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년 전 대만의 허우 샤오시엔 감독이 만든 영화 ‘밀레니엄 맘보’를 다시 보는 것은 진실로 ‘천국보다 낯선’ 일이다. 허우 샤오시엔 감독은 현재 치매 투병을 위해 은퇴를 했다. 그는 살아 있지만, 살아 있지 못하고 그래서 더욱 전설이 됐다. ‘밀레니엄 맘보’는 2001년에 만들어진 영화이고 제목으로도 알 수 있듯이 새로운 세기인 뉴 밀레니엄 시기의 기이한 희망, 일상의 불안, 흔들리는 세대에 대한 얘기이다. 이 영화가 나왔을 때 모두들 환호했다. 다들 허우 샤오시엔의 걸작이 나왔다고 했다. 지금도 그 생각엔 변함이 없을까. 영화도 시대가 변하면 다르게 보이는 것이 아닐까. 다르게 보여야 하지 않을까. 오래전 이 영화가 각광을 받았던 것은 아마도 스타일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영화는 이렇다 할 서사가 없다. 요약할 수 있는 이야기라곤 비키라는 젊은 여자(서기), 그의 오래된 연인 하오하오(단균호) 그리고 새로운 남자 잭(고첩)이 맺어 가는 얽히고설킨 관계뿐이다. 얽히고설킬 것도 없다. 하오하오는 비키에게 이상할 정도로 집착을 하고 잭은 잭대로 더 이상할 만큼, 남자에게 시달리는 여자에게 늘 친절하게 잘 대해 준다. 잭은 비키의 은신처이다. 그러나 그뿐이다. 하오하오란 남자는 룸펜이다. 아버지의 롤렉스 시계를 훔쳐서 유흥비로 흥청망청 살아가는 대책 없는 젊은이이다. 시계는 당시의 대만 돈으로 8만 달러(260만원)이다. 비키는 하오하오가 가진 50만 대만 달러(2천2백만원)를 다 쓰면 바로 그를 떠날 거라고 매번 얘기한다. 그러나 그녀는 그러지 못한다. 그녀는 힘들 때는 잭에게 왔다가 다시 하오하오에게 끌려가곤 한다. 영화는 별다른 사건 없이 이런 관계의 반복을 보여 준다. 어쩌면 당시의 삶, 24년이 지난 지금 우리의 삶도 뭐 대단한 것이 없을지도 모른다. 거대 담론에 앞장서고 정치와 경제 역사를 얘기하는 척, 24년 전 대만의 젊은이들처럼 우리 역시 그렇게 부유(浮游)하고 흔들리는 삶을 지속하고 있을지 모른다. 비키와 하오하오는 늘 같이 텍 사운드 클럽(테크노 클럽)을 드나들며 술을 마시고 약을 하며 지루한 섹스를 교환한다. 일상은 대단할 게 없고 그때의 젊은이나 지금의 젊은 층이나 모두들 무엇을 지향하고, 어떤 가치를 지녀야 하는지를 알지 못한 채 살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건 어쩌면 젊은 세대가 지니는 역설의, 기이한 특권일 수 있다. 그들은 방황하는 세대이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은 기약 없는 방황을 통해, 그 통과의례를 거쳐 뉴 밀레니엄, 곧 새로운 시대로 진입하기 마련이다. 세상은 그런 그들의 고독과 고통, 혼란을 지켜보고, 인내하며, 기다려야 한다. 젊은이들은 역사적 서사를 만들 나이가 아니다. 개인적인 서사를 꾸려 가기에도 부족한 세대이다. 그러나 새로운 100년은 분명 그들의 것이다. 그들이 주인공이다. 영화 ‘밀레니엄 맘보’가 하려는 얘기는 바로 그 지점에서 찾아진다. 다르지만 같은 영화가 영국 마이클 윈터바텀의 ‘나인 송스’(2011)이다. 극중 남녀의 실제 섹스 장면이 들어 있어 일부에게서는 포르노그래피로 오인받고 있지만 이 영화 역시 극도의 방황에 시달리는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두 남녀가 하는 일이라곤 술을 먹고 약을 같이 하면서 섹스를 하고 록 콘서트에 가서 실컷 몸을 흔들다 돌아오는 것뿐이다. 그리고 또 약을 하고 술을 하며 섹스를 한다. 반복의 일상이다. 이들이 이러는 것은 그것을 너무나 좋아해서라기보다는 그것밖에는 할 일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2001년이나 2011년이나 2025년 현재나, 젊은이들은 늘 흔들리고 있는 셈이다. 기성세대는 일정 부분 목표를 찾았고, 쟁취했으며, 나름 누리고 있다고 그들은 생각한다. 그 상실감과 소외감이 전 세계 젊은이들의 마음을 휘어잡기 마련이다. ‘밀레니엄 맘보’나 ‘나인 송스’나 다 같은 맥락을 지닌 작품이다. 극 후반 비키는 잭의 집에 찾아와 눈물을 흘린다. 자신이 뭘 해야 하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고 말하며 흐느낀다. 그건 매우 관념적인 사치의 행동처럼 보이지만 잭은 그런 비키를 말없이 받아 준다. 잭은 대만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이다. 어머니 집은 홋카이도이며 외할머니는 유바리에서 선술집과 여관을 운영한다. 비키는 잭을 따라 유바리에서 눈을 구경하고 돌아온 적이 있다. 그런 잭이 홀연히 사라진다. 잭은 일본으로 돌아간다는 메시지를 남겼고 무슨 사고가 났다고 하는데 아마도 그는 일본 야쿠자 조직의 일원으로 보인다. 그녀는 잭을 찾아 도쿄 신주쿠의 한 여관으로 가지만 그를 만나지 못한다. 비키는 잭이 남긴 핸드폰만을 가지고 일본을 떠돈다. 그녀의 독백이 이어진다. 거리에는 노동자들과 학생, 주부들로 북적인다고 한다. 비키는 마치 그들 중 하나인 척 행동한다. 젊음의 치기를 벗고 기성세대로 편입된 잭을 통해 비키는 드디어 그들 중 한 명으로 변신해 가고 있는 셈이다. 그녀는 긴 터널을 지나 왔으며 잭이 그녀를 그리워하고 있음을 알아채게 된 것처럼 자신이 이제 기성의 세계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고 그래서 이제 그 문턱에 도달해 있음을 깨닫는다. 비키가 잭의 코트에서 나는 애프터 셰이브와 담배 냄새를 그리워하는 이유이다. 비키는 지긋지긋했던 하오하오와의 섹스도 추억한다. 그녀는 그를 눈사람으로 기억한다. 눈사람은 해가 뜨면 사라지듯이 그와의 섹스가 서글펐다고 말한다. 비키는 이제 더 이상 하오하오를 생각하며 화를 내지 않는다. 사라지기 전 잭은 그녀에게 일본으로 혼자서 오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비키는 그게 꼭 잭, 자신에게 오라는 얘기인 것을 알게 된다. 그 둘이 만나게 될지 그렇지 못할지는 모르는 일이다. 기성의 세대는 젊은이들이 꼭 자신의 세계로 올 것이라는 걸 알고 있으며 그렇게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기성의 질서와 새로운 가치가 꼭 합치되리라는 법은 없다. 현재는 과거에서 배우고 과거는 현재를 통해 그 존재감을 구현해 낼 것이다. 그럴 때가 있고 그러지 못할 때도 있다. 영화 ‘밀레니엄 맘보’가 예전처럼 열광적인 반응을 얻을 것 같지는 않다. 그냥 기억의 회로 하나를 더 열고, 켜는 것뿐이다. 이 영화가 나왔던 2001년보다 지금 우리는 얼마나 진화하고 진보했는가. 우리의 일상은 보다 행복해졌는가. 그때 고민했던 20대들은 지금 50대가 가까워졌고 그들은 과연 자신들이 세상을 바꾸고 자신을 바꿔 냈다고 생각하고 있을까. 세월의 흔적과 더께를 생각하면 이상하게도 약간 서글퍼진다. 우리 모두는 눈사람일 뿐이다. 해가 뜨면 녹아서 사라지는 눈사람. 영화 ‘밀레니엄 맘보’는 그런 상징의 눈사람에 대한 추억을 얘기하는 영화이다. 이 ‘밀레니엄 맘보’가 비상계엄과 쿠데타와 탄핵의 고통의 길을 가고 있는 현재의 우리에게, 특히 젊은이들에게 어떤 길을 가르쳐 줄 수 있을까. 어떤 해법과 혜안을 주게 될까. 젊고 새로운 관객들의 반응이 기다려지는 이유이다.
