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토가 지천인 계절. 보통 한 박스 사면 익은 것과 덜 익은 것으로 섞어서 산다. 그래야 익은 것부터 차례대로 먹을 수 있다. 마지막 몇 개는 물러서 버려야 했던 일을 두어 번 겪은 이후부터다. 붉게 말랑한 감정과 푸르게 단단한 감정들이 한 박스에 가지런하다.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근처였던가? 그 식당이. 트라토리아 정도의 식당이었는데 그때 처음 토마토 브루스케타를 먹었다. 바게트 위에 다진 토마토를 올려먹는 것으로 그리 맛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배가 몹시 고파서 맛있고 안 맛있고를 따질 형편이 아니었다. 미술관을 나올 때쯤 딸들과 나는 기진맥진이었다. 평일이라 미술관 예약을 하지 않아도 될 줄 알았다. 숙소에서 나와 걸어서 미술관까지 갔다. 거기다 한 시간여를 기다리다 입장했고 미술관을 다 돌고 나오니 허기가 몰려왔다. 몇몇 관광객은 거리에서 치아바타 사이에 채소가 들어간 커다란 파니니를 먹었다. 아무리 배고파도 길거리에서 먹는 것은 절대 하고 싶지 않은 우리는 주변에 있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이탈리아는 식당의 종류가 몇 가지로 나뉜다. 고급식당인 리스토란테가 있고 트라토리아는 그 다음 중간정도의 식당이다. 오스테리바는 동네 식당 정도이고 그 밑에 피
햇감자가 생겼다. 감자하면 떠오르는 것이 <동백꽃>이다. 김유정의 단편 <동백꽃>에서 옆집 ‘점순이’가 ‘나’에게 내밀던 큼지막한 감자 세 알이 퍽이나 인상 깊었다. “느 집엔 이거 없지?”라며 감자를 내민 점순이의 손을 밀치던 ‘나’의 비참한 심정이 감자 알 만큼이나 크게 가슴에 들어찼기 때문이었다. 감자 요리를 그리 즐기지 않는다. 그래도 감자 수프는 좋아한다. 감자를 깎는 일은 좀 재미있다. 칼끝에서 돌돌 말리는 감자껍질은 나선으로 바닥에 떨어진다. 나선으로 꼬인 상념들도 감자 껍질 떨어지듯 툭 떨어진다면 좋겠다. 양파도 깐다. 감자 수프엔 양파가 들어가야 감칠맛이 난다. 이상하게도 수프는 비 오는 날 만들게 된다. 홈통에서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스프를 만들면 마음은 차분하게 수프에 몰두한다, 깊은 냄비에 주걱을 넣어 바닥에 가라앉는 전분을 저으면서 비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낮은 소리에 집중한다. 그러다보면 수프는 다 만들어지고 집안에는 부드러운 감자 수프 냄새가 머문다. 감자 수프의 맛은 밋밋하다. 나처럼 싱거우면서도 묘하게 숟가락이 자주 간다. 특별한 맛은 아니지만 한 숟가락 입안에 넣으면 나른하고 따뜻하게 목을 넘어간다. 걸
