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에 대해 나쁜 감정이 일어나면 그를 비난하고 싶어지는 법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비난을 하기 시작하면 그에 대한 나쁜 감정이 더 커지기 마련이다. 가장 일반적이고 널리 퍼져 있는 미신 중의 하나는 인간은 저마다 정해진 본성을 가지고 있어서 착한 사람, 나쁜 사람, 현명한 사람, 어리석은 사람, 열정적인 사람, 냉철한 사람 등이 있다는 미신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에 대해 그 사람은 나쁜 사람일 때보다 좋은 사람일 때가 더 많고, 어리석을 때보다 현명할 때가 더 많으며, 냉정할 때보다 정열적인 때가 많다거나 그 반대로도 말할 수는 있지만, 만약 어떤 사람은 언제나 선량하고 현명한데 다른 사람은 언제나 사악하고 어리석다고 말한다면 그건 잘못된 것이다. 너는 이웃의 약점을 보고 있지만, 그의 선행 하나가 너의 한평생보다 더욱 신을 기쁘게 하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네 이웃이 불행히도 죄에 빠졌을 때, 너는 그가 그 전에 흘린 눈물도 모르고 그 뒤의 참회도 모르며, 그의 슬픔과 상심의 목격자인 신은 그를 용서했는데도 너는 여전히 그를 비난하고 있다. (성현의 사상) 사람들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다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어쨌든 양쪽에 다 잘못이 있다. 만약 한쪽이
신을 의식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을 만큼 쉬운 일이다. 그러나 신을 배워서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현명하고 겸손한 사람은 인간의 지성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 한계를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자신의 영혼과 자신을 창조한 자에 대한 개념도 결국 순수한 영혼만이 볼 수 있는 것처럼 분명히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그 한계 안에서 찾으려 한다. 그는 그 개념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자신이 참으로 높은 존재와 마주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는 것으로 만족하며 그 속을 들여다보려 하지 않는다. 그 한계를 넘어서는 것은 인간의 본성에 어긋나는 공허한 관념에 불과하다. 또한 인간의 지성은 항상 감정이 요구하는 것에 굴복하고 만다. (루소) 내 마음속의 빛, 속의 빛이란 말로 하기가 어려운 건데, 있기는 분명히 있지 않아요? 무슨 이상한 걸 봐야만 아는 것이 아니지요. 우리가 생각하기에도 그건 있어요. 깊이 생각해보면 우리 속이 캄캄 어두울 때가 있고 밝을 때가 있단 말이에요. 그건 우리도 환히 아는 일, 우리 정도로도 그것은 아는 거지요. 그런데 밝을 때가 있다고 해서 그것이 내가 힘써 된 거냐 하면 그건 것은 아니에요. 또 캄캄하다고 해서 내가 그러고 싶어
투쟁에 있어서의 참된 용자는 신이 자신의 동맹자라는 것을 알고 있는 자이다. 자아를 부정하는 사람은 그 무엇보다 강하다. 왜냐하면 자아는 우리의 내부에서 신을 가리고 있기 때문이다. 자아를 부정하는 순간부터 우리의 내부에서 행동하는 것은 이미 우리가 아니라 신이다. 한 번은 여왕이 아끼던 보석을 잃어버렸다. 온 나라에 다음과 같은 방을 붙였다. ‘30일 안에 보석을 찾아 돌려주는 사람은 후한 상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30일이 지나서 돌려주는 사람은 사형에 처하리라.’ 랍비 사무엘이 이내 잃어버린 보석을 찾았으나 그것을 30일이 지나서야 돌려주었다. “너는 외국에 가 있었느냐?” 여왕이 그에게 물었다. “아닙니다. 저는 집에 있었습니다.” 그가 대답했다. “그렇다면 온 나라에 어떤 방이 붙었는지 모르고 있었느냐?” “아닙니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 어째서 30일이 지나기 전에 가져오지 않았느냐? 30일이 지나면 사형에 처한다고 하지 않았느냐?” “제가 폐하께서 잃어버리신 물건을 돌려드리는 것은, 처형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신이 두려워서임을 보여 드리려 한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걸어가는 길을 거부하고 자기 자신을 믿으려고 결심한 자는 행복하다.