킹스맨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알고 보니 크리스마스이브에 LA공항에서 보안검색 요원으로 일하다 큰 위기를 겪고 있었다. 영화 ‘킹스맨’으로 스타덤에 올랐던 테런 에저트의 최신작으로 넷플릭스 공개작인 ‘캐리 온’의 얘기이다. 제목인 캐리 온은 일종의 비행 용어로 수하물이라는 뜻이다. 이번 주 이 영화 ‘캐리 온’을 소개하는 이유는 순전히 크리스마스와 연말 시즌이고 세상도 어지러운 바, 위기를 이겨 나가는 한 남자의 이야기(그게 꼭 왜 남자여야만 한다는 얘기는 아니다.)를 그려 나간, 추적 스릴러 한 편쯤이 괜찮지 않아서일까 하는 판단 때문이다. ‘캐리 온’은 연말에 집 안에서 즐길 만한 팝콘 용 액션 영화로 적당한 작품이다. 주인공 이선 코펙(테런 에저트)은 막 임신한 아내 노라(소피아 카슨)와 함께 여느 날처럼 LA 공항으로 새벽 여명 길에 출근을 한다.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이고 수십만 명의 여행객, 비행기 이용객들이 몰리는 날이다. 지각하면 안 되지만 오늘도 몇 분 늦었다. 노라도 공항 직원이다. 최근에 매니저급으로 승진했다. 아내는 자신의 남자 이선이 공항 보안 요원 일에 그다지 큰 열의를 보이지 않는 이유가 원래 경찰이 되고 싶어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경찰 시험에 다시 응모하라고 말한다. 이선은 한번 떨어진 적이 있다. 어쨌든 이선은 아내의 그런 마음에 부응하고자 출근 후 상관에게 오늘만큼은 좀 더 책임 있는 일을 시켜 달라고 간청한다. 그는 이 일을 시작한 지 3년 만에 처음으로 검색대 모니터 체크 요원으로 앉게 된다. 공항 검색 요원들은 나름 내부적으로 등급과 체계가 있는 모양으로 사람들의 몸을 직접 점검, 수색하는 일보다 검색대 모니터를 체크하고 수상한 수하물을 잡아 내는 업무가 보다 높은 자리인 것으로 보인다. 이 직책을 맡아야 승진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선은 중요 업무 첫날부터 된통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다. 누군가가 보내온 스마트 이어 폰을 귀에 꽂은 순간 아내인 노라를 저격하겠다며 아내를 죽게 만들고 싶지 않다면 특정 남자의 수하물을 열어 보게 하지 말고 검색대를 그냥 통과시키라는 명령 아닌 명령을 받게 된다. 수하물의 정체는 ‘노비촉’이라는 이름의 러시아제 신경화학물질이다. 닿기만 해도 치사율 백 퍼센트의 가장 악질적인 생화학 가스이다. 이선에게 ‘오더’를 보내는 누군가는 공항 안 여행객(제이슨 베이트먼)으로 위장하고 있는 상태이다. 이 범인은 공항 밖 누군가, 혹은 어떤 조직으로부터 백업을 받고 있고 그들은 모든 CCTV를 해킹해서 이선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중이다. 이 수하물이 비행기에 탑재되는 순간 뉴욕행(나중에는 그게 워싱턴 DC행이라는 것이 밝혀지지만) 비행기 승객 250명은 바로 죽은 목숨이 된다. 이 범죄조직이 노리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이선은 살인 가스 수하물도 막고 자신의 아내의 목숨도 지킬 수 있을 것인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추적 서스펜스가 시작된다. 이번 영화 ‘캐리 온’을 만든 자우메 코예트세라(자움 콜렛 세라) 감독은 스페인 카탈루냐 출신으로 ‘논스톱’과 ‘언더 워터’ 등 폐쇄 공간에서 벌어지는 숨 막히는 액션, 좁은 공간과 공간 사이를 오가는 추격전을 그리는데 능한 연출력을 보이는 감독이다. ‘논스톱’은 리암 니슨 주연의 영화로 비행기 내부에서 벌어지는 폭탄 테러범과의 색출과 사투의 얘기를 그린다. ‘언더 워터’는 작은 암초에 고립된 채 식인 상어와 싸우는 한 의대생 여성의 이야기이다. 블레이크 라이블리가 나왔던 영화다. 이번 영화의 배경이 되는 공항은 코예트세라가 그려 왔던 폐쇄 공간 중 가장 큰 것에 해당한다. 그럼에도 그의 장기가 작은 공간에서의 추격전인 만큼 이번 영화에서는 수하물들이 옮겨지는 공항 뒤편 수하물 컨베이어벨트에서의 액션 장면에서 그 같은 자신의 특기를 잘 살려 내고 있다. 감각적인 액션 연출은 그 밖에도 이런저런 장면에서 돋보인다. LA 경찰인 엘레나(다니엘레 데드 와일러)가 앨콧이라는 이름의 국토 안보부 수사관이라는 남자와 110Km로 달리는 차 안에서 서로를 죽고 죽이겠다며 격렬하게 치고받는 싸움을 벌이는 장면은 살짝 혀를 내두르게 만들 만큼 잘 찍어 냈다. 앞뒤로 차가 받히고, 옆에서 들이받고, 하는 장면을 리얼 백 퍼센트의 느낌으로 찍어 냈다. 이 영화의 백미이다. 영화 ‘케리 온’의 핵심 내용은 극중 그레이스 터너라는 하원 의원이 발의한 민주주의 방어법(Defence for Threatened Democracies ACT), 곧 DTD 법안이다. 반국가 세력의 위협을 막기 위해 각종 군사시설, 무기, 방어 체계를 강화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법안인데 막대한 예산 문제로 인해 의회에서 통과가 저지돼 있다. 그러나 미국의 군산복합체, 무기 판매상들은 이 법안을 강력하게 지지하고 있는 형국이다. 영화는 이들이 법안 통과를 관철시키기 위해 테러 행위를 유발, 국가 위기 상황을 연출하려는 목적인 것처럼 보이게 한다. 그런데 정작 터너 의원이 자신의 갓난 아이와 함께 해당 비행기에 탑승한다는 점에 있다. 그렇다면 진짜 범인들은 누구일까. 혹시 터너의 반대 세력일까. 영화는 미국에서조차 반국가 세력이 진짜 존재하는가. 그건 혹시 내부의 적이거나 누군가의 과도한 망상으로 만들어진 허구의 존재가 아닌가, 특정 집단이 자신들의 정치적 경제적 이윤을 최대화하기 위해 조작해 낸 것은 아닌가의 문제를 안고 있음을 고백한다.. 할리우드의 다소 사소한, 엔터테인먼트용 액션 스릴러 영화에서조차 지금 한국의 상황이 떠올려진다. 주인공이 어떻게 이 위기를 극복해 내는지, 할리우드 영화는 이 ‘역공작의 역공작’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 반면교사를 통해 가르쳐 준다. 지금 우리의 위기와 그 해법도 어쩌면 이 영화 ‘캐리 온’에 담겨 있을 수 있다. 과연 누가 나라와 사회를 위협하고 있는 자이고 세력인가. 이번 영화에서 답을 구해 보시기를 바란다. 주인공 이선을 앞세워 비행기에 살인 가스 수하물을 실으려 했던 범인 역으로 제이슨 베이트먼이 나오는 것이 이색적이다. 제이슨 베이트먼은 인기 미드 ‘오자크’ 시리즈로 유명하지만 주로 코미디 영화에서 ‘착하고 댄디한 얼굴의 웃긴 남자’ 역으로 사랑을 받아 왔다. 윌 스미스 주연의 ‘핸 콕’에서 슈퍼우먼 샤를리즈 테론의 어진 남편 역으로 나왔었다. 이번 영화 ‘캐리 온’에서는 평소 이미지를 180도 바꿔서 나오는 셈이다. 주연인 테런 에저트만큼 비중이 높은 배우이다. 영화 ‘캐리 온’은 사실 조엘 슈마허 감독의 2003년 영화 ‘폰 부스’의 설정과 많은 부분 비슷한 감이 있다. ‘폰 부스’도 공중전화박스에 갇혀 누군가가 전화로 내리는 오더를 실행할 수밖에 없는 한 남자의 이야기이다. 그는 전화박스에서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는 상황이 된다. ‘캐리 온’의 주인공 역시 처음에는 검색 모니터와 검색대에서 발이 묶인다. 하늘 아래 새로운 영화는 없다. 과거 영화가 현재 영화를 가르쳐 준다. 과거가 현재를 살린다. 그건 영화 쪽에서도 진리이다.
개봉 전, 이미 ‘올 한 해 가장 미친 영화’라는 입소문과 마케팅 문구가 나올 만큼 화제를 모았던 ‘서브스턴스’는 의도적으로 매우 역겨운 장면들을 다수 배치한 작품이다. 기본적으로는 고어(gore 유혈이 낭자) 한 작품이다. 극 후반부에 가면 화면 자체가 피바다이다. 마치 그 옛날 브라이언 드 팔마가 만든 영화 ‘캐리’(1978)에서처럼 극중 방청객들에게 엄청난 피를 뿌려 댄다. 모두들 피범벅이 된다. 스크린 밖에서 이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들도 자신들이 마치 ‘바케쓰’로 피를 뒤집어쓰는 느낌을 받는다. 게다가 주인공은 괴물로 변하고 보기에도 끔찍한 설정의 장면들을 이어 간다. 어떤 관객들은 이런 등등의 장면들로 구토를 할 수도 있다. 따라서 영화 ‘서브스턴스’는 매우 호오가 엇갈릴 만한 작품이다. 프랑스의 신예급 감독 코랄리 파르자 감독이 만든 이 영화는 프랑스가 여전히 영화적 상상력에서 가장 많이 앞서 나가는 ‘아방가르드’함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 준다. 코랄리 파르자는 전작으로 ‘리벤지’를 만들었다. 자신을 윤간한 남자 셋을 차례로 죽이는 여성의 이야기이다. 남성 중심 사회에 대한 물리적 복수를 꿈꾸는 다분히 강성 페미니즘을 보여 준 작품이다. 이번 영화 ‘서브스턴스’도 다분히 여성적 시선을 지니고 있다. 여성 자신들이 지닌 욕망의 문제를 여성의 시선으로 그려낸다. 이야기는 외모와 젊음에 대한 과도한 집착에 대한 얘기로 시작한다. 주인공 엘리자베스 스파클(데미 무어)은 한때 정상의 자리에 올랐던(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었을 만큼) 인물이지만 이제 나이를 먹고 현업에서 밀려날 처지이다. 그녀는 모닝 쇼 피트니스 방송을 하고 있지만 방송국 책임자인 하비(데니스 퀘이드)는 그녀를 해고하고 젊은 여성을 뽑으려고 한다. 분노로 치를 떨던 어느 날 그녀는 교통사고를 당하고 병원의 남자 간호사에게서 서브스턴스에 대한 정보를 얻게 된다. 이 물질, 혹은 약을 주입하면 급격한 세포 분열을 일으켜 또 다른 몸이 분리돼 나오되 젊고 신선한 육체가 생긴다는 것이다. 엘리자베스 스파클은 젊은 여성으로 분리되고 그 여성이 대신 방송국에서 ‘수’라는 이름으로(마가렛 퀄리) 피트니스 모닝 쇼를 맡게 된다. 이 서브스턴스의 ‘발칙한’ 효과는 단서 조항, 철칙이 하나 있다. 자아는 하나이며 분리 효과는 일주일 씩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엘리자베스는 약물을 투입해 가며 일주일은 ‘수’로 살아갈 수 있지만 이 ‘수’ 역시 일주일 후에는 엘리자베스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 간격에는 예외가 없다. 분리된 육체는 서로 일주일 씩만 사용이 가능하다. 그건 마치 신데렐라가 정해진 시간에는 호박 마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마법과도 같은 것이다. ‘서브스턴스’는 여성들이 지닌 외모 강박증, 혹은 노화에 대한 공포증을 신데렐라 동화에 결합시키되 그것을 공포와 서스펜스의 분위기로 바꾼 셈이다. 또 다른 나 이자 젊은 여자인 ‘수’는 바깥세상이 만들어 주는 유혹(점점 유명해지면서 일이 많아지는 것, 예컨대 보그지 커버 촬영 같은 것, 그리고 남자와의 섹스 등등)을 견디지 못하고 점점 일주일의 시한을 지키지 않게 된다. 그 결과는 또 다른 나인 엘리자베스의 육신이 급격하게 노화된다는 것이며 점점 괴물로 변해 간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엘리자베스는 엘리자베스대로 ‘젊어진 나’에 대한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육신 변이 과정’의 ‘종료’를 선택하지 못하고 망설인다. 이 여인 둘, 결국 이 여인 한 명의 욕망은 파국을 맞는다. 작금의 프랑스 영화는 ‘트랜스 휴먼’이란 지향점을 향해 ‘냅다’ 달리는 분위기이다. 21세기 프랑스 영화인들은 이제 트랜스’젠더’ 정도는 그리 새로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트랜스 ‘휴먼’, 그러니까 사람이 기계와 결합한다든지(쥘리아 뒤쿠르노의 2021년 영화 ‘티탄’) 이번처럼 내가 또 다른 나와 결합과 분리를 반복하는 얘기를 꿈꾼다. 결과적으로 내가 아닌 또 다른 나, 자아의 복제를 꿈꾼다는 얘기이다. 영화의 상상력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를 계속해서 실험하고 있는 셈이다. 세상의 변화를 상상력의 기초에서 만들어 나가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여성들의 미(美)에 대한 비틀린 욕망에 대한 얘기라기보다는 그 이면에 깔린 광기에 대한 이야기이다. 광기가 어떻게 인간을 좀먹게 하는가를 점층법적으로 보여 준다. 그 과정을 의도적으로 매우 거칠고 역겹게 보여 준다. 광기라고 하는 것은 한번 빠지면 제어할 수 없는 것임과 동시에 그것이 생리적이거나 본능적인 것이라기보다는 꽤나 사회적인 측면이 있음을 고찰한다. 주인공 엘리자베스를 밀어내는 건, 그녀가 젊어지고 싶다는 개인적 욕망에 앞서 젊은 몸매와 미모만을 요구하는 엔터테인먼트 업계의 속물주의 때문이다. 올해 칸 영화제 각본상을 탔지만 시나리오보다 프로덕션 디자인, (특수)분장과 촬영, 연기 부문에 더 주목해야 할 작품이다. 엘리자베스의 하우스 공간, 그녀가 일하는 방송국의 복도 등등은 인간적이고 자연스러운 느낌이 전혀 없는, 매우 드라이하면서도 극히 인공적인 느낌으로 짜여 있다. 엘리자베스와 수의 몸이 분리되는 욕실은 사면이 흰 색인, 마치 산부인과 분만실의 강한 조명 아래 서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괴물로 변한 엘리자베스의 모습은 끔찍하며 극 후반 15분은 차라리 저 부분은 편집으로 드러냈으면 어땠을까 할 만큼 처참하고 폭력적이다. 데미 무어는 할리우드 여배우 중 가장 많은 외과 성형수술을 받은 것으로 유명하다. 이 영화는 어쩌면 데미 무어 자신의 얘기일 수 있다. 그럼에도 그녀는 과감하게 이 작품을 선택했으며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지는 투혼의 연기를 펼쳤다. 여우주연상 감이다. 젊은 엘리자베스, 수를 연기한 마거릿 퀄리는 앤디 맥도웰의 딸이다. 데미 무어, 마거릿 퀄리 모두 올 누드의 파격적인 연기로 시선을 사로잡는다. 영화 ‘서브스턴스’는 올 한 해 최고 걸작의 영화는 아니지만 올 한 해 최고의 도발적인 영화이다. 그건 맞는 얘기이다.
