 모든 것을 남에게서 찾는다. (공자) 나는 내 운명을 한탄하거나 핑계 삼지 않았다. 그러나 딱 한 번, 신발이 없는데 그것을 살 돈마저 없었을 때, 나도 모르게 불평한 적이 있었다. 나는 그때 무거운 마음으로 쿠파의 한 커다란 이슬람 회당에 들어갔는데, 거기서 나는 발이 없는 사람을 보았다. 그래서 나는 신발이 없을 뿐 멀쩡한 두 발을 가진 것에 대해 신에게 감사했다. 현자는 마음속에 하늘의 섭리를 의식하고 있어서, 문밖에 나가지 않아도 알아야 할 것은 다 알고 있다. 멀리 가면 갈수록 정말 아는 것은 적어진다. 그러므로 현자는 여행을 하지 않아도 알아야 할 것은 알고, 사물을 보지 않아도 그것이 어떤 것인지 알며, 직접 뛰어들지 않고도 위대한 일을 하는 것이다. (노자) 자신의 처지에 불만이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을 두 가지 방법으로 바꿀 수 있다. 즉 자신의 생활조건을 개선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자신의 마음가짐을 개선하는 것이다. 앞의 것은 언제나 가능하다고 할 수 없지만 뒤
진리를 인식하는 데 가장 큰 장애는 허위가 아니라 거짓 진리이다. 현실 생활에서의 환상은 어떤 한순간 현실을 왜곡시킬 뿐일지 모르지만, 관념의 세계 속의 미망은 몇천 년 동안 맹위를 떨치며, 수많은 사람들에게 멍에를 지우고, 가장 고귀한 인간 정신의 발로를 압살하며, 속임수에 넘어간 노예들을 시켜 속일 수 없었던 사람들의 발에 쇠사슬을 채운다. 그 미망이야 말로 모든 시대의 성현들이 그것을 상대로 불리한 싸움을 해온 불구대천의 적이며, 그들이 그것과 싸워서 얻은 것만이 인류의 진정한 재산이 되었다. 진리는 아무리 그것이 무슨 도움이 될지 알 수 없다 하더라도 탐구해야 한다. 왜냐하면 전혀 예상치 않았던 곳에서 그 효용이 드러나기 때문이고, 모든 미망은 그 속에 해독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진리의 승리는 그 과정은 힘겹고 고통스럽지만, 그 대신 한 번 자리를 차지하면 다시는 물러서지 않는다. (쇼펜하우어) 적발된 허위는, 인류의 행복에 있어서 명백하게 표명된 진리와 마찬가지로 소중한 재산이다. 인간을 미망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은 그에게 무언가를 주는 일이지 결코 빼앗는 일이 아니다. 허위에서 해방되는 것은 진리를 인정하는 일이다. 진리로 여겨졌던 것이 허위임을
폭력은 오로지 혐오감을 불러일으킴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위대함이라는 옷을 걸치고, 존경심을 강요한다는 점에서 특히 해롭다. 폭력으로 우리를 강제하는 자는 우리의 권리를 빼앗는 자이므로 우리는 그들을 증오한다. 반대로 우리를 설득하는 자는 우리의 은혜자로 사랑한다. 어리석고 거칠고 무지한 사람일수록 폭력에 호소한다. 폭력을 행사하는 데는 많은 협력자가 필요하다. 그러나 설득을 하는 데는 협력자가 전혀 필요하지 않다. 자신의 지혜로 설득할 자신이 있는 사람은 결코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다. 자신과 견해가 다른 사람도 우애의 정으로 설득하여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더 유리한데, 그 사람을 배제할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소크라테스)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들은 폭력과 강제를 통해서만 사람들을 움직일 수 있다고 믿고, 현존하는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대담하게 폭력을 행사한다. 그러나 현재의 체제는 폭력이 아니라 일반 여론에 의해 유지되고 있으며, 폭력은 그 여론의 작용을 파괴해버린다. 그러므로 폭력의 행사는 그것이 유지하고자 하는 것의 힘을 약화시키고 파괴할 뿐이다. 인간은 원래 타인을 강제하거나 타인에게 굴종하도록 창조된 존재가 아니다. 이 두 가지 습관은 사람들로
우리는 하느님과 재물의 신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 부를 가지려 하는 노력과 진실한 정신적 생활의 요구는 양립할 수 없는 것이다. 한번 은 어떤 사람이 예수께 와서 “선생님, 제가 무슨 선한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너의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러니 내가 시키는 대로 하고 나를 따라오너라” 하셨다. 부가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생각은 미신에 불과하다. 바울은 배금사상을 우상 숭배라고 일컬었다. 왜냐하면 부를 소유하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것을 의미 있게 이용할 줄 모르고, 일종의 성물(聖物)로 여기며 감히 손도 대지 못한 채 그대로 자식에게 물려주기 때문이다. 돈에 대한 욕망은 악마보다 나쁘다. 금전욕은 우리에게 무엇을 명령할까? 그것은 이렇게 말한다. “너는 모든 사람의 원수가 되고 적이 되어라. 자연을 잊고, 신을 모독하고, 너 자신을 나에게 바쳐라. 그러면 사람들은 그 명령에 절대적으로 따를 것이다. 우상 앞에는 소와 양을 산 제물로 바치지만, 금전욕은 ‘나에게 네 영혼을 제물로 바쳐라’ 하고 말한다. 그러면 모두들