산책을 했다. 하늘은 파랗고 바람은 찼다. 붓꽃 싹이 귀를 쫑긋거리며 물가에 모여 있었다. 새는 봄을 물고 가지를 날아 다녔다. 웅덩이에 하늘이 담겨 있었다. 바람이 불자 하늘이 흔들렸다. 바람의 방향으로 쓸려갔다가 쓸려왔다. 윤슬이 반사되었다. 눈을 가늘게 떴다. 화려한 날이었다. 고양이가 물가에 죽어있었다. 봄빛을 닮은 털. 목에는 분홍 리본이 매어 있었다. 목걸이가 있으면 집에서 키우는 고양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누군가가 아끼는 고양이였겠지 싶어 가슴이 내려앉았다. 고양이는 옆으로 누워있었다. 모로 누워 잠을 자는 듯 고요했다. 하얀 네발 가지런히 한 쪽으로 모았다. 머리도 그쪽으로. 한때 내 발도 한쪽으로만 향했던 날이 있었다. 버석한 뒤꿈치 들키고 싶지 않은 날들이었다. 갈라지고 파인 날들. 자고 일어나면 똑같은 일과가 기다리고 있었고 바꿀 수 없는 현실은 틈을 내주지 않았다. 뒤꿈치는 아무도 보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웅덩이에서 따라 왔을까. 하루 종일 죽은 고양이가 발끝에 따라붙었다. 쌀을 씻어 안칠 때에도, 밥을 먹을 때에도. 책을 펼치면 책 속에 누워있었다. 분홍 리본을 두르고 네 발 가지런히 모으고. 강아지처럼 며칠 따라 다닌 말이
페이스북(face book)에 모란이 피었다. 속치마 같은 하얀 꽃잎이 수술을 가운데 두고 겹겹이 포개졌다. 타임라인을 훑던 눈이 사진에 꽂힌다. 한군데만 있는 것이 아니다. P씨와 K씨도 J씨의 페이스북에도 하얀 모란이 있다. 배경과 모델은 동일하나 찍힌 각도가 다르다. 셋이 함께 본 모양이었다. 모두 자신의 휴대폰에 모란을 담았다가 시간차를 두고 각자 페이스북에 고이 풀어놓았겠지. P씨는 서교동의 하얀 모란이라는 제목으로 꽃의 얼굴을 클로즈업을 했다. 사진 찍는 솜씨가 빼어난 그이의 모란은 화려하다. 그이는 내가 가지지 못한 기술을 갖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시를 쓰는 솜씨도, 음식을 만드는 솜씨도, 살아가는 솜씨도 감칠맛이 난다. K씨는 활짝 핀 것과 시들고 있는 모란을 함께 찍었다. 어쩌자고 길에서 면사포를 쓰고 있냐고 모란에게 묻는다. 역시 시인의 감수성은 남다른 것인지. 그늘이 깊은 그이의 시를 읽을 때 나는 눈을 감는다. 눈을 감아야 보이는 것들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J씨의 모란은 수줍은 듯 꽃잎이 살짝 벌어졌다. 더불어 붉은 모란 사진도 함께 올렸다. 보기 드문 백모란이 피었다며 홍모란도 함께 올리고 친절하게 김영랑의 시도 올렸다. 전직 기
햇살이 눈부신 한 낮. 벚꽃이 화사하다. 이렇게 화려한 날에 외출할 일이 없다. 좀 아쉽다. 대신 삶은 달걀을 다져 넣은 샌드위치를 만든다. 달걀을 삶는 동안 오이와 양파를 다지며 입술을 움직여 본다. 샌. 드. 위. 치. 입술 사이로 나오는 낯익은 발음. 카페에서도, 빵집에서도 흔히 보는 간단한 식사. 아니, 간단하다는 말은 하지 말기로 하자. 결론만 보고 과정을 간과하는 사고다. 먹는 방법이야 한 입 베어 무는 것으로 간단할지 몰라도 만드는 과정은 절대 간단하지 않은 음식이 샌드위치니까. 간단하게 비빔밥 해먹자는 말도 마찬가지다. 가운데에 낀 상태를 샌드위치에 비유한다. 두 쪽의 빵 사이에 있는 재료처럼 사람과 사람사이에 부대끼는 상황이다. 부모와 자녀사이. 상사와 부하 직원사이, 선배와 후배사이의 중간자 역할이 힘들다. 부모에 대한 부양과 자녀의 뒷바라지로 정작 자신의 노후는 생각할 겨를이 없는 중년. 권위적인 상사와 공사 구분이 명확한 부하직원 사이에서 욕을 먹는 과장. 선배와 후배 틈에서 괴로운 가운데가 그렇다. 이들의 공통점을 든다면 책임은 무겁고 권리는 가볍다는 것이다. 명예 없이 책임만 짊어지는 경우도 있다. 일이 잘못되면 질책이 쏟아진다. 하