제목의 느낌이 심상치 않은 영화 ‘미망’의 단어 미망은 한자어를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뜻이 다 달라지는 개념이다. 미망(迷妄)은 사리에 ‘어두워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매다’는 뜻이고 미망(未妄)은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다’는 의미이다. 미망(彌望)은 잘 안 쓰는 말이긴 한데 '멀리 넓게 본다'는 뜻이다. 영화 ‘미망’은 이 세 가지 뜻을 각각의 한 단락으로 구성해 이야기를 꾸몄으며 맨 마지막 단어는 장기하의 엔딩 타이틀곡 ‘그때 그 노래’가 나오는 부분에도 반복해 쓰이면서. 단어 미망(彌望)이야말로 이 영화의 제목이자 추구하는 내용과 방향임을 강조한다. 그러니까 영화 ‘미망’의 서사는 첫 번째가 ‘迷妄’이고 그다음이 ‘未妄’인데 이 앞 두 얘기는 다소 인트로(introduction) 성격이 강해서인지 그만큼 다소 습작의 느낌, 아마추어 느낌이 난다. 하지만 사실은 의도한 것으로 보인다. 진짜 에피소드는 3부에 해당하고(러닝타임 90분에서 45분이 할애된다.) 영화 제목에 해당하는 ‘彌望’이며 이 옴니버스 형 영화를 만든 감독 김태양의 본심이 담겨 있는 부분이다. 시간은 12시에서 다시 12시로 늘 쳇바퀴 돌 듯이 같은 위치로 돌아오는 것 같지만 그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같은 점이라도 위의 원을 조금씩 크게 그리면 같은 꼭짓점이더라도 매번 달라질 수 있다는 얘기를 하고 있는 내용이다. 이건 1부 ‘迷妄’에서 주인공 남자(하성국)가 여자(이명하)에게 버스를 타고 가면서 하는 얘기인데 1부의 그 어리숙한 대사를 3부에서 같은 인물들의 변한 모습들을 통해 실제로 구현해 내고 있다. 그 ‘점층의 서술’이 돋보인다. 반면에 그 얘기는 또 반대로 늘 같은 자리에 있는 것도 있어야 사람들이 돌아올 수 있다는 ‘변증론’에 대해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변하는 것과 변화하지 않는 것, 그 두 측면, 인생의 변수와 상수를 늘 ‘멀리 넓게 봐야 한다’라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이 바로 한자어 미망(彌望)을 타이틀로 내세우고 있는 영화 ‘미망’이다. 영원한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지만 때론 변하지 않는 것이 있을 때 사람들은 서로의 끈을 놓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부분은 상당히 리얼한 느낌으로 다가서는데 3부에 걸쳐 만나고 헤어졌다가 남이 돼서 다시 만나는 두 남녀의 얘기는 안 그런 척 우리가 늘 주변에서, 스스로들이 겪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뻔한 방식으로 처음에 만나서, 서로를 탐색하고, 그렇게 다 알고 나면 시들해지고 그러다 싸우지도 않은 채 실망해서 헤어지고, 또 그러다가 일정한 시간이 지나 우연히 만나게 되면 서로에게 좋은 점들을 기억하고 대화하는 관계를 회복하는 식이다. 다들 ‘12시에서 12시로 돌아온 사이들’이지만 그래도 ‘멀리 넓게 바라보는’ 관계로 성숙해진 것이다. 주인공들이 주로 가는 곳은 서울 종로 1가와 종로 3가 그리고 광화문이다. 1,2부에서 종로 3가에 있는 서울극장은 여자 주인공이 영화 모더레이터를 하는 곳으로 나온다. 이 실재했던 극장이 지금은 폐관되고 철거된 것처럼 영화도 3부에서는 그 점에 대해 얘기한다. 주인공들과 이 주인공들이 나오는 영화의 배우와 감독들은 영화 속 시간과 실제의 시간을 똑같이 경험하고 있으며 그래서 영화 안팎 모두 다른 시간 대의 다른 사람들이 됐지만 한편으로는 여전히 같은 공간, 같은 사람들과 있음을 드러낸다. ‘12시에서 다른 12시로 돌아 오고’ ‘늘 같은 장소에 있는 것도 있는’ 존재들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극중 인물들이 반복해서 하는 얘기는 이순신 장군 동상이 칼을 쥐고 있는 손이 왼손이 아니라 오른손이라는 것이다. 그건 장군이 실제로 왼손잡이였음을 보여 주는 것이고 당시의 시대상으로는 왼손을 쓰는 걸 금기시했기 때문에 문헌에 기록되지 않은 것이라는 점을 반복해서 얘기한다. 남자는 1부에서 우연히 만난 또 다른 여자(정수지)에게도 이순신 동상 얘기를 하며 여자는 2부에서 새롭게 만나게 될 것 같은 팀장이라는 남자(박봉준)와 이순신 장군 얘기를 주고받는다. 이 의도된 반복은 ‘12시가 같은 12시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 주려는 것 때문으로 보인다. 전체의 서사는 비교적 단순하고 일목요연해 보인다. 이것을 시간대가 달라지면서 끊어진 이야기처럼 보이게 하지만 사실은 연결돼 있다. 연상연하 커플로 보이는 남자와 여자(1부에서 남자는 시종일관 존대어를 쓰며, 3부에서도 여자는 선배 혹은 누나 대우를 받는다.)는 2부에서는 이미 헤어진 것으로 보이고 여자는 아이가 있는 미혼남과 막 연애를 시작하려는 참이어서 다소 불안해한다. 3부에서 주인공 남자와 여자는 택시 기사인 후배(백승진)와 주인공 여자의 친구이자 주인공 남자의 선배의 삼우제(삼오제라고도 함. 발인 후 3일에 제사를 지내는 것)를 위해 한 사찰에 모인다. 여자는 2부의 애 딸린 팀장이라는 남자와 결혼을 심각하게 고민할 만큼 깊이 사귀고 있으며 남자는 견습 화가가 돼서 그룹전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나온다. 주인공 여자와 남자는 1부에서 그랬던 것처럼 서울 광화문으로 와서 광화문 김치찌개 집이 있는 뒷골목 카페 소우(실제로 있는 식당과 카페이다.)에서 얘기를 나누다 헤어진다. 이 모든 것(같은 공간을 다니는 반복 행위)은 어쩌면 저예산 공법을 숨기기 위한 필요 전략인 듯이 보이기도 하지만 촬영과 조명에 신경을 많이 쓴 흔적을 보면 그게 꼭 돈=제작비의 문제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곧 감독 김태양의 의도였으며 공간의 반복과 중복이야말로 이 영화의 주된 미학임을 보여 준다. 주인공들은 같은 카페를 배경으로 프레임 우측에서 좌측으로 걸어 사라지다가 또 그다음엔 좌측에서 나와 우측으로 나간다. 같은 골목에 들어와서 담배를 피우며 그게 왜 꼭 같은 골목인지는 설명하지는 않더라도 문득 그것이 당연하게 느껴지게끔 연출하고 있다. 결국 둘 모두 그곳을 잊지 못하는 것이며 거기서 무언가를 기억하고 과거의 관계를 떠올리지만 그게 꼭 처연하거나 가슴이 시리거나 할 것까지는 아니다. 버스 안, 작은 카페 안은 자연조명이 아니라 매우 정교한 인공조명을 사용하는데 그 채색의 콘트라스트가 이 영화의 제작이 결코 만만한 세공력으로 진행된 것이 아님을 보여 준다. 세련되고 깔끔하며, 도시적이면서도 젊고 쿨(cool) 한 정서를 지니고 있음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영화 ‘미망’은 마치 홍상수가 일상의 언어를 통해 통찰의 인생관을 피력하려 한 것 같은 느낌을 주지만 등장인물들의 비루하고 위선적인 모습을 통해 사람을 공박하려는 느낌 같은 것을 주지는 않는다. 홍상수의 영화는 종종 사람을 비참한 진실에 마주하게 만든다. ‘미망’은 그러한 작품이 아니다. 세대가 바뀌었고, 세대의 언어가 바뀌었음을 확연하게 보여 준다. 젊은 세대의 감각은 공격적이라기 보다 수세적이며 나서고 떠들기보다는 관망하면서 스스로의 언어를 내면화하는 쪽이다. 영화 ‘미망’이 사람들의 반응을 얻고 있는 것은 바로 그 ‘조용한 통찰’이 주는 울림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람들은 잊으려 해도 잊지를 못해(未妄)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맨다(迷妄). 삶과 세상, 관계를 멀리 넓게 바라보느냐(彌望) 여부는 결국 자신 스스로에게 달려있는 문제일 수 있다. 당신은 지금 어디쯤에 와 있는가. 영화 ‘미망’은 그것을 넌지시 묻고 있는 작품이다. 또 한편의 수작이 발견됐다. 한국 영화의 상업영화는 죽었다. 오직 독립영화만이 새로운 언어, 새로운 미학을 보여 주고 있다. ‘미망’이 그런 작품이다