오늘날 학문이라고 불리고 있는 지식은 인간 생활의 행복에 공헌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저해하고 있다. 학문은 태양의 흑점이 나타나는 원인을 해명함으로써가 아니라, 우리의 삶의 법칙과 그 법칙의 배반에서 생기는 결과를 밝힘으로써, 자신의 과제에 답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존 러스킨) 자연에 관한 한, 경험은 우리에게 법칙을 주고 또 진리의 원천이 되어 주지만, 도덕적인 법칙에 관해서는 경험은 유감스럽게도 미망의 어머니이다. 그러므로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법칙을, 자연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과 역사상 일어났던 일에서 이끌어내거나, 그것에 한정하는 것은 지극히 부당한 일이다. (칸트) 지식은 위인을 겸허하게 하고, 보통 사람을 놀라게 하며, 소인배를 우쭐하게 한다. 학문은 마음의 양식이다. 그러나 육체의 양식을 지나치게 많이 먹으면 육체에 해롭듯이, 마음의 양식도 지나치면 병에 걸리는 수가 있다. 그것을 피하려면 마음의 양식도 육체의 양식과 마찬가지로 꼭 필요한 때 필요한 만큼 섭취해야 한다. (러스킨) 지식이 중요한 것이 되려면,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사람들의 일치를 위해 봉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람들은 모든 사람에게 유일한 진리를 인
마치 항해사가 그 배가 나아가야 할 올바른 진로를 선택하기 위해 연안의 광경을 안내표로 삼을 수 있는 것은, 그것이 그의 눈에 보일 때, 이를테면 강을 지나갈 때뿐이며, 대양을 항해할 때는 나침반에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되듯, 종교인들도 일상생활에서는 외면적인 목적에 따라 행동해도 되지만, 보편타당한 인생의 의의를 탐구할 때는, 어김없이 경고하는 양심의 소리에 따라야 한다. (표도르 스트라호프) 사욕을 떠난 행위를 할 때마다 우리가 느끼는 만족감은, 그 행위가 다른 사람의 모습 속에 자기 자신의 존재가 들어있음을 단적으로 인식하는 것에서 생기는 감정이며, 그 때문에 또한 우리의 진정한 ‘나’는 단순히 우리의 자아, 즉 고립된 자기 몸뿐만 아니라, 살아있는 모든 것 안에 존재함을 인정한 것이 옳았음을 뒷받침해 준다. 이기주의자는 적대적인 타자들 사이에 있는 고독한 자신을 느끼고, 오로지 자기 한 사람의 행복을 바라게 된다. 선량한 사람은 우애로 가득한 존재들의 세계에서 살며, 그 모든 존재의 행복이 그 자신의 행복이 된다. (쇼펜하우어) 육체를 위해 사는 사람은 사변적, 또는 감성적인 생활의 복잡한 미로에서 길을 잃는 수가 있지만, 영혼은 언제나 정확하게 진리를
사람들은 진리에 가까이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타인의 잘못에 대해 너그러워진다. 그 반대 또한 진리이다.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의심할 여지없는 원칙이 있다. 그것은 만약 어떤 일이 선을 배반하지 않고는 이루어질 수 없다면, 그것은 진짜 선한 일이 아니거나 아직 그 일을 할 시기가 되지 않은 것이다. 신은 양심과 이성의 힘으로 사람들의 마음에 믿음의 불을 켜주고 있다. 폭력으로는 믿음의 불을 켤 수 없다. 폭력과 위협이 가져다주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공포이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사람, 방황하는 사람을 비난하고 나무라서는 안 된다. 그들은 그 미망으로 인해 이미 충분히 불행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것이 그들에게 이익을 가져다주고 있을 때는 그들을 나무라도 상관없지만, 오히려 그것은 대부분의 경우 그들에게 반발심을 일으켜 그들을 더욱 돌아서게 만든다. (파스칼) 우리는 오히려, 과거의 것을 대신할 수 있는 새로운 일치의 기초를 탐구해야 하지 않을까? (마르티노) 신앙은 사랑과 마찬가지로 억지로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정치적 수단으로 신앙을 도입하고 그것을 보호하려 해도 잘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랑을 강요하면 오히려 증오를 불러일으키듯