손을 보면 그 사람의 삶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손을 보면서 그 사람의 이력을 유추한다. 남자들이 여자를 볼 때 얼굴 다음으로 많이 보는 곳도 손이라고 한다. 제 2의 얼굴인 셈이다. 나는 손으로 하는 일을 잘 못한다. 손도 작아 일도 못 하지만 일하는 것을 겁내는 내게 할머니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죽으면 흙 속으로 가는 걸 손을 아껴서 뭐해” 손을 보면 생각나는 여자가 있다. 내 손을 한참 들여다보던 여자가 있었다. 전에 살던 집 1층 상가의 여자. 처음 건물 1층에 들어선 것은 ‘○○○ 숯불구이’였다. 식당 주인 여자는 자신의 이름을 넣은 간판을 달았다. 이름이 연극배우와 같았다. 하지만 가냘픈 연극배우와 건강하게 보이는 그 여자는 어떤 연관성도 찾을 수 없었다. 이름과 여자는 따로국밥처럼 전혀 연결되지 않았다. 걸걸한 목소리, 부스스한 파마머리가 많은 시간을 식당에서 보냈을 거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사십대의 보통 아줌마였다. 여자의 남편이 직접 내부 공사를 마치자 숯불구이 간판이 걸렸다. 3층에 살던 나는 학원이나 조용한 가게가 들어오길 바랐는데 좀 실망스러웠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과 달리 식당은 잘 되었다. 음식 맛도 괜찮았고 여자도 싹싹했다. 주
봄은 퍼즐이다. 꽃눈은 가지에 끼워지고 골짜기를 나온 물은 들판으로 끼워진다. 새는 나무에 분홍 발목을 끼우고 맑고 높은 소리를 공중으로 끼워 맞춘다. 봄의 각본대로. 이때쯤 조향사는 바쁘다. 흔히 아는 향수 브랜드의 조향사가 아니다. 샤넬이나 디올도, 조말론이나 불가리도 아니다. 누구에게도 고용되지 않은, 인공의 어떤 것도 불허하지 않는 자연의 조향사다. 매년 봄의 초입에 간판을 걸었다가 꽃이 지면 간판을 내린다. 조향사는 예민하다. 사소한 것 하나라도 봄의 향연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온도가 조금만 내려가도 개업이 늦춰지는 봄의 특성상 바람에게 단단히 주의를 당부한다. 3월에는 한발 한발 서두르지 말고 안단티노로, 4월에는 적당한 온도의 알레그레토로 오라고. 가끔 조절을 못해 꽃잎이 얼어버리는 일도 있으니. 향을 빚을 땐 1밀리리터의 오차도 없어야 한다. 봄 시즌 한정판은 늘 긴장 하라고. 공급물량 부족으로 주문수요를 감당 못할 수도 있으니 눈 똑바로 뜨고 있으라고 말이다. 잠깐 한 눈 팔다간 봄이 금방 소진 되므로. 마수걸이가 좋아야 다음 품목도 히트 친다. 프리지아는 이른 봄만큼 상큼하고 화사한 향을 준다. 졸업시즌부터 출하되는 인기 품목이다. 지