미국 캐나다 산 영화 ‘롱 레그스’는 요령부득의 영화이다. 이 영화가 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된 이야기인가를 잠깐이나마 짐작할 수 있게 되는 데는 영화가 시작된 지 57분이나 지나서이다. 주인공 리 하커(마이카 먼로)의 상관인 카터(블레어 언더우드)가 요약을 해 준다. 둘은 FBI 요원이고 리 하커는 신참이다. 마치 과거 조너던 드미 감독이 만든 ‘양들의 침묵’(1991)에서 팀장인 잭 크로포드(스콧 글렌)와 클라리스 스탈링(조디 포스터)의 관계와 같다. ‘양들의 침묵’에서 둘은 버펄로 빌이라는 연쇄 살인범의 뒤를 쫓는다. 이번 영화 ‘롱 레그스’에서 리 하커는 카터와 함께 가족들만 골라 연쇄적으로 죽이고 다니는 일명 롱 레그스라는 이름의 살인범을 추적한다. ‘롱 레그스’는 기본적으로 ‘양들의 침묵’의 저예산 버전이고 여성 수사관의 캐릭터를 상당 부분 가져오되, 다소 비틀어서 가져온 작품이다. 그만큼 서로 같은 척, 사실은 상당 부분 다른 모습과 느낌을 지니고 있는 작품이다. ‘롱 레그스’는 그런 의미에서 ‘양들의 침묵’보다는 아리 에스터 감독의 영화 ‘유전’(2018)을 더 닮아 있다. 일종의 사탄 숭배(에 빠진 사람들에 대한) 영화, 사탄(학) 영화이다. 이런 영화에는 수많은 상징이 나오고 익숙하지 않은 계시록의 성경 구절이 나오기 마련이며, 색깔과 소리로 오컬트(심령)의 느낌을 만들어 내곤 하는데 이게 사실상 상당히 서구적이고 기독교적이어서 작품을 내재적(內在的)으로 파악하기가 쉽지가 않다. 그들의 시선으로 영화를 이해하기가 어렵다는 이야기이다. 그건 마치 우리의 무당 굿, 빙의(憑依)에 대한 이야기, 풍수지리, 사주 역술의 갖가지 문양 등등을 뒤섞어 놓으면 서구 기독교인들이 단박에 이해하기 어려운 것과 같은 이치이다. 아무튼 팀장 카터는 신참인 리 하퍼가 사건의 미스터리를 척척 풀어 오는 걸 약간은 미심쩍어 하면서도 이렇게 정리한다. “자, 자, 그러니까 1974년 1월 13일에 일가족을 죽인 롱 레그스란 인간이 20년 만에 우리 앞에 다시 나타나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살인극을 벌이고 있다는 얘기이지? 그런 거라는 거지?” 영화는 오컬트의 환상과 미스터리, 실제 벌어졌음직한 살인극의 이야기를 오버랩 시키면서 보는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영화 속에 롱 레그스는 실재하는 인물로 나온다. 이 역할은 놀랍게도 니콜라스 케이지가 맡았으며 그는 요즘 비교적 개성이 강한 작은 영화에 출연하며 자신의 연기 투혼을 다시 불사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2022년작 ‘피그’는 발군의 작품이었다. 케이지는 이후 24년까지 2년간 ‘올드웨이 : 분노의 추적자’ ‘렌필드’ 등 무려 10편의 독립영화에 출연했다. 니콜라스 케이지의 연기 행보를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이번 영화에서 케이지는 얼굴과 헤어스타일을 완전히 바꾸어서인지 전혀 그같이 보이지 않는다. 그는 실제 사탄이 있다면 저런 스타일, 마치 하드 록커의 흉내를 내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의 모습으로 나온다. 영화는 오프닝과 클로징 앞뒤로 록밴드 T-rex의 ‘집스터(Jeepster)’와 ‘겟 잇 온(Get it on)’을 사운드트랙 음악으로 사용한다. 일부의 사람에게 로큰롤은 악마의 음악으로 들렸다. 살인범 롱 레그스가 극 중에서 출현하는 방법은 마치 토마스 알프레드손의 뛰어난 드라큘라 영화 ‘렛 미 인’(2015)을 닮아 있다. 악마는 누군가 초대하지 않으면, 곧 자신의 안으로 받아들여 주지 않으면 상대에게 들어갈 수가 없다. 사탄에게는 늘 조력자가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드라큘라든 악마든 연쇄살인자든 그 불행과 비극은 우리 자신들이 초래한 것이라는 얘기다. 모든 문제의 근원은 내 안에 있거나 우리 사회 안에 있다는 것이다. 사탄론의 정치사회학이다. 첫 살인극이 벌어진 1975년과 다시 연쇄 살인이 일어나기 시작하는 1995년은 미국으로선 특기할 만한 시대이다. 70년대는 베트남의 공산화와 닉슨의 하야, 강경 보수주의자 레이건의 등장을 앞두고 큰 혼란을 겪었으며 1995년은 빌 클린튼이 등장하며 새로운 시대를 열 것처럼 보였지만 미국식 신자유주의(자본주의의 극단적 양극화)는 더욱 가속화됐던 시기였다. 미국이란 나라와 공간은 이제 더 이상 회복될 수 없을 만큼 고립되는 것처럼 느껴졌는데 그 분위기가 영화 ‘롱 레그스’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영화에서 FBI 팀은 의도적으로 단출해 보인다. 팀이나 기동타격대 같은 건 꿈조차 꿀 수 없을 정도로 보이지 않고 요원들은 거의 혼자서 탐문과 수사를 하며 다닌다. 리 하커는 철저히 혼자이며 그녀가 다니는 곳도 거의 집 한 채만 있는 농장의 외딴곳이거나 버려진 곳이다. 리 하커의 엄마 루스(알리시아 위트)도 혼자 살아가는 기독교 광신도이다. 엄마 루스는 오랜만에 자신을 찾아온 딸 리 하커에게 “너 요즘 기도 는 하니?”라고 묻고 딸이 “한 번도 한 적이 없다”고 하자 한참을 낄낄댄다. 그리고 “기도로 되는 건 하나도 없어”라고 말한다. 엄마 루스는 리 하커가 좇는 사건에서 매우 중요한 키를 쥐고 있음이 나중에 드러난다. 1975년에서 1995년까지의 미국이나, 이후 지금까지 이어져 온 미국이나 문제가 되는 건 정치나 사회만이 아니라 그 이면에 있는 종교에도 큰 이슈가 자리하고 있음을 영화 ‘롱 레그스’는 느끼게 해준다. 광신도들이 암약했고 사회 한구석에 버젓이 자리해 왔음을 보여 준다. 이들로부터 툭하면 튀어나오는 성경 구절과 그에 대한 강박이 사회를 이상하게 몰아 간 측면이 있다. 사회의 이상성과 종교의 강박증이 만나면 인간의 정신은 마비되고 왜곡된다. 살인극이 벌어질 가능성이 높다. 클린튼 정부 때 텍사스 주 웨이코에 있던 다윗파가 FBI에게 체포, 충돌하는 과정에서 집단으로 자살하는 사건이 벌어진 사건이 대표적이다. 시대의 어둠은 마치 사탄이 인간의 영혼을 지배하듯 퍼지는 법이다. 고립무원의 공간에서 ‘롱 레그스’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악마에게 지배당한다. 사탄은 (내부의) 동조자가 없으며 사람을 해치지 못하기 때문에 사탄은 인간의 손을 빌려 인간을 해하고 죽인다. 결국 사탄이 되는 건 인간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사탄화되는 걸 막을 수 있는 것도 결국 인간인 셈이다. 오컬트 영화가 줄곧 만들어지고 있고 일부에서 나마 마니아 계층들에 의해 비교적 마니악(maniac)하게 향유되고 있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만큼 세상사가 이상하게 변형돼 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하긴, 히스패닉 가톨릭 신자 남성들이 민주당의 낙태권 주장에 반기를 들어 자신들 같은 이민자들이나 유색인 하층 노동자를 탄압하는 트럼프에게 오히려 많이들 표를 찍었다는 그 종교적 특이성을 설명할 길이 없다. 그것 또한 사탄에 동조하는 현상일 수 있다. ‘롱 레그스’는 그런 정치적 은유를 담고 있는 영화일 수 있다. 이 영화를 감독한 오스굿 퍼킨스는 그 옛날 안소니 퍼킨스의 아들이다. 영화 ‘사이코’에서 식칼 살인마로 나왔던 배우이다.