16세기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에서 출발한 데카르트의 사유하는 인간으로서의 인간 명제로부터 21세기의 ‘나는 소비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하는 욕망충족의 소비형 인간 명제에 이르기까지 이 사이에는 수많은 인간 명제가 존재할 수 있다. 그중 내가 좋아하는 명제는 ‘나는 반항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까뮈의 명제와 ‘나는 반역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브레히트의 명제이다. 이것이야 말로 인간다움의 정체성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삼 년 전 ‘조물주’ 위에 ‘건물주’라는 얘기만 들었을 때는 헛웃음으로 넘겼지만, 영혼을 끌어서라도 아파트와 주식에 매몰하는 ‘영끌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는 왠지 모르게 명치 끝이 심하게 저렸다. 그런데 부동산 관련 뉴스가 남한 사람들의 모든 대화를 잠식하는 오늘에 이르러서 나는 맨붕이 되고 말았다. 신자유주의라고 일컬어지는 욕망경쟁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내가 남보다 많이 갖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자연적인 행위로 받아들일 수는 있지만, 정신이 물질의 노예로 전락해가는 쾨테가 파우스트에서 예언한 ‘영혼팔이’ 곧 인간성의 타락 내지는 파멸을 보면서는 자포자기하지 않을 수 없다. 뭐 그렇게 내가 뛰어난 사
사물을 대하는 데는 사랑이 없어도 괜찮다. 즉 사랑없이 나무를 베고 벽돌을 만들고 쇠붙이를 쳐도 괜찮다. 그러나 사람을 대하는 데는 사랑이 없으면 안 된다. 그것은 함부로 벌을 다뤄서는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벌의 성질로 보아 만약 이를 함부로 다룬다면 벌도 다치고 인간도 다친다. 인간은 일할 생각이 있으면 일할 수 있지만, 사랑의 실천은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경우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사랑 없이 사람을 대해도 괜찮다고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남에게 무언가를 요구할 때는 더욱 그러하다. 사랑을 느끼지 못할 때에는 가만히 앉아 자신을 돌아보는게 좋다. 배가 고플 때는 음식을 먹어야 하는 유익한 것처럼, 사람을 대하는 데는 오직 사랑이 뒤따라야 유익한 인간관계가 이루어진다. 한번 사랑 없이 사람을 대하기 시작하면 결국 사람들에 대한 잔인함과 냉혹함의 한계가 사라지고, 너 자신의 고통에도 한계가 사라질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장 중요한 계율인 ’원수를 사랑하라‘가 실제로 지켜지는 것을 보기 전에는, 나는 절대로 기독교인이라고 자처하는 자들을 기독교인으로 인정할 수 없다. (레싱) 우리가 원하지 않는 것, 즉 온갖 종류의 폭력과 강제, 형벌, 심지어
동물적 생활을 보내는 사람에게 육체적 욕망의 만족이 행복인 것처럼, 자신의 영성을 의식하고 있는 사람에게 자기 부정은 바로 행복이다. 남에게 선을 행하는 사람은 선인이다. 만약 그가 선을 행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고통을 받는다면 그는 더욱 더 선인이다. 나아가서 그가 선을 행한 상대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면 그는 최고의 선에 도달한 것이며, 그 선을 더욱 강화할 수 잇는 것은 오직 그가 그것을 계속함으로써 받는 고뇌의 증대뿐이다. 또 만약 그가 그것 때문에 죽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인간으로서 최고의 완성에 도달한 것이 된다. (라 브뤼에르)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지 않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 자기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 (예수) 아집은 영혼의 감옥이다. 감옥이 우리의 육체의 자유를 빼앗는 것처럼 아집은 반드시 우리의 행복을 빼앗는다. (류시 말로리) 남을 위해 사는 것이 비로소 진정으로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사는 것이다. 얼핏 이상하게