누군가에게 전화라도 걸고 싶은 저녁. 차에 앉아 휴대폰 연락처를 들여다본다. 바이러스 때문에 사람들을 만나지 못한 것이 여러 날. 만만하게 전화할만한 이름을 떠올려본다. 몇 명 되지 않는 중에서 퇴근시간이라 망설여지는 몇을 빼고 나면 한 둘 정도만 남는다. 한 사람에게 전화를 건다. 신호음이 울어도 받지 않는다. 바쁜 시간이니 당연하다. 저무는 하늘 끝으로 시선을 돌린다. 나무가 보인다. 하늘로 뻗은 가지가 허공을 나눈다. 가지와 가지 사이 삼각이나 사각으로 분리된 허공. 그 사이에 걸린 저녁의 채도가 짙다. 이내 나뭇가지와 허공의 경계를 어둠이 흐려 놓는다. 경계가 모호해진다. 심리적인 경계는 보이지 않는다. 타인들이 암묵적으로 설정한 경계가 그렇다. 나만 모르는 경계를 타인들이 공유하면 ‘왕따’가 된다. 그 경계는 성벽처럼 견고하다. 빈틈 하나 없이. 어쩌면 그것은 내가 만든 경계선이었을지도 모른다. 스스로 만든 선 안에서 바깥을 바라보는 것. 일명 ‘자발적 왕따’라고 하지. 생각해보면 내가 먼저 뒤돌아서고 금을 그어놓은 경우도 있지 않았던가. 환했던 낮은 침몰하는 배처럼 조금씩 어둠에 잠긴다. 나무들도 검은 형상으로 굳어간다. 어느 누가 저 어둠을 말릴
달을 하나 넘었다. 설도 지나고 1월도 뒤로 가고 2월이다. 빠르다. 아무리 바쁘게 움직여도 시간은 나를 앞지른다. 뒤로 갈수록 흐름도 가팔라진다. 벌써 2월. 어느 시인은 2월을 ‘벌써’라는 말과 잘 어울리는 달이라고 했지만 ‘아직’이라는 말도 잘 어울린다. 이때는 뭘 입어도 마땅찮다. 아직은 추워서 두꺼운 옷을 입지만 우중충하다. 백화점에 진열된 야들야들한 봄옷들 때문이리라. 아직 봄이 아닌데도 봄을 볼모로 한 마케팅에 지갑을 연다. 미리 옷을 사놓고 기다리는 것도 매년 되풀이되는 2월의 단골 매뉴얼이다. 달이 짧아서 그럴까. 손해 보는 기분이다. 아이들 학원 수강료는 달 단위로 일정하게 지불하는데 실제 수업 일수는 다른 달보다 적다. 그렇다고 이삼일 깎아주지도 않는다. 하긴 다른 달과 똑같이 받는 월급은 이득을 보는 셈이다. 그런데 밑지는 기분이 드는 것은 왜인지. 단물 빠진 애인처럼 밋밋하다. 12월처럼 크리스마스가 있는 것도 아니고 7, 8월처럼 열정적이지도 않다. 4월처럼 하늘거리지도 않는다. 겨울이라고 하기에도 그렇고 봄이라고 우기기에도 무리다. 존재감이 미미해서 안쓰럽다. 1월과 3월 사이, 까치발을 한 2월. 눈 감았다 뜨면 지나버리는 아쉬운
연대를 표현할 때 서양은 BC와 AD를 쓴다. 그리스도 탄생을 전후로 기원전과 기원후로 나눈다. 그리스도 탄생이 그 기준점이다. 내 역사에도 기준점이 되는 지점이 있다. 섣달그믐 무렵이면 부엌은 부산했다. 아궁이에선 장작불이 타고 가마솥에서 하얀 김이 솟아올랐다. 엄마와 할머니는 며칠 전부터 수정과며 식혜를 만들고 만두를 빚느라 종종걸음을 쳤다. 2㎞가 되는 길을 걸어 방앗간에서 가래떡도 빼왔다. 종일 언 논에서 썰매를 지치던 동생들은 무릎이며 바짓단이 푹 젖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흙이며 지푸라기를 묻히고 얼굴은 빨갛게 얼어서. 그리고는 꽁꽁 언 다리를 아랫목 이불에 집어넣고 앉아 강정을 먹거나 얼음 낀 차디찬 식혜를 받아먹었다. 매년 설은 추운 날을 잡아서 돌아왔다. 코끝이 찡하게 얼어붙을 것 같은 매운 날만 골랐다. 처마의 고드름도 가장 길게 늘어지는 겨울의 강심. 그 한복판에 낀 설. 눈밭에 떨어진 귤처럼 달력에도 내리 사나흘 빨간색으로 설 연휴가 끼어 있었다. 설 아침에는 늘 고민을 했다. 차례가 끝나면 제사상에 놓인 음식 중에서 무엇부터 먹을까가 나의 가장 큰 고민이었다. 곶감, 옥춘사탕, 약과, 젤리. 어느 것 하나 뒤로 세워놓을 수 없었다. 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