구룡성채의 원래 이름은 구룡채성이다. 九龍寨城. 채는 울타리 채 자이다. 구룡에 있는 울타리로 쌓은 성이란 뜻이다. 현대에 이르러 좀 더 알기 쉽게 구룡성채, 九龍城砦로 바뀌었다. 구룡반도에 있는 일명 마굴(魔窟), 최악의 슬럼가였다. 1993년에 철거돼 지금은 공원으로 돼있다. 국가의 법, 사회의 공권력이 통하지 않는 그야말로 치외법권 지역이었으며 갱단 조직인 삼합회가 운영했던 곳이다. 그 얘기를 다룬 것이 바로 ‘구룡성채 : 무법지대’이다. 영화는, 겉으로 보기엔 삼합회와 또 다른 특정 세력인 범죄 조직과 그 우두머리들의 치열한 권력 다툼을 그린 내용처럼 꾸며져 있다. 실제로 홍콩 영화 특유의 과도한 권법 액션과 잔혹한 폭력의 장면으로 점철돼 있다. 영화 마케팅도 과거 1980년대 홍콩 누아르를 추억하거나 여전히 추앙하는 사람들을 위한 영화라는 식으로 짜여 있다. 영화의 겉만 보면 좀 그런 측면이 있다. 그러나 속 내용이 겉보다는 좀 더 깊다. 어마어마한 의미까지는 아니어도 홍콩인들이 지금의 홍콩, 더 나아가 중국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아니면 그 반대로 지금의 중국 시진핑 정부가 홍콩 문제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들여다 볼 수 있게 해 준다. 홍콩 사태, 곧 홍콩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서 처참하게 탄압된 지 만 5년이 지난 시점이다. 영화는 늘, 사회와 역사의 문제에 있어 자유롭지 못하다. 구룡성채가 지독한 슬럼이 된 데에는 역사적인 배경이 있다. 청 말기인 1898년 영국이 아편전쟁 이후 홍콩을 무력으로 점령할 때 청의 허울뿐인 방어선의 하나가 이곳 구룡성채였다. 이후 이 지역은 중국이 공산화된 이후 그곳을 탈출한 본토 난민들이 불법적으로 체류하며 자신들만의 국가 아닌 국가를 구축한 곳이다. 당연히 홍콩 원주민들과의 갈등이 벌어질 수밖에 없는 곳이었으며 이후에도 각종 난민들의 본거지가 됐고 그 와중에 범죄조직인 삼합회가 독자적으로 관할 운영하게 된 곳이다. 영화 ‘구룡성채 : 무법지대’는 이 지역의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싸움을 벌였던 전설의 고수 3인의 얘기부터 시작된다. 극중 관계는 다소 복잡해서 오프닝 시퀀스의 자막 설명을 잘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과거의 주요 인물은 사이클론(고천락)과 레이, 찬 짐(곽부성)이다. 찬 짐은 레이 갱의 최고 살인 병기이다. 셋은 형제 관계를 맺을 만큼 가까운 사이였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사이클론은 다른 조직 ‘추’에 붙었고 곧 벌어진 피 터지는 싸움에서 사이클론은 추와 타이거라는 또 다른 일파와 손을 잡고 레이 파를 제거한 후 구룡성채를 접수한다. 이 과정에서 사이클론과 찬 짐은 (전설에 따르면) 7일의 낮과 밤을 싸운다. 그 전장(戰場)의 흔적은 현재까지 구룡성채의 성지로 남아 있다. 사이클론은 이후 추 밑에서 성채 치안위원장으로 사실상 구룡성채를 지배한다. 바깥에는 또 다른 삼합회 조직인 미스터 빅(홍금보)이 호시탐탐 구룡성채의 지배권을 노리는 중이다. 문제는 그다음 세대에서 다시 재현된다. 추는 자신의 일가족을 무참하게 살해한 찬 짐에 대한 복수심을 버리지 않고 있으며 자신 역시 찬 짐 일가의 대를 끊겠다고 결심해 왔다. 그런데 찬 짐의 아들이 살아 있다는 첩보를 입수한다. 그가 바로 찬 록 쿤(임봉)이다. 그는 어찌 된 일인지 베트남 난민이 돼 구룡성채로 들어온 인물이다. 찬 록 쿤이 찬 짐의 아들인지 처음엔 몰랐던 사이클론은 그의 보호자가 되고 자신의 심복인 신이(유준겸)를 붙여주기까지 한다. 찬 록 쿤과 신이, 사이클론의 또 다른 후계자 급인 AV(장문걸)와 타이거 조직의 1인자 십이소(호자동), 그렇게 4인은 형제 관계의 연을 맺기 시작한다. 갈등의 시작은 조직의 우두머리 급인 추 조직과 동조자 타이거 파 보스가 찬 록 쿤의 살해를 명령하고 이를 사이클론이 거부하면서 시작된다. 사이클론의 실력을 감당할 수 없었던 추는 바깥의 삼합회 조직 미스터 빅을 끌어들인다. 미스터 빅 수하에는 킹이라는 살인귀가 있다. 구룡성채는 곧 피바다가 되기 시작한다. 추 조직과 오랜 동지 관계를 맺어 왔던 사이클론은 찬 록 쿤을 죽이라는 지시를 거부하면서 이런 얘기를 한다. “우리 세대의 문제를 애들한테 떠넘기지 말자.” 사이클론은 과거 찬 록 쿤의 아버지 찬 짐을 죽이면서 그에게 아들을 살려주고, 돌봐 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사이클론이 레이를 배신한 것은 레이 때문이었지 찬 짐 때문은 아니었으며 그는 자신이 찬 짐을 죽이게 된 일을 이후 내내 뼈아프게 후회하며 사는 것처럼 행동한다. 우리 세대의 일은 우리 세대에서 끝내자는 말은 홍콩의 지난 역사를 생각할 때 묘한 여운을 남긴다. 사이클론은 찬 록 쿤이 찬 짐의 아들인 것을 알게 된 후 그에게 구룡성채를 떠나 멀리 도망가라고 말한다. 그러나 찬 록 쿤은 사이클론에게 돌아오려 한다. 그는 말한다. “이곳에서 살고 싶어요. 이곳에서 살다가 죽고 싶어요.” 찬 록 쿤의 이 대사 역시 기묘한 기시감 같은 것을 느끼게 한다. 중국 정부는 어쩌면 홍콩과의 오랜, 굴곡진 역사에도 불구하고 ‘우리 세대의 일은 우리에서 끝내고’ 새로운 세대, 새로운 시대를 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홍콩에서 낳고 자란 홍콩인들이 홍콩에서 살고 홍콩에서 죽기를 바랄 만큼 홍콩에 대한 애정이 높고 그것을 잘 알지만(사이클론), 강고한 국가주의 원칙에 따라 소개와 이주가 이루어져야 한다(추)고도 생각한다. 중국 정부는 그 가운데에서 과연 현명한 방법은 무엇인가를 놓고 고민에 빠져 있음을 보여 준다. 영화 ‘구룡성채 : 무법지대’는 중국이 홍콩(인)의 문제를 바라보는 일단의 시각을 반영하는 작품이다. 무엇보다 중국 정부는 홍콩 반환 전의 홍콩을 구룡성채=슬럼=치외법권지대의 아수라 구렁텅이였을 뿐이라고 강조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구룡성채 같은 이미지의 홍콩이 1997년 중국 반환 이후 말끔하게 정상화됐다는 것이다. 아마 그 점 역시 강고한 전체주의적 입장의 현 중국정부가 이 같은 누아르 영화의 부활을 용인한 이유일 수 있다. 구룡성채를 과거의 이미지 그대로 복원해 구현한 미니어처, CG, 세트의 공학이 놀라운 작품이다. 중국 영화의 기술력이 일취월장을 넘어서서 위협적인 수준이 됐음을 보여 준다. 극중 인물들이 구사하는 홍콩 무술 액션의 호쾌함, 그 속도감과 정밀함의 미학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정도이다. 오랜만에 만나는 홍콩 액션의 영화지만 한편으로는 홍콩의 씁쓸한 미래를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픈 작품이기도 하다. 홍콩은 홍콩인에게. 이제 그런 말은 결코 들을 수 없는 메아리가 될 것이다.
중학교 졸업식을 얼마 남겨 두지 않은 타쿠미 아사(하야세 이코이)는 교통사고로 사망한 부모의 장례식장에서 ‘버려진 대야 같은 신세가 됐다’는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듣는다. 성격이 다소 거칠고 직설적인 이모 코다이 마키오(아라가키 유이)는 아이에게 화난 목소리로 대야는 한자로 관(盥)이라고 쓴다며 관은 절구 구(臼)에 물 수(水), 접시 명(皿) 변을 쓰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제 자기 집에서 지내라고 명령하듯 말한다. 마키오는 죽은 언니 미노리(나카무라 유코)와 의절한 채 살아왔다. 그녀는 청소년 소설 작가인 듯이 보이고 작품이 웹툰 등으로 만들어지는 등 성공한 작가여서인지 자립해 살아가고 있다. 자립해서 독자적으로 산다는 건 독립적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바깥 세계는 차단한 채 자기만의 세계에서 살아간다는 것을 말하기도 한다. 스스로 선택한 이기적인 고독일 수 있다. 당연히 이모 마키오와 조카 아사의 동거는 처음부터 심상치 않아 보인다.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세타 나츠키 감독의 ‘위국일기’는 야마시타 토모코의 순정만화 원작을 영화로 옮긴 것이다. 왜 일본의 이야기 문화가 단행본 만화나 웹툰이 기반이 됐는지 이해할 수가 없으나 많은 영화와 드라마가 만화를 원작으로 하고 있는 것은 이제 일본 사회의 특징 같은 것이 돼버린 지 오래이다. 일본의 단행본 만화책 시장은 어마어마한 규모이다. 1년에 7천억엔, 7조 규모다. 우리의 영화 시장 사이즈는 2조가 채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인구 대비 작은 시장은 아니라는 평가이다. 따라서 일본과 한국이 영상의 기반을 어디에 두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어쨌든 ‘위국일기’라는 영화의 제작은 그렇게 개별적인 세계(만화책은 혼자서 보는 것이니까)를 탐닉하는 일본인 특유의 전통에서 탄생한 서사(敍事)때문에 가능해진 것이다. 생각해 보면 일본에서 위국(違國)이란 말은 국가가 망가졌다는 의미이다. 작게는 가정이 무너졌고 더 작게는 개인의 관계가 무너졌다는 것이다. 현대 일본에서 위국(衛國)을 위해서는 어긋난 국가, 곧 위국(違國)을 버려야 하거나 고쳐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진정한 위국(衛國)을 위해 개인의 관계는 어떻게 이어 가야 한다는 것인가. 그 익숙하지 않은 애매하고 모순돼 보이는 상황에 여전히 많은 일본인들은 불편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무슨 이유에서인가 자신의 언니와 완전히 틀어진 채 불화의 삶을 살아온 주인공 마키오는 조카 아사를 두고 어쩔 줄 몰라 한다. 그런 마키오 이모가 조카 아사는 짜증이 난다. 자신을 짜증 내 하는 아사를 두고 마키오는 성가셔 한다. 성가시고 짜증 나는 두 명의 관계는 대체로 좁혀질 수가 없다. 영화 ‘위국일기’는 이모와 조카의 동반 성장기를 그린다. 마키오는 충동적 육아를 통해 조금씩, 평생을 멀리해 왔던 언니의 마음에 접근하기 시작한다. 아사는 이모와의 삶, 타인과의 비자발적이면서도 강제된 일상을 통해 부모의 죽음, 그 상실의 상처를 조금씩 극복해 나간다. 두 사람 모두 개인의 관계를 통해 전체와의 관계를 받아들이거나 회복해 간다.(마키오는 극 후반에 자신과 자신의 언니를 구별해 키워야 했던 어머니에게 악수를 청한다.) 세상에는 늘 대체 불가능한 존재가 있기 마련이지만 인생의 불행은 그 대체 불가능한 존재들이 누군가에 의해, 혹은 무엇인가로 대체돼야 한다는 점에 있다. 대체 불가능하지만 뭔가로 대체해야 할 때야말로 인생의 전환점이다. 가족은 주어지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이 의지를 가지고 만들고 형성해야 하는 관계이다. 사랑 역시 저절로 할 수 있는 무엇이 아니라 끊임없이 배우고, 훈련하며, 서로가 서로에 대해 공부하고 양보하고 용서하는 과정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마키오는 아사를 통해 아사는 또 마키오를 통해 사랑과 배려를 배우고 서로를 이해하고 좋아하게 되며 그렇게 서서히 가족이 되어 간다. 위국은 결국 위인(違人)이어야 하며 개인을 구하지 못하는 사회는 국가를 구할 수 없으며 가족을 위해 싸우는 자들만이 국가를 위해 투쟁할 수 있다. 영화 ‘위국일기’라는 순정만화의 스토리가 궁극으로 전하고 싶은 이야기일 것이다. 