인류가 진보하는 것은 바로 종교적 신앙이 진보하기 때문이다. 신앙이 진보한다는 것은 새로운 종교적 진리를 발견하거나, 인간의 세계와 신에 대한 새로운 관계를 탐구하는(새로운 것은 아무것도 없다) 것이 아니라, 종교적 이해와 결부된 모든 필요 없는 것들을 버리는 일이다. 새로운 종교적 진리라는 것은 없다. 유사 이래 모든 현자의 세계 및 신에 대한 관계는, 오늘날의 것과 완전히 같다. 종교가 진보하는 것은 뭔가 새로운 것이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이미 발견되고 표현된 것을 정화하는 데 있다. 신앙이란 어떤 시대, 어떤 사회에서 가장 뛰어난 선각자들에 의해 도달된, 인생에 대한 가장 높은 이해의 지표이며, 그 사회의 나머지 사람들도 언젠가 틀림없이 불가항력적으로 그것에 접근해가게 된다. 진정한 진보, 즉 종교적 진보와 기술적, 과학적, 예술적 진보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기술적, 과학적, 예술적 업적은 현대에서 볼 수 있듯 종교적 퇴보 속에서도 매우 위대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궁극을 탐구하고자 한다면 무엇보다 먼저 온갖 미신과의 싸움과 종교적 의식의 해명, 정화를 목적으로 하는 종교적 진보의 투사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세상의 권력자들이 권력의
만약 삶이 행복이라면 삶의 필연적 조건인 죽음도 역시 행복이라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죽음은 자아로서의 자신으로부터 해방되는 일이다. 대부분 죽어가는 사람의 얼굴에 나타나는 평화와 안도의 표정은 아마 거기서 유래하는 것이리라. 선한 사람의 죽음은 대개 조용하고 평온하다. 그러나 각오를 하고 죽는 것, 스스로 나아가 기꺼이 죽는 것은 자기를 버린 자, 살려는 의지를 거부하며 그것을 포기한 자의 특권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람만이 겉으로만이 아니라 진실로 죽기를 원하는 자이며, 따라서 자아의 존속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고 또 요구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 죽은 자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들이 있는 곳에 있다. (세네카) 만약 죽음이 무섭다면 그 원인은 죽음 속이 아니라 우리의 내부에 있다. 선량한 사람일수록 죽음을 두려워하는 일이 적다. 성자에게는 이미 죽음이 존재하지 않는다. 육체의 죽음은 육체를 결합시키고 있는 것을 멸망시킨다. 즉 순간적인 생명의 의식을 멸망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매일 잠들 때 늘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문제는 과연 육체의 죽음은, 나의 모든 의식의 흐름을 통일하고 있는 것, 다시 말해
신은 인간의 지혜로는 파악할 수 없는 존재이다. 우리는 다만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신의 존재를 아는 것은 오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어머니 품에 안긴 갓난아기가 경험하는 감정을 우리에게 느끼게 해주는 신에 대한 전적인 종속감에 의해서이다. 갓난아기는 도대체 누가 자기를 따뜻하게 안아 젖을 먹여주는지는 모르지만, 누군가가 존재하고 있음은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기를 안아주는 그 사람을 사랑한다. 신성의 본질까지 꿰뚫어 보려 해서는 안 된다. 신이 계시하지 않은 것까지 알려고 하는 것은 신성모독이다. 지금까지 위대한 태초의 비밀을 잠시라도 들여다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일찍이 자기 자신 밖으로 한 발짝이라도 내디딘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 그대, 온 세상을 온통 찾아 헤매고 있는 자여! 성자이든 죄인이든, 가난뱅이든 부자이든 어느 누구고 그대를 알려면 아직도 멀었다. 그대의 이름은 모든 존재와 함께 울려 퍼지고 있지만, 사람들은 모두 귀머거리이다. 그대는 모든 사람의 눈앞에 있지만, 사람들은 모두 장님이다. (11세기 페르시아의 오마르 하이얌) 인간은 신을 닮으려고 노력해왔다. 그런데 성직자들이 신을 인간과 비슷한 존재로 만들어 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