중요한 것은 지식의 양이 아니라 질이다. 굉장히 많은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가장 필요한 것은 모르고 있는 사람이 있다. 모른다는 것은 그리 부끄러운 일도 아니고 나쁜 일도 아니다. 아무도 모든 것을 다 알 수는 없다. 모르는 것을 아는 척하는 것이야말로 부끄러운 일이고 잘못된 일이다. 지식인들의 논리 정연해 보이는 말들은, 때때로 어떻게도 받아들일 수 있는 애매한 의미를 언어에 부여함으로써, 해결하기 힘든 문제를 회피하려고 한다. 이유는 ’모른다‘고 하는 매우 솔직담백한 말이 학문의 세계에서는 그리 환영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칸트) 인간의 무지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태어나면서부터의 순수하고 자연스러운 무지이고 다른 하나는 진정한 현자만이 도달하는 깨달음의 무지이다. 그런데 세상에는 이것저것 거죽만 핥은 얄팍한 지식을 갖고 대단한 학자인 양 떠들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이 세상을 어지럽히고 있는데 바닥 민중은 그들의 허황됨을 알고 경멸한다. 그러면 그들은 민중을 무지몽매한 무리라고 경멸한다. (파스칼) 가장 나쁜 것은 깊이 고찰된 사상에만 어울리는 특별한 언어를 사용해, 함부로 자신의 사상을 얘기하려는 사람들이다. 만일 그들이 쉬운
모든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한 존경을 요구할 수 있다. 그와 동시에 자신도 타인을 존경해야 할 의무가 있다. 어떤 사람도 수단이나 목적이 될 수 없다. 모든 인간은 만인 속의 인간적 존엄성을 인정하고 그 존엄성에 대한 경의를 표시하는데 인색해서는 안 된다. (칸트) 노동자들의 복지문제에 대해 권력자들은 마치 자신들이 그들의 보호자라도 되는 양 거만하게 말한다. 노동의 존엄성을 인식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 거만한 말투는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모욕보다 더 모욕적이다. 노동자를 지극히 동정하는 듯한 그들의 말투 속에서, 원래 노동자에게 가난은 피할 수 없는 것이고, 자신들이 도와주지 않으면 반드시 가난하고 비참한 상태에 빠지게 된다는 편견을 엿볼 수 있다. (헨리 조지) 민중에 대한 보호는 어느 시대에나 폭력에 대한 구실이었고, 군주제와 귀족제를 비롯한 특권층의 자기 정당화를 위한 구실이었다. 심지어 공화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권력을 장악한 사람들이 노동자를 보호한다는 것은 고작해야 인간이 가축을 보호하는 것과 같다. 인간은 나중에 그 힘과 살코기를 이용하기 위해 가축을 보호할 뿐이다. (헨리 조지) 사람들은 소심하여 늘 자신을 비하하기만 한다. ‘나는 존재한다.
우리의 행위 자체는 우리에게 속해 있지만 그 행위의 결과는 이미 하늘에 속한 것이다. (프란체스코) 우리는 날품팔이꾼이다. 하루하루 열심히 일해서 그날의 품삯을 받도록 하라. (탈무드) 우리의 행위에 대한 결과는 다른 사람이 평가한다. 오로지 지금 이 순간 네 마음을 깨끗하고 바르게 유지하기만 하면 된다. (존 러스킨) 우리가 추구하는 목표가 높으면 높을수록, 또 우리가 노력한 결과를 보고 싶어하는 마음이 적으면 적을수록, 성공할 확률도 더 높아진다. (존 러스킨) 인간의 행위 가운데, 결과가 천천히 나타나는 것일수록 더 훌륭하고 더 가치가 높으며 더 위대한 일이다. (존 러스킨) 만일 네가 자신이 일한 결과를 직접 볼 수 있다면, 네가 한 것은 결국 하찮은 일이었다는 것을 알라. 인간이 자신이 한 행위의 결과를 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결과를 확인할 수 있는 가능성이 적으면 적을수록 그 행위는 중요한 행위이다. 우리는 신의 사업을 행하면서 인간의 대가를 바라고 있다. 사람의 얼이란 것은 온갖 힘의 물둥지다. 모든 냇물이 흘러서는 물둥지에 고이고 또 고였다가는 흘러나서 여러 갈래의 냇물이 되듯이, 사람이 하는 모든 일은 마지막에 한 번은 반드시 정신으로
부유한 지배계급과 가난한 피지배계급으로 나눠져 있는 세상이란 애초부터 잘못된 거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 세상은 황금만능주의의 결과 공정한 경쟁이라는 미명 아래 전쟁과 다름없는 생존경쟁의 아수라장으로 변하고 말았다. 부유한 기업인은 말한다. “노동자가 굶어죽는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이냐? 난 약속한 대로 임금을 다 지불했다. 그 이상 나더러 어떡하라는 말이냐?” 카인도 아우 아벨을 죽이고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야훼께서 물었을 때, “제가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 하고 답했다. 공장주도 그렇게 말한다. “내가 형제인 노동자에게 약속한 임금을 다 치르지 않았다는 말이냐?” (칼라일) 인간은 땅 위에서 땅에 의해서만 살 수 있는 존재이므로, 어떤 사람이 사는 땅을 다른 사람이 빼앗는 것은, 그 사람의 피와 살을 빼앗는 것과 같다. 땅의 약탈에서 생기는 사회제도는 덜 직접적이고 덜 노골적인 뿐, 과거의 노예제도보다 더욱 잔인하고 더욱 사람을 타락시키고 만다. (헨리 조지) 지금 우리는 앞서간 사람들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온갖 편리한 물건 속에 파묻혀 있다. 그러나 우리는 행복한가? 설령 소수의 사람들이 많은 행복을 누리고 있다 치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