모두 11권까지 출간된 것으로 알려진 순정만화를 2시간 안쪽의 영화로 옮기는 과정에서 이야기는 역설적이게도 다소 지루한 맛을 띠게 됐다. 원작의 캐릭터가 지닌 에피소드를 모두 다 제대로 살리기 어려웠을 것이며 그 압축의 미학을 표현해 내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고민이었겠으나 연출 역량이 거기에까지는 따라가지 못한 듯이 보인다. 이럴 때는 두 가지이다. 원작을 그대로 살려 11부작 드라마로 만들든지 과감하게 캐릭터를 걷어 내든 아니면 합쳐 내든 해서 이야기를 두세 명의 캐릭터로 집중시키든지 해야 했을 것이다. 영화 ‘위국일기’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엉거주춤 중간 지대에서 눈치를 보는 식이다. 일본 영화가 갖는 총체적인 문제, 곧 스토리를 어떻게 빌드 업하고 어떻게 구축해야 하는지에 대해 아직도 자기만의 매뉴얼을 완성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바로 그러한 점이 더 좋다는 사람들도 있고 그래서 일본 영화는 밋밋하다고 평가 절하하는 사람들도 생긴다. 일본 화의 대체적 평가의 분기점은 이런 데에서 나온다. 영화 ‘위국일기’는 패전 70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국가적 유 청소년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듯이 보이는, 그래서 청소년기의 방황기를 겪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일본 사회의 순정만화 같은 영화이다. 그래도 이 작품을 비교적 올바르게 보기 위해서는 국내에도 번역돼 있는 11권의 『위국일기』를 먼저 읽는 것도 좋겠다. 아마도 이 영화의 국내 수입은, 청소년들이나 젊은 관객들에게 퍼져 있는 만화 원작의 인기를 고려한 탓일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만화의 인기가 영화의 흥행으로까지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상하게도 만화를 좋아하는 팬층은 영화가 원작의 풍부함을 잘 살려 내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이다. 주인공 마키오와 죽은 언니 미노리의 성격 차이는 확연하다. 미노리는 늘 깔끔하고 정돈을 잘하고 사는 스타일이다. 요리와 살림을 잘하고 딸을 키우는데 정성을 다했다. 동생인 마키오는 도무지 정리 정돈이란 걸 할 줄 모르고 사는, 오로지 나 살기에 바쁜(소설쓰기에만도 정신이 없는) 사람이다. 당연히 요리는 전혀 하지 못한다. 조카 아사에게 맛있는 것을 해주려면 유일한 단짝 친구인 다이고 나나(카호)를 초대해야 할 정도이다. 위국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쩌면 개인부터 구해야 한다. 개인을 구할 줄 알아야 나라와 사회를 구한다. 사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어느 것이 먼저인지는 중요하지가 않다. 그럼에도 개인의 가치가 국가나 전체의 가치보다 뒤처지는 사회는 열린 사회라고 할 수가 없다. 우리가 극 중에서 부모가 죽은 아이 아사처럼 새로운 세대를 위해 해야 할 일은, 국가주의와 전체주의, 파시즘의 재 부활을 막는 것이다. 원작이든 영화든 아사의 부모를 ‘죽인 후’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는 점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일본이든, 일본과 준하는 사회이든, 부모(국가)가 죽어야 새로운 세대(미래의 나라)가 산다. 일종의 살부살모(殺父殺母)의 의식, 이데올로기이다. 영화 ‘위국일기’가 단순한 순정만화로만 보이지 않는 이유이다.
영국 유명 작가 닉 혼비의 소설 『벌거벗은 줄리엣』을 영화로 만든 작품으로 2018년 작품이지만 뒤늦게 국내 개봉된 ‘줄리엣, 네이키드’는 여러 층위를 깔고 있는 작품이다. 언뜻 보면 음악영화 같지만 기본적으로는 로맨스 물이고 조금 더 생각해서 들여다보면 인생에 대한 성찰을 그린 작품이다. 기대하지 않고 골랐다가 의외의 케이크 선물을 받은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맨 위에는 초콜릿이 얹혀 있고 그 밑에는 달콤한 크림이, 그 안에는 푹신한 느낌의 빵이 들어 있는 것과 같다. 많이 먹으면 느끼하지만 적당히 한두 조각을 먹으면 뇌를 활성화시키고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이런 유의 영화, 곧 멜로 영화가 지닌 순기능적 특성이다. 사람들은 종종 이런 로맨스 작품을 봐야 한다. 아니 사실은 스스로 보려고들 한다. 그것이 아무리 판타지에 불과하고, 궁극의 거짓말인데다, 결국 헤어짐으로 끝나는 이야기라 하더라도, 사람들은 러브 스토리에 열광한다. 사랑은 사람과 세상을 이롭게 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줄리엣, 네이키드’의 기본 로그 라인은 “1993년에 미니애폴리스의 한 클럽에서 공연 도중 갑자기 사라진 미국의 전설적인 록 가수 터커 크로우(에단 호크)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근데 그건 이 영화의 일부의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이야기의 시작은 영국 샌드클리프에 사는 한 대학교수 던컨(크리스 오다우드)이라는 남자가 포문을 연다. 이 남자, 터커 크로우의 광 팬이다. 15년 동안 그를 추적 중이다. 인터넷 동호회도 만들었다. 최초 음반부터 이런저런 글과 신문 자료까지 그에 대한 모든 것을 수집하고, 회원들과 그것을 공유하며, 늘 터커를 놓고 흥분의 일상을 살아간다. 그에겐 터커의 유령을 쫓아다닌 15년 만큼 같이 동거해 온 연인 애니(로브 번)가 있다. 애니는 샌드클리프의 시(市)박물관의 학예사이다. 고인이 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오래된 유물, 몇 안 되는 유적(상어 눈 같은 것)과 자료를 뒤적이며 산다. 그녀는 곧 1964년을 모티프로 한 전시를 계획 중이다. 1964년에 영국 샌드클리프에서는 롤링스톤즈 공연이 있었던 모양이다. 샌드클리프는 한때는 북적였지만 지금은 쇠락한 해변 마을이다. 런던의 남쪽, 영국 해협과 그리 멀지 않고 대서양과 북해의 바다를 볼 수 있는 지형의 도시로 보이지만 실재하는 곳인 지가 다소 불분명할 만큼 잊힌 해변도시이다. (실제 촬영은 동부 켄트주의 타넷이란 섬의 소도시 브노드스테어스에서 진행됐다.) 어쨌거나 이런 작은 도시에서의 대학교수라고 하는 던컨이나, 이런 곳에서 박물관 큐레이터로 살아가는 애니의 삶이란 그냥 별 볼일 없이, 평범하고 서민적이며, 보통의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의미를 부여한다. 둘은 결국 터커 크로우에 대한 던컨의 집착 때문에 싸우고 갈라선다. 그 와중에 던컨은 대학의 동료 교수와 바람이 나고 애니는 우연찮게 진짜 터커 크로우와 문자와 메시지를 주고받는 관계가 된다. 애니도 사실 바람이 난 셈이다. 그렇고 그런 얘기 같지만 실상 닉 혼비의 이 소설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시스토 로드리게스라는 걸출한 싱어 송 라이터의 존재감을 픽션화 한 느낌을 준다. 로드리게스는 미국 디트로이트의 노동자 가수로, 터커처럼 아주 오래전, 곧 70년대에 한 장의 명반을 발표한 후 홀연히 사라졌고 거의 40년이 지난 후 한 열성 팬인 말릭 벤젠룰에 의해 재발굴, 발견되어 다시 일약 스타덤에 오른 인물이다. 그 얘기가 바로 말릭 벤젤룰이 만든 음악 다큐영화 ‘서칭 포 슈가맨’(2012)이다. ‘슈가맨’은 시스토 로드리게스가 마지막 공연에서 부르고 사라지기 전 부른 노래이다. 지금 얘기 중인 영화 ‘줄리엣, 네이키드’의 제목 역시 영화 속 전설의 가수 터커 크로우가 공연 중 사라지기 전에 불렀던 노래 제목이다. 두 얘기는 이 부분에서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지만 영화를 만든 제시 페레츠 감독은 이야기를 좀 더 말캉말캉한 러브 스토리로 바꿔 놓았다. 거기에다 성찰의 드라마를 비벼 놓고, 할리우드 식으로 비교적 ‘해피’한 ‘엔딩’으로 끝을 맺기도 한다. 그게 손발을 오그라들게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슬며시 미소를 짓게도 만든다. 전설의 가수 터커 크로우는 잃어버린 20년간 사방 군데에서 여자를 만났고 마약과 술에 취해 살았으며 그래서 낳은 자식이 5명이나 되는데 각각 다 엄마가 다른 아이들이다. 지금은 아주 어린 아들 잭슨을 돌보며 살고 전처의 집, 뒤편 창고에서 백수로 지낸다. 그래도 그의 생계는 과거 그 전설의 음반이 만들어 내는 음원 수익으로 가능한 상태이다. 한때 막 살았던 인간은, 막무가내의 삶과 엉망의 일상을 살았던 사람은, 어느 순간 철 지난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한다. 그런 사람들은 비교적 통찰의 언어를 구사할 줄 안다. 터커 크로우가 애니와의 문자’질’에서 여자가 자신의 지난 15년 인생이 온통 마이너스뿐이라고 말하자 이렇게 답을 쓰는 식이다. “인생에서 15년을 낭비했다면 어떻게 될까요? 좋아요. 우선 숫자부터 줄여 봅시다. 좋은 책을 읽으면서 보낸 시간을 빼고, 즐거운 대화와 수면 시간도 빼요. 그것들은 중요한 거니까요. 그럼 낭비한 시간이 10년쯤으로 줄어들 거고 10년 미만의 모든 것은 세금 낼 때도 탕감해 줘요. 농담이고요, 난 내가 잃은 것들 때문에 여전히 마음이 아프지만 밤이 되면 그냥 그것을 받아들일 뿐입니다. 그래서 내가 잠을 잘 못 자나 봐요.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애니는 뒤늦었지만 아이를 갖고 싶어 한다. 그러나 터커를 만나러 런던에 갔다가 그가 갑자기 심장 쇼크로 병원에 실려 간 후 문병을 간 자리에서 그 많은 터커의 자식들, 몇 명의 전처들을 한꺼번에 만난 후 자신은 이 ‘패밀리’에 낄 틈이 없다고 느낀다. 아이를 갖는 것에 망설이게 된다. 애니가 전처들과 아이들에 둘러싸여 있는 터커를 만나는 병실 장면은 이 영화의 가장 코믹한 장면이면서도 왠지 모르게 가장 편안하고 평화로우며 동시에 아주 착한 장면이다. 이복의 형제들은 어색하고 낯설지만 서로 예의를 다해서 인사를 나누고 전처들은 ‘한심한’ 남자를 한때 공유했던 ‘한심한’ 사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서로를 용인하는 태도를 보인다. ‘줄리엣, 네이키드’는 하찮아 보이는 작품들, 트로트 콘서트 영화와 아이돌스타들의 팬덤 콘텐츠들이 극장가의 메인 룸을 차지하고 있는 이 허름한 세상의 한구석을 지키며 스스로 조용히 빛을 내고 있는 작품이다. 영화를 보고 나면 작은 진주를 발견한 듯한 느낌을 준다. 에단 호크의 늙어 가는 연기가 일품이다. 소설도 쓰고 연주와 노래도 하는 배우답게 이 문학 영화에 딱 들어맞는 메서드 연기를 펼친다. 로즈 번은 ‘노잉’(2009)을 찍은 지 15년이 지났지만 거의 그때의 모습에서 변하지 않았다. 영화 속 애니와 달리 15년을 허송세월하지 않았다는 얘기일까. 닉 혼비의 소설 속 캐릭터를 자기만의 무엇으로 재해석해 낸 배우들 연기의 합이 좋은 작품이다. 터커는 애니를 만난 후, 그들만의 재결합을 한 후에 25년 만에 새 앨범을 낸다. 앨범 제목이 ‘자, 그래서 나는 지금 어디인가?(So, where am I?)’이다. 당신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이 영화가 묻고 있는 질문의 핵심이다.
극장가 한편에서 조용히 개봉 중인 ‘프로이트의 라스트 세션’은 연극 ‘라스트 세션’(국내에서도 2023년 대학로에서 번안 공연됐다. 신구 이상윤 출연)을 기반으로 한 작품인 만큼 매우 연극적인 작품이다. 두 배우의 다이얼로그가 영화 전반을 차지하고 내용도 꽤나 깊고 철학적이라는 얘기이다. 다만 이전의 연극이 어쩔 수 없이 ‘평면적’일 수밖에 없었다면 영화는 영화인 만큼 시공간을 오가는 입체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차이라면 차이다. 예컨대 영화에서는 프로이트 박사의 꿈과 환상 장면이 나오는데 영화가 지니는 표현주의 미학의 정점 같은 것을 담보해 내는 것이다. 그런 장면은 마치 오래전 알프레드 히치코크가 만든 ‘스펠바운드’(1945)를 연상케 한다. 한국에서는 『 KBS명화극장 』 방영 당시 ‘백색의 공포’라는 제목의 영화였으며 그레고리 펙과 잉그리드 버그먼이 나왔던 작품이다. 정신분석이지만 스스로 정신병, 강박증을 앓고 있는 주인공은 종종 꿈을 꾸는데 그 내용은 마치 살바도르 달리의 초현실주의 그림과 같은 이미지 영상으로 이어진다. 이번 영화 ‘프로이트의 라스트 세션’에서도 프로이트 박사(안토니 홉킨스)는 꿈을 꾸는데, 자신이 누군가에 의해 휠체어에 태워진 채 어두운 복도를 지나가는 장면이다. 침대에는 자신의 딸 안나(리브 리사 프리에스)와 그녀의 동성 연인 도로시(조디 발포어)가 벌거벗은 채 서로 껴안고 누어 있다. 옆방에는 어릴 때 아버지가 그때 모습 그대로 나와 자신을 노려 보고 있으며 벽에는 온통 성 딤프나(정신병 환자들을 지켜주는 수호성인) 등 가톨릭 성인들의 조각상들이 가득하다. 프로이트 박사의 턱수염은 그가 흘린 피로 가득해진다. 영화 ‘프로이트의 라스트 세션’은 이처럼 연극 ‘라스트 세션’이 보여 줄 수 없었던 장면들을 ‘영화적으로’ 재창출해 낸다. 그 연출의 작법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프로이트의 라스트 세션’은 정신분석 의학의 최고 경지인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마지막 미팅 혹은 마지막 회의의 몇 시간을 보여 준다. (그는 며칠 후 구강암으로 인한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안락사 하는 것으로 나온다.) 회의의 상대는 옥스퍼드 대학교수이자 훗날 『나니아 연대기』란 소설을 써 판타지 문학의 최고봉 작가가 된 C.S.루이스이다. 영화 속에서는 잭 루이스(매튜 구드)로 불린다. 때는 1939년 9월 1일이 막 지난 때이고 장소는 영국 런던이다. 1일은 독일의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한 날이다. 런던 시내에는 연일 공습경보가 울리고 일단 아이들을 대상으로 소개령이 내려져 기차역에는 자신의 아이를 시골로 내려보내는 엄마들로 넘쳐 난다. 라디오에서는 네빌 체임벌린 총리가 나와 독일이 폴란드 국경에서 9일까지 물러나 줄 것을 요청했다는 담화를 발표한다. 체임벌린 내각은 전쟁 전 히틀러와 밀약을 추진할 만큼 순진했던 것으로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어쨌든 전쟁 전야의 와중이다. 곧 나치의 런던 대공습이 있을 것이다. 이런 와중에 프로이트 박사는 잭 루이스를 초대한다. 그가 얼만 전 발표한 신학 에세이 『순례자의 귀향』때문이다. 둘은 세계관이 다르다. 한때는 둘 다 무신론자로서 같은 대열에 있었으나 루이스는 현재 성공회로 개종한 상태이다. 지금의 세상을 과연 신이 창조했는지, 그런데 왜 이 모양(1차 대전에 이은 또 다른 대전 직전)인지, 신은 무능한 것인지 이기적인 것인지, 아니면 이 모든 것이 인간의 자유의지 탓인지, 그렇다면 인간은 왜 이렇게 된 것인지 두 박사는 치열한 논쟁을 벌인다. 프로이트 박사는 스스로를 ‘믿음과 숭배에 집착하는 열정적인 불신자’라고 명명한다. 그의 정신분석은 세상의 폭력과 인간 내면의 폭력이 어떻게 만나는지에 대한 기초에서 시작한다. 그는 인간의 모든 행동을 ‘젠주흐트(Senhsucht, 갈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본다. 그는 ‘우리가 보거나 인식하는 것은 다만 꿈속의 꿈에 불과할 뿐’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인간의 꿈에 대한 분석을 어떻게 사회과학적이고 논리적으로 뒷받침하느냐야 말로 프로이트 이론 분석의 시작이다. 반면 옥스퍼드 교수인 잭 루이스는 인간의 행동은 때론 신의 영역이어서 모든 걸 다 분석할 수는 없는 것이라고 본다. 그는 인간의 모든 잘못은 신이 부여한 자유의지를 올바로 행사하지 못한 탓이지 결코 신 자체의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루이스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 본질적으로 성적(性的)인 것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에 대해 비판적이다. 프로이트는 그런 그에게 정신분석학에서 성이란 쾌락의 상호성을 말하는 것이지 꼭 육체적 행위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가르친다. 재미있는 것은 두 사람 모두 아버지에 대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인데 두 사람이 종종 꾸는 꿈은 공히 숲속에 홀로 버려지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꿈에서 오히려 행복감을 느끼지만(아버지의 부재를 갈망했기 때문에) 루이스는 불안하고 공포스러운 와중에 꼭 사슴이 자신 주변에 있음을 느낀다. 프로이트는 큰 딸 조피와 그녀의 아들을 병으로 잃고 난 후 막내 딸 안나에 대한 자신의 집착에 시달린다. 안나가 갖고 있는 아버지인 자신에 대한 근친 갈망(일종의 애착 장애이자 엘렉트라 콤플렉스)을 어찌하지 못하는 비밀을 갖고 살아가는 중이다. 루이스는 루이스대로 전장에서 같이 싸우다 죽은 친구의 엄마 제니(올라 브래디)와 동거 중이다. 그 역시 비밀스러운 관계를 지니고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두 사람 모두 정신 분석학적으로 ‘사람이 쉽게 꺼내지 못하는 말’을 속으로 안고 살아가고 있는 인물들이다. 극중 프로이트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신 모모스 얘기를 한다. 모모스는 인간을 싫어하는 신으로 조롱과 풍자가 전문이며 인간과 살아가려는 다른 신들에 의해 신전에서 내쫓긴 상태이다. 인간은 인간 스스로를 혐오하며, 따라서 신 중에 닮은 신은 ‘쫓겨난’ 신 모모스 를 닮았다는 의미이다. 전쟁의 와중에 두 석학의 이 같은 비공식적인 고담준론의 모습은 역설적으로 꽤나 깊은 울림을 준다. 세상의 폭력은 내면의 폭력을 치유하는 과정이 전제되지 않으면 고쳐지지 않는다는 것, 인간 스스로 자신의 불완전한 내면을 올바르게 인식하지 않는 한 세상의 모든 잘못을 계속해서 이어가게 될 것이라는 점을 깨닫게 하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서만큼은 무신론자인 프로이트와 종교적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루이스가 합의해 가는 내용이다. 프로이트는 루이스와 헤어지면서 친구라는 표현을 쓴다. 프로이트는 루이스의 저서 『순례자의 귀향』을 루이스에게 선물로 주는데 거기 첫 장 서명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오류에서 오류로. 그러면 진실에 가까워질 것이다.’ 프로이트와 루이스가 실제로 만났는지는 역사에서 확인되지 않고 있는 대목이다. 이 영화는 순전히 상상력의 산물로 두 인물의 사상을 접목시켰을 때 어떤 논쟁이 벌어질까를 생각하고 개발한 대본이자 시나리오이다. 영화와 연극이 해낼 수 있는 상상력의 극치이다. 이런 걸 두고 흔히들 ‘예술적’이라는 표현을 쓴다. 안토니 홉킨스의 명불허전 연기는 두말할 나위가 없다. 루이스 역의 매튜 구드 연기도 그 못지가 않다. 저렇게 수많은 대사를 어떻게 외울까 싶을 정도로 달변의 연기들을 선보인다. ‘프로이트의 라스트 세션’에서의 ‘세션’ 열기는 실로 불꽃이 튀긴다. 두 사람의 연기와 그것을 잡아낸 연출(감독 맷 브라운) 덕이다. 대화 장면은 커트 수를 잘게 나누지 않고 대체로 길게(롱 테이크로) 찍었다. 영화의 시작과 후반에는 『천로역정』의 문구가 쓰인다. 1678년 존 번연이 쓴 성서소설이다. 영화 오프닝에 이런 말이 나온다. “이 세상의 황야를 거닐다가 / 한 동굴이 있는 장소를 발견하곤 / 몸을 뉘어 잠을 청했다. 그리고 꿈을 꾸었다.” 후반에는 루이스가 집 앞에서 만난 프로이트의 딸 안나와 이런 말을 주고받는다. “이 분노와 눈물의 땅 너머로 / 공포의 그림자만 어른거리지만 / 세월의 협박은 지금도 앞으로도 / 날 두렵게 하지 못하리.” 한 사람에게 동굴은 정신분석학이었고 또 한 사람은 성서였지만 세상의 공포가 자신을 두렵게 하지 못한다는 것에 합의했음을 보여 준다. 결국 신이 있느냐 없느냐의 논쟁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역사상 최고로 미스터리한 논쟁일 뿐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그 논쟁을 통해 세상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 나서는 일이다. 영화 ‘프로이트의 라스트 세션’이 가르쳐 주는 궁극의 대목이다.
한국에서 가장 과작(寡作)의 감독 군에 속하는 오승욱 감독이 9년 만에 세 번째로 내놓은 신작 ‘리볼버’는 필름 누아르에 정통한 감독과 제작자(사나이 픽처스 한재덕 대표)답게 어두운 욕망과 비정한 관계, 하드보일드한(hard-boild : 냉혹한) 액션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세간의 평가는 저점을 오가지만 나는 거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평자로서의 짐작으로는, 극의 결말 부분에서 감독과 제작자, 배우의 의견이 다소 차이가 있을 수는 있었다고 보여진다. 따라서 관객들도 그 부분에서 영화에 대한 전체 반응이 엇갈릴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영화의 완성도가 어떻다느니, 배우들의 연기가 어떻다느니 하는 식의, 밑도 끝도 없는, 저급한 인상비평에는 동조하기가 어렵다. ‘리볼버’는 잘 만든 영화이고 나름 숨이 막히는 서스펜스가 있으며 이런 류의 영화 치고 속도도 빨라서 오히려 감독이 느린 작가주의 풍을 따라가지 않고 상업주의 영화의 흐름을 타려고 했다는 생각마저 갖게 만든다. 이 정도면 흔히들 ‘재미가 있다’고들 말한다. 게다가 조영욱의 음악은 ‘올드 보이’나 ‘신세계’ 때처럼 자신의 강점과 특성(클래식과 재즈를 오가는 크로스 오버 풍의)을 잘 살려 내고 있어 극적 긴장감을 배가 시킨다. 영화는 모자란 틈이 별로 없다. 아마도 일부 저널에서 야박한 평가가 나오는 이유 중의 하나는 극중 인물인 ‘황정미’라는 존재 때문인 것으로 짐작된다. 주인공인 하수영(전도연)은 정마담이라 불리는 정윤선(임지현)의 도움을 받아 황정미의 존재를 좇는다. 황정미가 자신이 간신히 (돈을 착복해) 마련해 놓은 아파트와 7억이라는 돈의 행방을 알고 있다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황정미는 이스턴 프로미스라는 위장 조직의 본부장과 그레이스라는 총수 여인(김종수, 전혜진)에 의해 살해 당한 채 화종사(충남 청양의 화정사)에 묻혀 있을 것이라 추정된다. 이 비밀은 한때 하수영의 애인이자 선후배 경찰 사이였던 임석용(이정재)이 알고 있었는데 임석용 역시 누군가에 의해 살해 당한 후 자살로 위장 처리된 상태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으니 임석용의 부사수 형사였던 신동호(김준환)이다. 여기에 그레이스 동생으로 잔혹한 짓을 일삼은 양아치 조폭 앤디(지창욱)까지 나온다. 영화의 기둥 줄거리는 외견상 하수영 대 앤디, 곧 덜 악한 자와 아주 악한 자의 대결로 구성된다. 바야흐로 영화 ‘리볼버’는 인물 관계가 씨줄날줄로 엮여 있어 다소 따라가기가 힘들 만큼 복잡하다. 극 중에서도 정 마담과 하수영의 대화가 이를 보여 준다. 정윤선이 말한다. “(설명하기가) 좀 복잡해요.” 하수영도 말한다. “그래. 복잡하네.” 하수영과 임석용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고 부패 경찰이었다. 유흥업소의 뒤를 봐주며 돈을 챙기다가 거기에 마약 거래까지 포함된, 비교적 큰 혐의의 범죄를 저지른 인물들이다. 당연히 수사망에 잡혔고 하수영은 7억을 받는 대가로 입을 다물고 모든 걸 혼자 다 뒤집어쓴다는 조건을 걸고 2년을 복역한다. 당연히 경찰복은 벗었다. 하수영은 한때 사랑했던 남자가 자신을 몰락시켰다는 데 대한 분노와 원한을 갖고 있지만 그래도 그를 완전히 미워하지는 못한다. 그녀는 외롭고 화가 나 있으며 돈 때문에 절박하다. 한편으로는 자존심의 문제이기도 한데 어쩌면 이게 더 중요하다. 게다가 자신이 애지중지했던 아파트는 임석용이 정윤선, 곧 정마담에게 증여를 했지만 정작 소유주는 황정미란 여인의 것으로 돼있는 상태이다. 그녀는 정 마담을 옆에 두고 황정미를 찾아내야 할 상황에 처해 있다. 사람들의 불만은 이 황정미가 도대체 누구이며, 어디에 있으며, 또 왜 나타나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오승욱이 정작 노리고 있는 건 바로 그 혼선과 모호함이다. 황정미는 일종의 맥거핀이다. 맥거핀(Macguffin)은 영화에서, 일종의 눈속임 장치로 관객의 관심을 극대화하지만 결국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는 존재나 사건을 의미한다. 영국 출신의 유명 감독이자 서스펜스 영화의 대가인 알프레드 히치콕이 종종 사용했던 영화 기법이다. 그러니 황정미란 존재가 실제로 존재했든 그건 중요하지가 않다. 황정미는 무당(김혜은)의 신(神)딸로 돈이 엄청 많은 남자를 낚아 스위스 어딘 가로 도피해 있는 것으로 슬쩍 언급된다. 이스턴 프로미스 총수 그레이스 역시 무당의 또 다른 신딸이었으며 이 두 명이 조직을 놓고 경쟁한 것으로 보인다. 여하튼 그건 중요하지가 않다. 그레이스는 나중에 큰 비밀을 안고 있는 여자임이 드러난다. 어쨌든 황정미는 중요하지가 않다. 극중 인물들 모두 황정미를 좇고 있는 것이 중요하고 그중에서 결국 누가, 과연 누가, 그 실체를 깨닫거나 알게 됐는지, 그래서 돈 7억과 아파트를 차지하게 됐는지가 더 중요하다. 주지하건대 필름 누아르는 진실보다 욕망이 더 중요하다는 걸 보여주는 계열의 작품들이다. 누가 무엇을 저질렀든, 그리고 주인공이 누구를 사랑했든, 결국 각자의 욕망을 얼마만큼 실현했고 또 거기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타협해 갔는가가 중요하다. 정의는 아예 없다. 정의로운 인물도 없다. 그래서 이런 하드보일드 누아르 영화는 비정하고 냉혹하다. 나쁜 놈과 더 나쁜 놈이 있을 뿐인데 그게 오히려 더 지금의 사회를 현실적으로 반영해 그려나가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리볼버’는 역설적으로 사회적 리얼리즘의 영화인 셈이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황정미의 존재, 그 실체를 알 것 같다는 느낌을 준다. 하지만 논란은 있을 수 있다. 에둘러서 말하자면 황정미는 임석용의 ‘사랑’이다. 그는 하수영을 걱정했고 사랑했으며 미안해했다. 그래서 그는 황정미란 ‘존재’를 이용할 필요가 있었던 셈이다. 황정미를 그쯤으로 정리해 내면 영화 ‘리볼버’의 모든 줄거리는 단박에 이해가 간다. 그래도 불만인 관객들은 있을 수 있겠다. 현대 영화는 질문이 정확하고 답변이 명쾌하며 인물들 간 행동 동기가 뚜렷해야 하는 것이 철칙처럼 돼있다. 아마도 오승욱은 늘 그런 상궤(常軌)를 벗어나고 싶어 하는 연출자이고 바로 그런 점이 그로 하여금 첫 작품(‘킬리마낮로의 눈’)이 나온 후 15년 만에 두 번째 작품(‘무뢰한’)을 찍게 하고 또 9년 만에 이번 세 번째 작품을 찍게 만든 요인이 됐을 것이다. 영화를 대중들이 알아듣기 쉽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제작자 입장에서는 오승욱 감독은 통제하기 힘든 인물일 것이다. 이번 ‘리볼버’가 그의 영화 미래의 분기점이 될 듯싶은 이유는 그 때문이다. 말 잘 듣는 감독이 될 것인가, 계속 고집스러운 연출자로 남을 것인가. 대중 입장에서는 이래도 피곤하고 저래도 피곤할 수 있다.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캐릭터는 사실 하수영이 아니다. 정 마담이다. 이 여자야말로 누아르 영화의 필수 요소인 팜 파탈 역이다. 정윤선은 한편으로는 하수영을 돕지만(아마도 하수영이 감옥에 있을 때 임석용과 관계를 맺은 것으로 보이고 두 여자는 한 남자를 고리로 감정이 엮여 있는 셈이다.) 이스턴 프로미스 본부장의 하수인으로 일하고 있으며 한편으로는 신 형사의 정보원이기도 하다. 정 마담은 양 다리가 아니라 세 다리를 걸친다. 화종사에서 극중 모든 인물이 모이는 이유 역시 다 이 정 마담, 곧 정윤선 때문이다. 그녀는 아무도 믿지 않는다. 그녀는 하수영에게 또 이런 식으로 말한다. “언니. 나는요 언니가 요~만큼만 믿을 수 있을 거예요.” 이래저래 정윤선의 역할은 크다. ‘리볼버’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이다. 서브 텍스트들, 주변 인물들이 좋다. 임석용 역의 이정재도 사연 있는 눈빛 연기를 선보인다. 매력적이다. 가장 놀라운 것은 임석용의 선배로 지금 지병으로 죽어 가고 있는 전직 형사 민기현 역의 정재영이다. 민기현과 임석용은 한때 둘도 없는 짝이었고 그 사이에 하수영이 끼어들고, 또 게다가 둘이서 부패 경찰 짓을 해 먹었으니(민기현은 임석용이 이렇게 된 데에는 여자에 대한 욕망에 눈이 멀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민기현은 하수영을 미워한다. 그러나 하수영이 출소 후 돈을 찾고 임석용이 왜 죽었는지, 그것을 파헤치는 전체 전략을 짜는 데 있어 민기현은 ‘뒷 배’ 역할을 한다. 임석용이 죽을 때 쓰였던 리볼버 권총을 하수영에게 전달하는 것도 민기현이다. 리볼버는 복수와 비밀의 실체를 상징한다. 더 중요한 것은 리볼버 안에 세 발의 총알만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세 발. 임석용의 죽음에 간여한 인물들은 세 명이거나 세 명 군(群)일 것이다. 그런 상징과 은유가 넘치는 작품이 ‘리볼버’이다. 잘 따라가야 한다. 영화는 종종 사람들의 뇌를 빠르게 회전시킨다. 뇌 회전만이라도 사람들은 건강해진다. 무슨 말인지, 어떤 까닭인지 다 모르겠다 한들 그건 중요하지가 않다. 세상이란 해법 없는 질문과 사건이 연속되는 곳이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된다. 하드 보일드, 필름 누아르 영화를 즐기는 방식이다.